|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출6:10-13 |
|---|---|
| 설교자 : | 이성희 목사 |
| 참고 : | 2002년 09월 01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
출6:10-13, 딤후4장9-11
두 번째 소명과 거절
최근 우리 사회는 성형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고 이제는 병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병적으로 외모를 고치는 것을 신체변형장애증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타임지에서도 "얼굴의 칼"(Knife on face)이란 제목으로 성형수술을 다루었습니다. 한국이 성형수술을 제일 많이 하는 이상한 나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외모만 중시하는 사회 풍조도 문제지만 텔레비전의 영향도 많다고 봅니다. 기능보다 외모가 우선되는 세상에서 누가 성형수술을 하지 않겠습니까? 또 방송을 보면 심할 정도로 외모 고치기를 많이 합니다. 가정주부를 깜짝 변신시켜서 남편 만나게 하고, 외모를 고치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고 봅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언론이 다시 성형중독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전 어느 신문에 성형 중독에 대해 난 적이 있습니다. 성형중독자가 많이 있습니다. 강남의 성형외과에는 성형 기피인물 명단까지 나돈다고 합니다. 정신과의 여성환자 20%가 성형과 다이어트의 후유증으로 오는 환자라고 합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20대 어느 여성은 전형적인 '닥터쇼핑족'입니다. 자신의 애인과 다툴 때면 여지없이 성형외과를 찾습니다. 자신의 외모 때문에 남자 친구가 트집으로 싸움이 시작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여성은 지난 3년 동안 눈을 11번 고쳤습니다. 코를 5번 고쳤습니다. 얼굴피부의 박피수술을 2번 했습니다. 코 낮추는 수술을 1번 했습니다. 턱 깎기를 1번 했습니다. 유방확대를 1번 했습니다. 복부지방흡입수술을 1번 했습니다. 콧방울 넓히기를 1번 했습니다. 이 여성은 총 23회의 성형수술을 했는데 2,800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름을 없애느라고 여러 번 당겨서 배꼽이 가슴에 붙었다고 하는 조크까지 있습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영성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70세에 화장술로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면 내 방식으로 나를 미이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유월절의 신비는 그와 같은 불행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어야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이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저며오는 분은 없습니까? 이 노래가 은혜스러운 분은 없습니까? 이 노래가 은혜스러우면 문제입니다. 켄 블랜차드는 "먼저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외모나 사람됨의 가치를 알고 자신에게 긍지를 느껴야 합니다.
모세의 자기 콤프렉스를 보세요. 바로가 자꾸 커 보이고, 자신이 작아 보이는 걸리버여행기의 거인국 콤프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크신 분인데 바로가 커 보이니 문제는 자신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로 바로에게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모세는 주저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코 모세를 보내십니다. 요나를 보세요. 니느웨로 가기 싫어하지만, 다시스로 도망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따라가서 찾아서 보내십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을 잔해하고 예수님을 모르니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억지로 그를 거꾸러트리시고 잡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이에 대한 자존감, 자긍심, 건강한 자화상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가 아무리 큰 힘을 가진 당대 최강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더 사랑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직접 대화를 기피하십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시는지, 누구의 편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어 보내게 하라.
왜 하나님은 바로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고 모세에게 말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모세와 대화하시듯이 바로와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로와는 말하지 않으십니다. 바로와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모세와는 말이 통합니다. 말이 통하는 관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는 아닙니다. 바로도 하나님을 그의 삶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제 그만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연결된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논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관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입니다. 말이 통하는 의논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대화를 보세요. 자연과는 대화가 되는 말이 통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대화를 잇게 하신 것입니다.
야단을 친다고 하더라도 말을 한다는 것은 아직 관계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예 야단도 안친다면 이미 관계가 상실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는 아예 야단도 안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직접 얘기하셨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이것이 절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만 해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예 말도 안하고 야단도 안치고 상대도 안 하시면 우리는 절망입니다. 야단 맞을 때가 좋은 것입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존경하는 사람, 위대한 사람이 내게 말만 걸어와도 가슴이 벅차고 어깨가 으쓱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을 걸어오고 바로에게 하실 말을 모세에게 하게 하시는데 모세는 이 것만 가지고도 으쓱해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하실 말씀을 바로에게 하지 않고 모세에게 하시는데 이 인정, 가치, 기쁨을 알지 못하고 모세는 오히려 가지 못하겠다고 재차 거절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서 이르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듯 바로에게도 직접하시지 왜 절더러 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투정은 부리지만 가서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시고픈 말들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신의 역할입니다. 입에 주신 말씀만 외치면 됩니다. 설교자도 하나님이 입에 주신 말씀을 전하는 배달꾼에 불과합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합니다. 증인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석은 변호인이 할 것입니다. 판결은 판사가 합니다. 증인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호인도 판사도 아닙니다.
대화상대가 되는 것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대화 상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냥 하시면 될텐데 아브라함에게 의논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왜 내게 얘기하십니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논대상이 되어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바로에게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십니다. 바로가 완고해짐에 따라 하나님편도 더 강해지십니다. 이제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완강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테니 빨리 보내라고 하나님은 엄명하십니다.
2. 이스라엘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말합니다. 해방할 이스라엘이 듣지 않는데 해방시킬 바로가 어찌 듣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시편 135:17에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계시록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러 번 "이스라엘은 듣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의 답답함을 표현합니다. 스데반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유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듣지 않고 귀를 막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 7:57)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더 적극적이고 악질적으로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양심의 소리를 들려주는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자신에 대한 축복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거절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씁니다. 달콤한 약만 좋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내일의 얘기를 싫어합니다. 오늘의 얘기에만 귀 기울입니다. 내일의 영광보다 오늘의 평안을 선택합니다. 로마서 8:18의 말씀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현재 만족 때문에 장차 올 영광을 버립니다. 이것이 비신앙적 사고입니다. 눈앞의 고난 때문에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주시는 미래적 소망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해방의 소식을 듣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자세를 보십시오. 좌절, 절망, 의기소침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모세의 절망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롤하이저는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감정은 때로는 우리를 행복의 절정에 이르게 하고, 때로는 절망의 늪으로 끌어내린다. 기도하지 않으면 당신은 습관적으로 절망을 하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든지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망감은 지도자의 함정입니다.
백성들이 듣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런데 모세가 얼마나 설득했습니까? 설득도 안 해보고 듣지 않는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쉽게 절망하고 싶은 욕망을 가질 때가 인간에게는 흔히 있습니다.
윌리엄 보세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아는 사람 중 25%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25%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당한 조건에서 누군가 설득하면 당신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다른 25%는 당신을 좋아한다. 하지만 역시 누군가 그럴 듯하게 설득하면 당신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 25%는 당신을 좋아하며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끝까지 당신 편이 되어줄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절망이 지나친 기대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입이 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입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렘 6:10), 마음에 하례를 받지 못한 자(렘 9:26, 레 26:41)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입이 둔합니다"란 말은 이미 지나간 자기 변명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을 좀처럼 극복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그렇게 많이 하는가 봅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자신을 늘 변호하려 하는 나의 욕심을 치유하여 주소서."
3. 모세와 아론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전달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라는것입니다. 말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도자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혼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잠잘 때 옷을 입히고 벗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지요? 그런데 자기가 하겠다고 할 때에는 더 힘들어요. 하나님의 고충을 아십니까? 철없는 아기들은 부모의 고충을 모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하지 않겠다고 할 때도 힘이 드시지만 너무 자신이 하려고 할 때에는 더 힘이 드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제일 쉬운 것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시키십니까? 인간에게 위탁하시고, 관리하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려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먼저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잘 보존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남자를 만드신 다음에 여자를 만드시고 사랑해주라고 하십니다. 백성들을 맡겨 주시고 네가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드시고 네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위탁하시고 사람에게 하게 하십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을 인정하면 쓰시고,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 안 쓰십니다. 이사야에게 그랬고, 베드로에게도 그랬습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하나님은 긍정하십니다. 신적 부정이 있어야 신적 긍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젊은 부자 관원은 따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 믿어야 할 사람을 우리에게 위탁하십니다. "네가 구하라".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부탁하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정받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부정할 때 우리는 긍정을 받습니다. 주님이 위탁하신 일을 받들어 많은 생명을 구하고 주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또 한주간의 삶도 하나님이 내게 위탁하여 하기를 가기를 원하시는 곳에 가고, 만나기를 원하시는 사람을 만나고, 하기를 원하시는 말을 하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을 구원하는 위탁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