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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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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연재선 목사 |
참고 : | [2009년10월25일] 새생명교회 http://nlc1.cafe4.com/ |
나는 여호와라
언젠가 TV를 보니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소개됐다. 주인 할머니는 자기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거의 말끝마다 욕을 해댔다. 손님들에게 무엇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까지 음식을 사 먹으로 오느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어른들로부터 듣던 욕이어서 정감이 있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심한 욕을 퍼붓곤 했다. 나의 어머니도 내가 말을 듣지 않아 화가 치밀어오를 때면 심한 말씀을 하시곤 했다. 만일 오늘날 부모가 그렇게 한다면 당장 언어폭력이란 비난을 받을 만한 말이었다. 어쩌면 욕쟁이 할머니의 욕이 어린 시절의 그런 정감(情感)을 갖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음식점의 욕쟁이 할머니는 “요즘은 손님이 왕이라고 말하는데, 왜 손님이 왕이야? 우리 집에서는 주인인 내가 왕이지!”라고 말했다. 그런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정겨운 욕을 한다 할지라도 맛이 없으면 오지 말라는 말이다.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욕을 했던 어머니는 다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한 욕설 속에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자식이 잘못하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그런 욕설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비록 자녀가 잘못할 때는 욕을 할지라도 끝까지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관계는 계속 유지한다. 물론 욕하는 그 자체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을 하면서 까지도 자식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다(4:22). 그런데 바로는 그런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으로 삼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당신(當身)의 백성으로 삼을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지켜내시고야 말겠다는 의지(意志)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애굽과 하나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전쟁이 있게 된 것이었다. 자기 아들을 해치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을 빠져나올 수 없는 당신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위해 몸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셨다. ‘여호와’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자신의 언약에 충실하시기 위하여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게 손수 일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애굽과의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이 손수 싸우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었다(7).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의중(意中)을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조급함과 그로 인해 더 많아진 고역(苦役) 때문에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마치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토록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아무 상관없는 자들처럼 버리시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을 애당초 약속하신 곳까지 데리고 가시고야 말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말을 안 듣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애굽이 아무리 힘으로 애굽의 탈출을 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호와이시기에 당신의 아들이요 장자로 삼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당장 버리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자리까지 이끌고 가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육신의 부모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완전한 부모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목이 짧아 당장 눈앞의 것에만 매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은 긴 안목이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애굽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떠나게 하려 하자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심한 고역(苦役)이 주어졌다. 그 고역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그냥 애굽에 주저앉기를 원했던 것이다. 즉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은 당장의 편안함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아직 보이지 않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었다. 자녀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공부하기가 힘드니까 오락실에 가서 앉아있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편안히 살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복이고 감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떠나야 할 시간에 떠나는 것이 복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편안함에 빠져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당신의 자녀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광야를 시속 4km로 걸어가는 이스라엘과 같은 속도로 무려 40여년 동안 함께 걸으셨다. 하나님에게는 채 한 걸음도 되지 않는 길을 무려 40년 동안을 인간과 동행하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계가 있는 사람의 말을 하셨다. 사랑이란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와 말을 할 때는 앉아서 눈을 맞춘다. 걸어갈 때도 같은 속도록 걸어간다.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받아주고 반응한다. 사실상 부모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성숙한 자녀는 그렇게 부모가 자기와 함께 했음을 알고 고개를 숙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족한 자이었음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한계가 있는 인간에게 맞추어 일하시고 참으셨다면 그것이 은혜인 것이다. 그런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된다.
사랑은 겸손하신 하나님을 닮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그런 고차원적(高次元的)인 말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랑이다. 그냥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사랑이다. 교회에서도 특별해지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만 구원하셨다면 이 세상에 구원 받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도(聖徒)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내가’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심으로써 애굽에서의 탈출이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신다. 이처럼 온 우주의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천천히 걸으시고, 허리를 낮추시고, 인간의 말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을 지셨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복이란 지금 당장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거나 남들과 차별화된 어떤 높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나의 어머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잘 모른다. 늘 자식을 우선으로 삼으시고 잡수시는 것을 양보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더욱 감사하고, 무언가 해드리지 못함에 애틋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효도일 것이다. 신앙 역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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