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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77&page=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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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
14세기는 유럽사에서도 역경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재난의 시기였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전환기로서의 진통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이제 신앙의 문제보다는 정치나 경제적인 관심사들이 우선시 되었고 물질만능주의로 사치와 방탕이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부패가 만연했고 거짓교리와 관행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성경의 가르침들은 무시되었다. 이러한 때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앞서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하여 온 생애를 다 바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워지고 있는 존 위클리프이다.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젊음
진리의 수호자 존 위클리프는 1329년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6세 쯤에 당대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대학시절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 뿐 아니라 열성있는 신앙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그는 모든 방면의 학문에 통달하고자 했다. 스콜라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교회법과 특히 자기나라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것은 훗날 국가와 종교의 자유를 위해 크게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대학에 있으면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열심히, 철저하게 성경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럼으로써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알게 되어 자신을 그리스도 사업에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외되고 격리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한다.
교황권과의 대립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 철학, 법률을 공부한 그는 1360년 동대학의 학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쓴다. 또한 필링햄 교구 교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는다. 그는 유창한 화술과 정당한 논리, 수준 높은 열정적 강의로 명성을 얻게 되고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복음박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는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상에서의 통치성격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중 1366년 당시 통치자로 활약하던 곤트의 존에 의해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된다.
그의 이러한 정치계 입문은 전부터 교황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반감을 갖고 있던 그에게 교황제도의 실정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당시 교회를 이끌어간 교황들은 교회의 순결성과 천부적인 역할 감당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세속적인 소욕이나 야심이 중대 관심사였다. 그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극심하게 했다. 문예부흥이 최고조에 이른 때인 만큼 교회의 지도자와 일반 신도에게 있어서 교회의 개혁이 지금처럼 절실히 필요한 때는 없었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버린 세상은 완전히 표면적인 의식들과 인간의 전승에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는 온갖 지독한 폭정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버리고 잔인하고 가증한 생활을 추구했다. 수많은 의식과 속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의 양심이 위협과 유혹을 받았다.
위클리프는 로마교회의 권력남용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다. 그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우상(형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으며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시민 통치에 대해」에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복음정신으로 다스리도록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면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공박하며 교황의 폐지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중세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사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회에 반대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교황권의 오류가 분명해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다.
죽음을 무릅쓴 진리의 파수꾼
위클리프는 로마교회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성실하고 청빈한 그의 삶은, 로마교회의 불법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위클리프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그의 깨달음을 전파하며 다니자 로마교황은 대노하여 1377년 성 바울교회에 있는 런던 감독의 법정 앞에 그를 소환했으나 왕실의 보호로 무산되었다. 그후로 그는 1378년, 정치적인 무대에서 물러나 신학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위클리프는 일반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롤라드라는 청빈한 순회 전도단을 조직하여 각처로 파송하여 일반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그들은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가서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들 사역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왕들과 로마 교황은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 선고를 내렸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원수요 국가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추격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복음사업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까지 걸고 헌신하였다.
최초로 영어 성경 번역
종교개혁 이전에는 아주 적은 수의 성경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당시 로마교회는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기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위클리프는 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고자 영어로 성경번역 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했다. 그는 누구라도 쉽게 성경을 볼 수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자 계획이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였다. 보통 한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는 열 달 정도 걸렸다. 그럼에도 드디어 그의 소원대로 최초의 영어성경이 나오게되어 영국 국민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로 인해 흑암의 시대는 지나가고 여명의 빛이 세상에 비추이기 시작했다 .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다. 그는 교회의 참된 권위는 교황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성경은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아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의 일년치 봉급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은 당황하였다.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정하여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며 세 번이나 위클리프를 법정에 소환하였다.
위클리프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직 정치를 비난하고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교리를 철회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담대하게 자신의 의견을 확신있게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당신들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하는가? 그대들은 누구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을 아는가?” 법정에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개혁자의 최후
그 후 그는 온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진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138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약 100년 동안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로 그의 성경을 목에 단 채 화형을 당하며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70권이나 남아있음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경을 번역하고 필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교황청에서 존 위클리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그가 세상을 떠난지 40년 후에 콘스탄스 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사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재를 근처에 흐르고 있는 스위프트 강에 던져 버렸다. 이에 대해 한 저술가는 말했다. “그 재는 스위프트 강물을 따라 에이번으로, 에이번에서 세베른 강으로, 세베른 강에서 영국해협으로 영국해협은 대양으로 옮겨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독일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약 150년 전에, 위클리프는 이미 교황 중심적인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로마교리를 비판하였다. 그의 해박한 지식, 명석한 사고력, 진리를 주장할 때 보여준 확신, 그리고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담력 등은 그보다 후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지적으로 몽매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시대였지마는, 이 최초의 개혁자는 순결한 생애와 근면한 성경연구활동, 돈과 권력에 매수되지 않는 청렴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실제론적인 비판가이며 변증가이다. 그의 사상은 100년을 지나는 동안 체코의 후스에게 전달되었고 후스는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실 위대한 종교 개혁을 이룬 루터의 업적은 이러한 초대 개혁자들의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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