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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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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81&page=6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 존 후스

교회사를 보면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운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이태리의 사보나롤라 그리고 보헤미아의 존 후스이다. 이들이 살았던 14세기부터 16세기 초, 중세 말기의 교회형편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사도시대의 특징인 열렬한 사랑, 진지한 소망, 그리고 단순한 믿음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겉으로는 풍성하였으나 백성들은 무지와 미신 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이때만큼 교회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때는 없었다. 이러한 때에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진리를 위해 몸을 불살랐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횃불로 불리워지는 보헤미아의 존 후스다.

불우했던 어린시절

 

보헤미아의 횃불로 불리워지는 존 후스는 1367년 보헤미아(체코)의 남쪽 소읍인 후시넥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계를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다. 신앙이 신실한 그의 어머니는 후스가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후스는 어느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13세에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5년 후 프라하 대학교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합창단원이 되어 생계를 이어 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험난했다. 그는 후일 자기가 사제가 된 것은 좀 넉넉하게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불우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개혁의 기반이 된 성서와 내면의 갈등

 

그의 학문적 재능과 열심은 1398년 프라하대학 신학 교수가 되게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후스는 복음적 사역을 했다기보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대학 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젊은 대학교수로서의 삶은 편안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의 나는 학력을 자랑하고 화려한 외모와 서양장기를 즐기고 동료의 잔치와 향연에 참석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후스가 자기의 학문적 명성에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그의 마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그는 자신과 주님만이 아시는 죄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겸손하였다. 장기를 두다가 졌을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화를 내는 못된 습성에 대해서도 괴로워하였다. 그즈음 그는 교회 역사 속의 인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들의 덕행과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된 삶에 매료되었다. 그는 성 로렌스의 역사를 읽던 중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불꽃에 집어넣고, 자기 인내를 시험할 정도로 감성적이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후스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의무감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책임감이 그로 하여금 이전과 다르게 성서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는 점차 교회에 있는 엄청난 악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성서 연구를 무시한데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주께서 내게 성서를 가르쳐주었을 때 나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내 마음에서 떨쳐버렸다.”고 나중에 고백했다.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보헤미아를 뒤흔든 진리의 파숫군

 

1402년에 후스는 성직자로 임명받았고 같은 해 프라하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유력했던 베들레헴 교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거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그의 설교는 보헤미아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라틴어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예배와는 달리 베들레헴의 예배는 체코어로 진행되었다. 프라하 대학은 황제 카를 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개인의 경건과 순결한 삶을 강조하며 세속화된 교회를 비판했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가 성경에 있음을 강조하며 따라서 교황이 가지고 있는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설교를 교회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성만찬은 성도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설교하였다. 당시 빵은 성도들이 참여했지만 포도주는 사제들만 나누었다.

 

그의 가르침은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대학에서도 그의 영향력이 점점 커갔으며 위클리프의 저작들도 점점 인기가 더해갔다. 사람들은 사회악과 교황청의 타락에 눈을 뜨게 되었고 생활이 변화되었다. 그가 설교하는 곳이면 교회나 야외나 가리지 않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는 진지하게 사람들의 미신숭배와 성직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먹였다. 이 창백하고 깡마른 진지한 표정의 후스를 본 사람과 그의 순결하고 엄격한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사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교황청의 대립과 투옥

 

1412년 교황은 십자군을 일으켜 면죄부를 발매하였는데 후스와 프라하의 제롬은 이전에 면죄부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성직자들을 비판했던 것보다 더한 강도로 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이듬해 후스와 그의 친구들은 파문당했다. 그는 프라하를 떠나 고향인 후시넥으로 가서 은거하였다. 이곳에서의 망명생활은 그의 삶에서는 대단히 힘겨운 기간이었지만 이기간은 오히려 그의 위대한 저작 “교회론”이 저술된 역사적 시기였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했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죄는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교황이든 주교든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세울 수 없으며 거짓임이 분명할 경우 신자는 성직자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후스는 서방교회 안에서 대분열로 알려진 대단히 소요스러운 시점에서 살았다. 두 번에 걸친 그리고 세 명의 교황이 서로 자기가 교회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후스의 비판과 개혁에 대한 요구는 그 분열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당시 교회의 고위관리들은 후스를 분열된 교회의 화해를 막는 장애물로 간주하였다.
1414년에 후스는 콘스탄스 공의회에 소환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그문트가 그의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이 공의회에서 마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서 분열을 최종 종식시켰다. 그러나 안전보장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에서 후스는 즉시 투옥되었다. 그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도리어 후스가 쓰지도 않았던 글들을 빌미로 법정에 고소당하고 이단자로 판결 받았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서의 오랜 투옥,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등으로 끈질기게 그가 주장했던 입장을 철회하라고 강요받았지만 그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길을 선택했다. 후스는 공의회에서 “나는 황금으로 가득한 예배당을 준다고 해도 진리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찬란한 순교

 

1415년 7월 6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후스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신조화하고 변호하고 설교하였다”는 이유로 그와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라고 선고했다. 끌려나와 화형 기둥에 묶였을 때 다시 한번 철회를 요구받았다. “차라리 나에게 맷돌을 매어 바다에 빠뜨리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불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런 일들은 바로 나를 주님의 팔에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후스는 많은 사람이 조롱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했다. “주 예수님! 주님의 크신 자비를 따라 나의 모든 대적들을 용서하소서. 주님께서는 저들이 나를 거짓증거로 고소한 것과 거짓혐의를 꾸며낸 사실을 아시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자비로 저들을 용서하소서.”

 

후스는 7명의 감독들에 의해 정죄의식이 진행되었다. 후스의 모든 사제복이 벗겨지고 그의 머리에는 ‘이단의 괴수’라는 글귀와 날뛰는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씌워졌다. 오전 10시 경 나무 기둥에 묶인 후스는 장작더미에 불이 붙자 “주여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한 후 찬송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뒤에 그의 재는 강에 뿌려졌다.

진리는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삼았으며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성서와 위클리프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진정 탁월한 신학자였으며 명설교가였다. 그의 열정은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글과 3000편이 넘는 설교를 남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후스가 화형되기 전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처사에 그의 추종자들은 의분을 일으켜 카톨릭 교회와 독일인들이 지배하는 교회와 독일인들의 정권을 전복시켰다(후스전쟁 1419-1434). 끝까지 후스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후에 칼빈주의와 합류하였고, 한 부류는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모라비아 형제단”이라 불리는 독립교회로 살아남는다.

 

1432년 후스파 교도들은 공의회가 열리는 바젤에 와서 후스가 지향했던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인정받았다.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의 선구자로서 뿐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후스의 순교일인 7월 6일은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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