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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83&page=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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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 존 낙스
전쟁으로 찢긴 작고 가난한 나라 스코틀랜드에게 16세기는 엄청난 혼란의 시기였다. 상업과 문화가 모두 뒤쳐져 있었고,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 간의 내분으로 갈갈이 찢겨 있었다. 왕조가 있긴 했으나 유약했다. 교회는 왕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부유했지만 대단히 부패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 때문에 이 작은 왕국은 프랑스에 지원을 기대하였다. 종교에 있어서도 개혁은 철저히 억압당했다. 이러한 때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한 평생을 불사른 사람이 있었으니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의 창시자라 불렀던 존 낙스이다.
개혁의 싹을 키우게 했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존 낙스는 1513년 스코틀랜드 해딩턴에서 지주인 윌리엄 낙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소년 낙스는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낙스는 교회법을 배웠고, 스콜라 신학을 이끌던 존 메이저(1469-1550)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메이저는 교리면에서는 철저한 로마 가톨릭의 신자였지만 교황청의 행정을 비판하였다. 국가의 권위는 국민에게서 유래하고 왕정의 독재자가 시민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급진사상을 가진 자였다. 낙스는 1540년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공증인으로, 귀족 자제들의 개인교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정치상황은 내부의 분쟁과 외부의 위협으로 고통스러웠으며 종교적인 타락은 극에 달했다.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그들이 국왕이나 귀족들의 자손들이거나 혹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무지와 교회 공동체의 운영은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영적 변화를 목말라 했다. 그러던 차에 1528년 루터의 생도로 복음을 전파하던 경건한 패들릭 해밀턴이 이단으로 기소되어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조지 위샤트도 1548년 해밀턴의 뒤를 따랐다. 그의 죽음은 스코틀랜드 전체를 격노하게 만들었으며 2달이 못되어 그 사형을 명령한 비튼 대주교는 암살당했다. 낙스는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개신교 국가가 될 때 까지는 결코 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사실 위샤트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신앙은 많이 개신교적이었으나 개혁주의자는 아니었다.
갤리선의 노예가 되다
낙스는 당시 이를 진압하러 스코틀랜드에 와 있던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갤리선의 노예로 19개월을 지냈다. 프랑스 전함 밑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노를 젓는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다가 심한 질병으로 인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낙스는 노예생활을 통해서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른 노예생활은 참담 그 자체였다. 갤리선에는 선장용 객실 하나와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노예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한가운데는 우뚝 솟은 복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감독이 이 위로 왕래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항해 중에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어느 역사가는 “스코틀랜드에 자유를 주었던 그 손이 거의 쇠사슬에 2년 동안 묶여 있었다”고 말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영국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 낸 것이다. 영국황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5년 동안 영국에서 목회했다. 영국 체류기간에 그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에드워드 6세는 낙스에게 로체스터의 감독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낙스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정치가와 야합하여 감독이 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성경이 감독 정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메리 튜더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300명이 순교하고 800여 명이 대륙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낙스도 1554년 다른 개신교 신자들과 함께 유럽으로 피신하였다. 제네바에서 그는 칼빈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되어 개신교 신학에 깊이 빠져 들었다.
불타는 마음으로 조국을 향해
낙스는 4년 동안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온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그곳에서의 체류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제네바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후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평가했다.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출판된 것도 이 기간 중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개신교 지도자들로부터 돌아와 개신교 운동을 주도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다. 낙스는 이단자로 찍혀 있는 데다 추방자였기에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559년 조국으로 돌아온 낙스는 사람들이 당황해 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우상숭배를 강경하게 배척하고 국민들이 복음의 명백한 진리에로 돌아오도록 격려하였다.
낙스가 없는 동안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와 결혼했다. 섭정이며 가톨릭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이들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의 지배를 두려워했다. 민족주의와 종교적인 불만이 결합되면서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절정에 달했다.
1560년 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에든버러 중심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를 담임하면서 전투중인 개신교도들에게 설교로 힘을 북돋아 주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슬픔과 혼란과 공포가 기쁨과 명예와 용기로써 변화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베냐민 지파를 이기게 하셨듯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절이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는 여왕에게 “낙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한 청년은 낙스의 설교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 설교를 시작 할 때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그가 다니엘서를 강해 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낙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종교개혁이 뿌리를 내리다
여왕의 군대와 개신교 신자들과의 전쟁은 결국 개신교도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낙스가 작성한 칼빈주의 신앙노선을 선택했다. 아울러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거부했으며 미사를 금지한다고 공포했다.
낙스와 사역자들이 나흘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고 의회는 이것을 “균형잡히고 건전한 교리”라고 하면서 승인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합법적으로 승인되었다. 또한 치리서를 펴내어 교회 행정법을 구체적으로 세웠다. 이로서 장로교 정치체제가 확립되었고 대학을 비롯해 일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이 밖에도 낙스는 장로교 예배의식을 확립하기 위해 공동전례 집을 집필했다. 교회는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덕분에 건전한 기초 위에 서게 되었다. 이 고백서는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대체될 때까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개신교회는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1570년 낙스는 중풍에 걸렸다. 그 뒤 부분적으로 원기를 되찾고 죽기 직전까지 옛 정열을 가지고 1572년 11월 24일 차분한 확신과 영적인 위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시신은 여러 해 동안 설교하던 곳인 세인트 가일 묘지에 안치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섭정 왕 모튼은 그의 무덤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여기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잠들어 있습니다.”
칼빈의 가장 현저한 영적 제자를 꼽는다면 그리고 그 평가 기준을 사역의 항구성과 광범위성으로 잡는다면 그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존 낙스이다. 그는 매우 인상적인 개성과 감화력을 지녔고 매우 독특하고 성공적인 전투를 벌임으로서 종교개혁 시대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독자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사에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개혁자였다. 강렬하고 종교적이고 논쟁적이고 민주적이고 용감하고 비타협적이고 강인했던 낙스는 종교적인 개혁으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해 주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까지 강건하고 활기찬 교회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안정을 가져왔다. 낙스의 신앙은 지금까지도 스코틀랜드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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