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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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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2.15 설교 |
왜 모세인가?
출2:11-15
얼마 전에 모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있었죠. <이집트 왕자 모세>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마 시대의 아이콘인 성공주의와 맞물려서 그랬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학계, 출판계, 그리고 언론계가 모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조나단 커쉬는 모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한 [모세의 삶]을, 독일의 한네스 슈타인은 [모세 그리고 민주주의의 계시]를, 프랑스의 제랄드 메싸디에는 장편소설 [모세]를, 잔 애스민은 서구의 유일신론이 이집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담은 [이집트인 모세]를 냈습니다.
3천 2백 년 전에 활동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오늘날 이렇게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모세 새로 보기’에 나타난 모세 상은 다분히 서구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것들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이들의 모세 이야기에서 그들은 ‘모세는 실제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왕 람세스의 여동생과 히브리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모세는 람세스와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도 이것이 줄거리입니다. 그러면 진짜 성서가 말하는 모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출애급기에 나타나는 모세는 이집트 왕자가 아닙니다. 그는 히브리 백성 가운데 태어나 인간의 기본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나일강에 버려진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왕궁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친 어머니의 젖으로 자란 다음에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밖으로 나갔다가 히브리 동족이 매 맞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이 장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세의 이 행동이 순간적인 실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보세요. 이 장면을 성경은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2:12). 이것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왕궁에 있는 동안 거기서 벗어 날만을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공주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히브리 사람의 자식이라는 게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성서는 모세를 마치 다른 둥지에 알을 놓고 부화를 시키는 뻐꾸기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성서는 결코 모세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되레 그의 약점을 상세하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의 동족을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모세는 번번이 자기는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섭니다(출3:11).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동족들에게 부딪치자 하나님께 노골적인 불평까지 쏟아 놓습니다(5:22-23). 못하겠다는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이것만 봐도 모세는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부하는 모세를 계속 설득합니다. 기적을 보여주면서 까지 말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간 뒤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살게 되죠. 여기까지가 창세기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그로부터 430여 년이 지난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하여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면서 히브리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탄압하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집트 왕은 히브리 백성들의 인구가 불어나자 여러 정책을 썼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갓 태어난 아이 중에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법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 무렵에 모세가 태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 개인이나 히브리 민족은 거의 그 처지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록자가 모세를 이집트 왕궁의 왕자로 생각했을 리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세를 보면서 그를 개인적으로 살피고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곧 그들의 민족과 연관을 지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고난 받는 히브리 민족이 없이는 모세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곧 고난 받는 히브리 민중들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철학처럼, 요즘 우리처럼 관념적으로, 생각 속에서 일궈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때, 은밀히 또는 소곤소곤, 특별한 사람에게 신령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은 그렇게 소곤소곤 하면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당당히 만인에게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하나님은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구원도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나라면 나라, 공동체면 공동체가 함께 받는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드디어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사람들에게 드러낸 사건인 것입니다. 성서는 ‘신은 누구인가?’라고 묻지 않고, 일하는 하나님, 고난 받는 백성들을 구원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체험으로 하나님을 압니다. 그게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역사체험 현장이 곧 출애굽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슬그머니, 남몰래 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3:6-9, 6:3-8).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를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증거하는, 히브리 백성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삶의 현장,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듣고, 보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격분하여 이 땅으로 걸어 내려오기도 하는 분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은 마치 투사와 같은, 역동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공동체적입니다. 개인의 욕망 보다는 여러 사람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도 백성들의 탄식 소리와 연결을 됩니다 (2:23-24).
그러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신’ 또는 ‘하나님’을 히브리 사람들처럼 듣고, 소리치고, 뛰어 내려오고 하는 분으로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히브리 민족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이란 모름지기 어떤 움직임이나 격정도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말하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제1운동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은 감정이나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고난과도 무관해야 합니다. 이런 바탕에서 스토아 철학은 윤리학을 세우는데,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격정이나 열정으로 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경지를 ‘아파테이아’즉 고난이 없는 상태, 고난과 무관해지는 의식 상태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명상을 깊게 해서 그 어떤 요동도 없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이건 구약성서의 하나님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선이나 명상이 기독교와 무관한 일종의 철학사조인 것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무관심이란 단어인 apathy가 나온 것입니다. 무관심이란 누구하고도 아파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관심의 반대말은 ‘동정’인데요 그건 sympathy입니다. ‘함께 sym’, ‘아파한다 pathy’는 뜻입니다. 아파테이아의 경지는 누구하고도 아파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신 이해가 아닙니다. 적어도 출애굽기 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감히 그들만의 신 이해를 이렇게 설정하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하나님을 체험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출애굽의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입니까? 출애굽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함께 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이제 설교에 깊숙하게 들어와 계신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받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꼭 이렇게 부르짖을 때에야 비로소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행동을 개시하신 하나님이 금방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질질 끌고 있을까?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물으실 거 아닙니까?
뭐, 누군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느라고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애굽에서의 찌든 때를 벗겨내려고 그랬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뭘까요?
그것은 히브리 민족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의 창조 과정에서 히브리민족이 이해하는 하나님 상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일 안하고 편안하게 사람을 부리면서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까딱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일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사람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세워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히브리 사람들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불평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로구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란 존재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조종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나’라면 백성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서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히브리 민족의 신앙 정신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이런 믿음으로 역사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우프트라는 학자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말씀은 ‘나는 존재케 하는 자다’라고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노예 생활 속에서 체념하고 살아온 그들은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모든 것을 알아서 척척해주는 해결사로서의 전능이 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은 단지 이집트 탈출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과 부모자녀 지간의 계약을 맺습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점차 스스로 서야 할 일이 증대 할 때마다 출애굽을 도우셨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믿고 모두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싸워야 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로 모세를 우리 앞에 세우시는 겁니다. ‘스스로 서기 위해 죽도록 살았던’모세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를 제대로 읽는다면, ‘스스로 서기 위해’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출2:11-15
얼마 전에 모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있었죠. <이집트 왕자 모세>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마 시대의 아이콘인 성공주의와 맞물려서 그랬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학계, 출판계, 그리고 언론계가 모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조나단 커쉬는 모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한 [모세의 삶]을, 독일의 한네스 슈타인은 [모세 그리고 민주주의의 계시]를, 프랑스의 제랄드 메싸디에는 장편소설 [모세]를, 잔 애스민은 서구의 유일신론이 이집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담은 [이집트인 모세]를 냈습니다.
3천 2백 년 전에 활동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오늘날 이렇게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모세 새로 보기’에 나타난 모세 상은 다분히 서구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것들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이들의 모세 이야기에서 그들은 ‘모세는 실제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왕 람세스의 여동생과 히브리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모세는 람세스와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도 이것이 줄거리입니다. 그러면 진짜 성서가 말하는 모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출애급기에 나타나는 모세는 이집트 왕자가 아닙니다. 그는 히브리 백성 가운데 태어나 인간의 기본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나일강에 버려진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왕궁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친 어머니의 젖으로 자란 다음에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밖으로 나갔다가 히브리 동족이 매 맞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이 장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세의 이 행동이 순간적인 실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보세요. 이 장면을 성경은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2:12). 이것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왕궁에 있는 동안 거기서 벗어 날만을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공주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히브리 사람의 자식이라는 게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성서는 모세를 마치 다른 둥지에 알을 놓고 부화를 시키는 뻐꾸기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성서는 결코 모세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되레 그의 약점을 상세하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의 동족을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모세는 번번이 자기는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섭니다(출3:11).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동족들에게 부딪치자 하나님께 노골적인 불평까지 쏟아 놓습니다(5:22-23). 못하겠다는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이것만 봐도 모세는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부하는 모세를 계속 설득합니다. 기적을 보여주면서 까지 말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간 뒤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살게 되죠. 여기까지가 창세기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그로부터 430여 년이 지난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하여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면서 히브리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탄압하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집트 왕은 히브리 백성들의 인구가 불어나자 여러 정책을 썼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갓 태어난 아이 중에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법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 무렵에 모세가 태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 개인이나 히브리 민족은 거의 그 처지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록자가 모세를 이집트 왕궁의 왕자로 생각했을 리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세를 보면서 그를 개인적으로 살피고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곧 그들의 민족과 연관을 지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고난 받는 히브리 민족이 없이는 모세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곧 고난 받는 히브리 민중들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철학처럼, 요즘 우리처럼 관념적으로, 생각 속에서 일궈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때, 은밀히 또는 소곤소곤, 특별한 사람에게 신령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은 그렇게 소곤소곤 하면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당당히 만인에게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하나님은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구원도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나라면 나라, 공동체면 공동체가 함께 받는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드디어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사람들에게 드러낸 사건인 것입니다. 성서는 ‘신은 누구인가?’라고 묻지 않고, 일하는 하나님, 고난 받는 백성들을 구원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체험으로 하나님을 압니다. 그게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역사체험 현장이 곧 출애굽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슬그머니, 남몰래 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3:6-9, 6:3-8).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를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증거하는, 히브리 백성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삶의 현장,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듣고, 보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격분하여 이 땅으로 걸어 내려오기도 하는 분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은 마치 투사와 같은, 역동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공동체적입니다. 개인의 욕망 보다는 여러 사람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도 백성들의 탄식 소리와 연결을 됩니다 (2:23-24).
그러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신’ 또는 ‘하나님’을 히브리 사람들처럼 듣고, 소리치고, 뛰어 내려오고 하는 분으로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히브리 민족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이란 모름지기 어떤 움직임이나 격정도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말하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제1운동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은 감정이나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고난과도 무관해야 합니다. 이런 바탕에서 스토아 철학은 윤리학을 세우는데,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격정이나 열정으로 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경지를 ‘아파테이아’즉 고난이 없는 상태, 고난과 무관해지는 의식 상태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명상을 깊게 해서 그 어떤 요동도 없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이건 구약성서의 하나님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선이나 명상이 기독교와 무관한 일종의 철학사조인 것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무관심이란 단어인 apathy가 나온 것입니다. 무관심이란 누구하고도 아파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관심의 반대말은 ‘동정’인데요 그건 sympathy입니다. ‘함께 sym’, ‘아파한다 pathy’는 뜻입니다. 아파테이아의 경지는 누구하고도 아파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신 이해가 아닙니다. 적어도 출애굽기 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감히 그들만의 신 이해를 이렇게 설정하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하나님을 체험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출애굽의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입니까? 출애굽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함께 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이제 설교에 깊숙하게 들어와 계신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받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꼭 이렇게 부르짖을 때에야 비로소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행동을 개시하신 하나님이 금방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질질 끌고 있을까?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물으실 거 아닙니까?
뭐, 누군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느라고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애굽에서의 찌든 때를 벗겨내려고 그랬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뭘까요?
그것은 히브리 민족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의 창조 과정에서 히브리민족이 이해하는 하나님 상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일 안하고 편안하게 사람을 부리면서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까딱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일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사람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세워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히브리 사람들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불평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로구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란 존재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조종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나’라면 백성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서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히브리 민족의 신앙 정신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이런 믿음으로 역사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우프트라는 학자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말씀은 ‘나는 존재케 하는 자다’라고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노예 생활 속에서 체념하고 살아온 그들은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모든 것을 알아서 척척해주는 해결사로서의 전능이 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은 단지 이집트 탈출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과 부모자녀 지간의 계약을 맺습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점차 스스로 서야 할 일이 증대 할 때마다 출애굽을 도우셨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믿고 모두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싸워야 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로 모세를 우리 앞에 세우시는 겁니다. ‘스스로 서기 위해 죽도록 살았던’모세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를 제대로 읽는다면, ‘스스로 서기 위해’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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