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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2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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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3.6설교 |
[성서를 넘어서서 성서로!]
민27:1-5
우리나라도 재산상속법이 바뀌기 전에는 그 집안의 남자들만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결혼한 딸들과 아내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던 시대 말입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서야 아내나 딸들도 균등하게 재산 분배에 참여하는 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들었던 사사 입다의 경우에도 그의 출신이 서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정과 제도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 모세의 시대에 이미 이런 사회적인 통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결국 성서란 이런 사회적인 통념이나, 종교적인 울타리를 넘어서서 온전한 인간성을 실현하는 과녁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갔던 용감하고 혁신적인 사람들과 사건들을 접하므로 오늘을 뛰어넘으려’는 텍스트인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이전에 모세는 땅을 나누기 위한 부족과 족장의 이름들을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34장에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 명단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앞에 모세의 거명과 여호수아의 발표는 맞지 않습니다. 이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넘어간 권력이 새롭게 재편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죠. 아직 수요일에 하고 있는 성서강좌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모세의 이야기는 ‘출애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부족 동맹 사회의 질서구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와 여호수아의 정책은 연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시대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과 문제는 ‘부족들 간에 어떻게 땅을 나눌지’와 그것을 ‘어떻게 평화스럽게 유지 보존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 사안이 되겠죠. 그런데 모세의 약속과는 달리 여호수아는 땅을 나누는 문제를 다시 거론합니다. 이는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이미 누군가는 제거되고 누군가는 권력이 강화되는 재편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단이 교체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성서의 문맥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족들간에 재산 분배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재산들이 부족 내에서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게 슬로브핫의 딸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회 구성 방식은 ‘아비의 집’-‘가문’-‘지파’-‘지파동맹’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수요일의 성서강좌를 통해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사상이 ‘평등주의’라는 것을 다시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의 기초가 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지파동맹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관철하는 단계가 ‘문중 또는 가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문에 분배받은 땅이 있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의당 아들에게 물려주면 되지만,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부모가 죽으면 그들이 분배받은 가문의 땅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걸 막으려고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죠.
이런 사회상황가운데 민수기 34장에서 므낫세 지파의 토지 분배 책임자였던 한니엘이 등장합니다(23). 그리고 그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 중 일단의 여자들인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들 중심의 땅 분배와 상속이 무슨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를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제도를 넘어서는’성서의 정신이 되는 것이죠. 그녀들은 말합니다. “아들이 없어서 집안존속이 위기를 맞는다면 딸들이 상속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위기가 해소 될 수 있을 겁니다(27:3-4). 사실 이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하는 상속 문제의 발언은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발이 왜 없었겠어요?
본문 3절에서 보는 것처럼, 슬로브핫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사가 아니라 고라의 반역 때문에 죽은 참사입니다. 여기서 고라의 반역이란, 민수기 16장에 모세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쿠테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반란으로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슬로바핫이 그 때 그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재산은 몰 수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평등주의’는 일찌감치 사라지는 것이고, 고라 사건이 주었던 근본 문제(모세의 권력 독점)도 유야무야 넘어가 지파동맹의 근본 취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이 문제는 단순한 재산 상속을 넘어, 가나안에 이르러 문제에 봉착한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의 정신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는 문제 제기였던 것이죠.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이고도 국가적인 울타리를 넘어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 이미 사회적인 질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없죠. 민수가 36장을 읽으면 그들의 반론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 대표는 그들 문중의 ‘한니엘’이라는 이로, 그는 만약 이런 식으로 상속권이 허용된다면 그로 인해 문중의 재산이 보존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출가한 딸은 그의 남편과 그 가문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6:1-4). 딸의 상속권 자체가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와 여론을 중재합니다.
그것은 ‘딸의 상속권 자체를 인정하되 예외조항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비의 집’이 몰락하는 경우에만 한정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문 문중 안에서만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36:5-9).
형식상 이 타협안은 문중의 제산도 보존하고 동시에 ‘아비의 집’재산도 보존하는 묘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민수기는 이러한 결론에 퍽 만족해합니다. 얼핏 보면 딸에게도 재산을 상속하는 권리를 부여 한 것 같지만, 사실상 이 타협안은 끝내 그 관점을 ‘사람’에 두지 않고 ‘재산’ 즉 ‘땅’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든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용감한 딸들에 의해 성서는 새로운 물음을 갖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같잖은 변화 이기는 하겠지만, 당시대의 통념으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슬로브핫이 딸들이 꽉 막힌 인습의 철문을 열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밝혀가는 ‘빛’의 삶이며 신앙의 역할인 것이죠. 이걸 구약성서의 한 자락에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사회의 통념에 매몰되지 않은 ‘깬 영혼, 잠자지 않는 존재’들이 되어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넘어서려고 성서를 읽고, 세상을 이기려고 예수를 따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갈등, 이념 갈등의 중심에 있는 종교에서 화해의 종교, 나눔의 종교, 섬김의 종교, 예수의 꿈과 이상이 녹아 있는 종교에 다가가려고 성서를 읽고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성서 해석을 넘어서려는 재해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속에 재배치시키려면 재해석이라는 기반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과 한니엘이라고 하는 갈등구조에서 성서가 보여주는 교훈은 [성서를 넘어서서 성서로!]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민27:1-5
우리나라도 재산상속법이 바뀌기 전에는 그 집안의 남자들만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결혼한 딸들과 아내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던 시대 말입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서야 아내나 딸들도 균등하게 재산 분배에 참여하는 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들었던 사사 입다의 경우에도 그의 출신이 서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정과 제도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 모세의 시대에 이미 이런 사회적인 통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결국 성서란 이런 사회적인 통념이나, 종교적인 울타리를 넘어서서 온전한 인간성을 실현하는 과녁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갔던 용감하고 혁신적인 사람들과 사건들을 접하므로 오늘을 뛰어넘으려’는 텍스트인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이전에 모세는 땅을 나누기 위한 부족과 족장의 이름들을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34장에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 명단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앞에 모세의 거명과 여호수아의 발표는 맞지 않습니다. 이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넘어간 권력이 새롭게 재편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죠. 아직 수요일에 하고 있는 성서강좌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모세의 이야기는 ‘출애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부족 동맹 사회의 질서구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와 여호수아의 정책은 연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시대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과 문제는 ‘부족들 간에 어떻게 땅을 나눌지’와 그것을 ‘어떻게 평화스럽게 유지 보존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 사안이 되겠죠. 그런데 모세의 약속과는 달리 여호수아는 땅을 나누는 문제를 다시 거론합니다. 이는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이미 누군가는 제거되고 누군가는 권력이 강화되는 재편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단이 교체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성서의 문맥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족들간에 재산 분배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재산들이 부족 내에서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게 슬로브핫의 딸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회 구성 방식은 ‘아비의 집’-‘가문’-‘지파’-‘지파동맹’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수요일의 성서강좌를 통해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사상이 ‘평등주의’라는 것을 다시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의 기초가 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지파동맹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관철하는 단계가 ‘문중 또는 가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문에 분배받은 땅이 있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의당 아들에게 물려주면 되지만,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부모가 죽으면 그들이 분배받은 가문의 땅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걸 막으려고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죠.
이런 사회상황가운데 민수기 34장에서 므낫세 지파의 토지 분배 책임자였던 한니엘이 등장합니다(23). 그리고 그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 중 일단의 여자들인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들 중심의 땅 분배와 상속이 무슨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를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제도를 넘어서는’성서의 정신이 되는 것이죠. 그녀들은 말합니다. “아들이 없어서 집안존속이 위기를 맞는다면 딸들이 상속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위기가 해소 될 수 있을 겁니다(27:3-4). 사실 이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하는 상속 문제의 발언은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발이 왜 없었겠어요?
본문 3절에서 보는 것처럼, 슬로브핫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사가 아니라 고라의 반역 때문에 죽은 참사입니다. 여기서 고라의 반역이란, 민수기 16장에 모세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쿠테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반란으로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슬로바핫이 그 때 그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재산은 몰 수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평등주의’는 일찌감치 사라지는 것이고, 고라 사건이 주었던 근본 문제(모세의 권력 독점)도 유야무야 넘어가 지파동맹의 근본 취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이 문제는 단순한 재산 상속을 넘어, 가나안에 이르러 문제에 봉착한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의 정신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는 문제 제기였던 것이죠.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이고도 국가적인 울타리를 넘어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 이미 사회적인 질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없죠. 민수가 36장을 읽으면 그들의 반론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 대표는 그들 문중의 ‘한니엘’이라는 이로, 그는 만약 이런 식으로 상속권이 허용된다면 그로 인해 문중의 재산이 보존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출가한 딸은 그의 남편과 그 가문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6:1-4). 딸의 상속권 자체가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와 여론을 중재합니다.
그것은 ‘딸의 상속권 자체를 인정하되 예외조항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비의 집’이 몰락하는 경우에만 한정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문 문중 안에서만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36:5-9).
형식상 이 타협안은 문중의 제산도 보존하고 동시에 ‘아비의 집’재산도 보존하는 묘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민수기는 이러한 결론에 퍽 만족해합니다. 얼핏 보면 딸에게도 재산을 상속하는 권리를 부여 한 것 같지만, 사실상 이 타협안은 끝내 그 관점을 ‘사람’에 두지 않고 ‘재산’ 즉 ‘땅’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든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용감한 딸들에 의해 성서는 새로운 물음을 갖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같잖은 변화 이기는 하겠지만, 당시대의 통념으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슬로브핫이 딸들이 꽉 막힌 인습의 철문을 열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밝혀가는 ‘빛’의 삶이며 신앙의 역할인 것이죠. 이걸 구약성서의 한 자락에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사회의 통념에 매몰되지 않은 ‘깬 영혼, 잠자지 않는 존재’들이 되어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넘어서려고 성서를 읽고, 세상을 이기려고 예수를 따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갈등, 이념 갈등의 중심에 있는 종교에서 화해의 종교, 나눔의 종교, 섬김의 종교, 예수의 꿈과 이상이 녹아 있는 종교에 다가가려고 성서를 읽고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성서 해석을 넘어서려는 재해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속에 재배치시키려면 재해석이라는 기반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과 한니엘이라고 하는 갈등구조에서 성서가 보여주는 교훈은 [성서를 넘어서서 성서로!]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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