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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따라간사람들] 길선주 목사

영성묵상훈련 오명희 전도사............... 조회 수 2495 추천 수 0 2013.01.19 0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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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85&page=62 

성령의 불길로 한국강토를 달군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

20세기 초, 구한국 마지막 때,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될 무렵의 조선은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나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 의해 점령을 당하기 시작했고, 군대는 해산되고 외교권은 박탈당했다. 특히 궁중에서의 민비의 살해사건은 조선인들의 분노를 한층 더하게 하였다. 그야말로 조선은 영적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비참했다.

 

기독교인들은 수 년 동안 재 가운데 앉아 그들이 당하는 불행과 지난날의 죄악을 슬퍼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조선의 처참한 어두움을 밝히는 영적 각성운동이 1903년경부터 선교사들을 위주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1907년에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한국의 오순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신앙각성운동의 주역은 바로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이다.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청춘시절

 

‘한국교회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우리나라 최초의 일곱 목사님 중 한 분인 길선주 목사님은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성내면에서 아버지 길봉순과 어머니 노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이다. 그의 가정은 몰락한 전형적인 양반으로 생활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4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웠다. 7세 때는 당시 유명한 정선생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다. 11살 때 5살 위인 안주의 선비 신협의 딸 신선행과 결혼했다.

 

길선주의 청소년 시기는 그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생 첩을 둠으로 어머니가 당하는 고통과 기울어져가는 국운과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보며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인격도야를 위해 서화, 무용, 음악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더구나 평양으로 이주해 장사를 시작했으나 1년도 못되어 실패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염세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현실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의 20대는 야인이 되어 방황하던 중 선도(仙道)가 만사를 해결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선도를 연구하며 약 9년간 깊은 산속에 들어가 선도수행에 힘썼다.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잠을 자지 않는 것인데 그는 잠이 많은 탓으로 견딜 수가 없어 독한 풀을 다려 그 물로 눈을 씻곤 하눼? 그래서 눈이 상하여 일평생을 반소경으로 지냈다.

 

그러나 공을 들일수록 선도에 대하여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으로 그의 청춘시절을 거의 다 보냈다.

마침내 생명의 길로 들어서다

 

1893년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그는 이 낯설고 새로운 도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먼저 자기 밑에서 공부하던 김종섭을 마펫(S.A.moffett)에게 보내 그들이 믿는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김종섭이 도리어 마펫 선교사의 감화로 기독교인이 되어 끈질기게 그를 찾아와 전도하였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와 김종섭이 권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는데 특히 천로역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6년 생사를 걸고 씨름하던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방안에 청아한 옥피리 소리가 진동하더니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세 번 부르는 음성을 듣고 너무 놀랐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소서”라고 방성대곡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 후 온 가족을 전도하여 1897년 8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열심을 다해 교회에 충성하며 1898년에 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교회도 급진적인 발전을 보였다. 널다리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하였다. 33세에 장로가 되었고, 전국에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제1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 한후 그 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한번 듣고 본 일은 잊지 않는 기억력이 있었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닫는 총명과 무엇이든지 그 근본 이치를 캐어 알지 않고는 포기하지 않는 정열이 있었다. 게다가 유교와 불교와 선도에서 구하다가 얻지 못한 구속의 도를 깨달은 기쁨에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두문불출하고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 서적을 구하여 읽고 연구하였다. 어릴 때부터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도사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그의 생활이 더욱 엄격하고 경건하였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웠으며, 그의 일평생은 기도로 일관하였다. 기도하기 위하여 자주 산에 올랐으며 일주일에 4일씩 금식하였으며 새벽기도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그의 집회에서의 설교가 넘치는 영력과 함께 퍼부어 놓는 성서 구절들이 줄줄이 구슬처럼 이어져 연결되게 하는 은혜로운 해석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피나는 노력에서 기인한다.

영적 각성의 불을 당긴, 한국의 오순절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간에 걸친 구국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한국교회의 오순절날인 1907년 1월 14일이 왔다. 1월 6일부터 평양 시내 4곳에서 집회를 시작했고 장대현 교회는 남자들만 2200여명이 모였다. 집회는 은혜스럽게 진행되었으나 성령의 강한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4일 밤 통성기도 중 성령의 강한 임재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 대부흥운동은 모인 이들 모두가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다. 이날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은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하였었다.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강하게 비추셨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회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그의 회개는 마치 뇌관에 불을 당긴 것처럼 그곳에 모인 온 회중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블래어 선교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했고, 이어서 모든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면서 고뇌에 찬 모습으로 두 주먹으로 마루 바닥을 두들겼다.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그 감화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고, 기도의 파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이때에 일어난 영적 각성 운동은 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불길이 되었다. 또한 윤리적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회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시내 각 곳에서 사람들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전에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으며, 훔친 물건과 돈을 돌려주느라 시내는 온통 술렁거렸다.

 

평양시내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부흥의 불길은 교파를 초월하여 조선 전체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퍼져나갔다. 그는 1907년부터 장대현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총회 부회장, 전도국장 등으로 일하였다. 이때에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며 극빈 자녀들을 위해 야간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문명퇴치 운동을 벌여 한글교육을 시키며 성경야학과 계절 사경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교회에 청년회, 노인회, 여전도회, 권사제를 두었다. 특히 가정에서 여성의 힘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여성의식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남녀구별을 없애기 위해 예배당에 남녀 좌석을 구별하는 막을 치웠으며 교회에서 남녀 모두 동등하게 투표권을 주도록 하였다.

복음 안에서 비롯된 절절한 민족애

 

교회발전 못지않게 민족을 사랑했던 목사님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죄목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하지만 옥중에서 오히려 말세학 강의를 체계화 하는 등 시련의 시기를 은혜의 기회로 만들었다. 이후 목사님은 성경해석과 저술에 주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를 보면 『만사성취』(1916), 설교집인 『강대보감』(1926), 『말세학 연구』, 『출애굽기』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사명에 불타는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아볼 여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복음을 온 국민에게 전하기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가 35년간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다니며 행한 부흥회의 설교가 2만회를 넘었고 청강자가 380만 명을 넘었다. 설교 메시지는 성서를 근거로 예언적이었으며 영감적이었다. 그가 길러낸 목사, 장로, 교사, 사회운동가가 800여명에 이르렀다. 세례를 직접 베푼 교인이 3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60여 곳에 교회를 세웠다.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마지막 날 집회의 폐회 축도를 마친 그 자리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는 향년 67세의 일기로 하나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장례 절차는 장로회장으로, 12월 1일에 평양시내 각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영구의 행렬을 따르는 조문객이 1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그의 죽음은 한국 교회의 슬픔 그 차체였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 초대교회사의 있어서 진정 위대한 전도자요 부흥사요 한국 선교사의 선구자이며 민족 운동가였다. 그는 일제의 압제로 비참에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지금은 비록 나라의 역사가 잠시 끊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단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언젠가는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신앙과 역사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과 역사의식을 어려움에 처한 한국교회에 절절히 혼신의 힘을 다해 심어갔던 것이다. 그의 철저한 신앙과 헌신은 한국교회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민경배 교회사가의 평가를 들어 보자. “육신의 눈은 상해서 앞을 못 보았으나 영안이 맑아 겨레의 장래를 직시하고, 교회의 신앙을 정도로서 세워주며 스스로는 죄인임을 늘 느끼고 살다간 한국 교회 일대의 사람, 그가 길선주였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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