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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따라간사람들] 안셀무스

영성묵상훈련 오명희 전도사............... 조회 수 2404 추천 수 0 2013.01.19 00: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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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89&page=62 

중세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안셀무스

서유럽이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벗어난 11세기는 그리스도교가 남부 유럽을 넘어서 전 유럽에 그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었다. 교권과 왕권의 대립, 그리스도교와 이교도의 마찰 등의 문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위해서 이성적인 합리적인 설명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정통교회의 교리가 채용되기까지는 많은 논쟁이 거듭되었으며 파란곡절이 많았다. 스콜라 철학은 신앙을 잘 규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스콜라학파의 목표는 철저한 논리와 이성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의 신학체계를 새로 정립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분명한 진리의 체계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신앙을 이성으로 정립하는 일에 온 몸을 헌신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이다.

초기 생애와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갈망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안셀무스는 1033년에 이탈리아의 북서부의 알프스 지역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하늘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린 생각에 하나님은 어떤 산꼭대기의 궁궐에 거주하시는 것으로 상상되었다. 그는 자주 그 곳을 찾아가는 꿈을 꾸곤 했다. 15세 때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기 위해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안셀무스는 훌륭한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당대의 뛰어난 라틴어 학자로 평가받았다. 초기 교육의 영향으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그의 글은 명료하기로 유명했다.

 

아버지 곤돌포는 롬바르디아의 귀족으로 안셀무스가 정치에 입문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가 청년기에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하자 반대했다. 1057년 그는 집을 나와 3년 동안 유럽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1060년 프랑스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크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원장인 박학한 랜프랭크 아래서 비상하게 독창적인 철학, 종교적 사상가로서 성장하였다. 랜프랭크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자리를 옮기자 안셀무스는 높은 지적 능력과 깊은 신앙심을 인정받아 베크의 수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수도사로서 그는 지나치게 금식하여 항상 말라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눈물을 흘리?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비천함과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을 추구하였다. 그는 신자의 깊은 자아성찰을 강조하였다. 그에게는 죄와 심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며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죄와 심판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였다. 그의 영혼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안셀무스의 위대함은 그의 신학과 철학사상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명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오한 신학저서들도 기도문처럼 적혀 있다. 안셀무스는 베크 수도원에서 그의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영국에까지 퍼졌다.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 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베크 수도원에서 1078년부터 1092년까지 14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인고의 세월 속에 다져진, 믿음의 거목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윌리엄 왕은 많은 노르망디 학자들과 성직자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그들 가운데는 1070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랜프랭크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대성당의 소유물들과 소득이 그의 아들 윌리엄 2세에 의해 약탈당한다. 잉글랜드로 와서 체스터에 성베르부르크 수도원을 조직해 달라는 초청을 거듭 거절하다가 마침내 1092년 수락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첫 번째 대주교이자 그의 스승이며 신앙적 선배인 랜프랭크의 죽음을 맞이했으므로 민중과 교회의 아우성에 못 이겨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취임하게 된다. 안셀무스의 취임식은 1093년 12월 4일에 거행되었다.

 

당시에는 누가 성직자를 임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교황과 세속 정치가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세속권력을 거부한 안셀무스는 왕의 잘못된 요구를 거절했다가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유를 따라 기꺼이 인고의 세월을 선택한 것이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를 완성했다. 그리고 여러 공의회에 참석해 신학적 입장을 설파하기도 했다. 특히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는 논쟁을 조절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107년 8월 1일 웨스트민스터 제국의회에서 교황과 왕이 합의를 선언해 서임권 투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안셀무스도 2번의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대주교직에 돌아왔다. 그는 16년 동안 탁월한 역량으로 목자이자 유능한 행정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안셀무스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이미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후대에 길이 빛난 그의 저서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써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소홀함이 발생한다면 도대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 안셀무스는 스콜라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콜라 신학자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인 논리로 나타내려고 했던 기독교 학자를 가리킨다. 그는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였다.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믿고 있던 문제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저서 「왜 신이 인간이 되었는가?」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 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구원론에 관심을 돌려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사역을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만족케 한다고 밝힌다.

 

또 완전한 인간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백」(신앙의 근거에 관한 명상의 한 범례)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담화」(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는 하나님이 진리이고 선이심을 밝힌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진리를 구하는 자는 먼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존재론적 신 증명을 제시함으로서 신을 믿어야할 당위성을 설명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개념을 요구하고 또 그러한 존재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 헤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동정녀 잉태론」, 「진리론」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있다.

교회박사로 선포되다

 

안셀무스는 중세기 최고의 기독교가 낳은 철학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제시한 하나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지금도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사상이다. 그가 가르친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 갚아야 할 제물로 드려졌다는 만족설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속죄설의 기초가 되었다. 안셀무스는 이성을 극치로 사용했던 최고의 사상가였으나 또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영성을 추구하였던 신비신학자이기도 하였다. 샤프는 말하기를 “안셀무스는 무흠한 청렴 정직한 사람이며 오직 진리와 의에 몸을 바쳤으며 고난을 능히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는 1491년에 정식으로 성자의 반열에 올랐지만 실제로는 그 전부터 존경을 받던 사람이다. 드문 인격의 소유자로서 고상한 이성과 순진한 신앙으로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의 일상생활의 정신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의 타는 듯한 신학의 중심이었다.

 

그는 실로 신비주의와 스콜라주의를 결합한 위대한 인물로서 내유외강의 인물이었다. 또한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었다.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받기에 합당한 인물이었다.”고 하였다. 안셀무스는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였다.

 

깊은 묵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열망하였던 안셀무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신학적 기초와 체계를 확립시켰고, 진리를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 안셀무스는 우리에게 무모한 믿음만능주의가 아닌 말씀의 기초 위에 바른 신앙관으로 다져가길 촉구하고 있다.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부름을 받은 그의 마지막 말이 심금을 울린다. “나는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싶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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