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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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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장우 목사 |
참고 : | 2001. 9. 9 늘푸른교회(창원시) http://evergreen17.80port.net/ |
출6:1-12
참된 양식
출애굽기16장 1-12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구원이란 가만히 서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수렁에 빠진 사람모양 더 깊숙히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가만히 보고 있도록 놓아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부산하게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란 결국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원을 가리는 먼지 일으키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무언가 거들어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그 태양빛을 더 밝게 하느라고 등불을 켜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이러면 당장 이런 질문을 합니다. 빌립보서 2: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 말씀을 증거하려다 보니 이 말씀이 떠 올라서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빌립보서 2:12-13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행하시는 구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고 나왔습니다. 열가지의 재앙을 보았고, 홍해바다에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열리고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그 바다에 수장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크신 구원을 인하여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후 3일만에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홍해바다는 하나님께서 갈라내시지만 물을 주시지는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물이 있는 엘림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선 것이 마라였습니다. 쓰서 마실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원망이 나오기 전에 물이 있는 곳으로 바로 인도하시지 왜 3일동안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적인 모습을 다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시험하신다. 테스트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원망하고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서는 모습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혈과 육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보는 자들에게도 역시 인간의 육의모습이 어떤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인간의 훌륭한 면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어떤 모습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죄인입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세뇌(洗腦)되어서 입버릇처럼 나오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죄를 다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죄를 놓치지 않고 다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보면 은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면 던져 버릴수밖에 없는 너무나 기분나쁜 책이 됩니다.
16:1절을 봅니다. 출애굽한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출애굽한지 제 이월 십오일이라고 합니다. 출애굽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로운 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가 일월 15일이었으니 한달이 지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월십오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달이든 두달반이든 그동안은 무얼 먹었습니까?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먹은 것입니다. 아미 지름길로 갔다면 벌써 가나안에 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양식걱정하지 않아도 될텐데 왜 광야길고 인도하셔셔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가 이것이 우리에게는 의문인 것입니다. 그냥 구원하셨으면 비행기를 태우셔서 가나안으로 옮겨 버리시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없으면 시편의 표현처럼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들어가게 하시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시며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수 있고 죄인된 인간을 바르게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광야로 인도하심으로 인간의 육의 모습을 다 드러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좋을때는 아주 착한 사람같았는데 막상 손해가 오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갑자기 두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믿었던 양식이 다 떨어 졌습니다. 아끼고 아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달 먹을 양식을 짋어지고 갈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이 한달을 먹었다면 그들이 들고나온 양식을 한달동안 먹은 것도 참으로 아껴가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생명이었습니다. 물없어도 죽지만 양식없어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위기감은 언제 옵니까? 물보다는 양식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지자 또다시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16:2-3절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한달동안 고기는 구경도 못하고, 겨우 가루음식을 그것도 아주 아껴서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지하던 양식마저 떨어지고 나니 '아 옛날이여!' 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실컷 먹고 떡을 배불리 먹던 그때가 훨씬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관심이 오직 육의 양식뿐입니다. 생명의 양식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하고 나서도 이들의 관심사가 이러한 것입니다. 왜 출애굽을 하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배만 부르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는 진주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애굽의 가마고기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안락을 위하여 자유를 파는 기회주의자를 말할 때 사용한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구하고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버려두고 내 눈앞에 닥치 이익의 문제로 인하여 얼마나 원망하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셨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머리카락 한 가닥 희거나 검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태산을 바다에 던지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머리카락 한가닥이 쉬워보입니까? 요즈음은 염색을 하면 쉽지요 빨주노초파남보 다 바꿀수 있습니다. 결국 염색기술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만들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원천적으로 희거나 검게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이나 태산이 바다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 둘다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 하나는 우리 마음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납니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착각을 하는 것은 출애굽은 하나님께 하셨지만 가나안 까지는 우리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들의 걸음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간 걸음입니까? 원망과 불평과 불신으로 간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찬양의 내용이 그 구속하신 백성을 주의 은혜로 인도하시되 그의 성결한 처소에 까지 인도하신다고 노래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거들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죄 사이에 있는 양심에는 평강이 있을지라고 우리와 우리의 환경사이에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킨토쉬의 강해서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적어도 나의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은혜로 인한 구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문제, 환경의 문제에 있어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다면 우리이 환경의 문제도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고 해결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실지라도 주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라 옆에 엘림이 있었고, 양식떨어질 때 만나가 내린 것입니다. 이미 샘물과 양식이 다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때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드러내시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을 고발하시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양식을 주시면서 테스트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식을 거두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지 아니하는지 시험하여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만나를 내려주신는데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거루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많이 거두어 다음날 까지 남겨 놓으니 썩어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양식이 내리지 않으니 거두러 가지 말라고 하였는데 거두러 갔습니다. 그러니 양식을 가지고 시험을 쳤는데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일용할 양식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년후 십년후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감사하여야 하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용할 양식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일용할 양식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날마다 주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양식에 있어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하여는 어떻겠습니까? 시험 치를 것도 없이 낙제입니다. 그러한 양식이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삶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몸을 살리는 밥문제에 있어서 믿음없음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양식에 대하여 어떻게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6:26-5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떡을 먹고 배불러서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떡은 영생을 주는 양식이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현실적인 먹고 배부름을 위하여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런 양식을 어떻게 먹을수 있는가 하였을 때 나를 믿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양식은 아무나 먹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만이 참된 양식을 먹습니다. 만나는 먹고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영생의 양식이 됩니다. 우리가 이 참된 양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복인지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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