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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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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춘 목사 |
참고 : | 2009-06-14 비전교회 http://www.vision21com.com/ |
출6:14-27
모세와 아론인가, 아론과 모세인가
오늘 설교 제목이 좀 의아하죠? <모세와 아론인가, 아론과 모세인가?> 마치 ‘이름 바꿔 놀기’ 같죠? 사실 설교제목보다 더 의아한 것은 오늘의 본문입니다. 의아함은, 이 시점에서 왜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소개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전후문맥으로 보아,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나오기에는 요즘말로 생뚱맞은 감이 있습니다. 전체 흐름상, 오늘의 본문이 빠지고 가야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나오는 겁니다.
이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자 메시지를 찾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이유를 알면 오늘 설교제목도 이해가 될 겁니다. 질문해 봅시다. 이 시점에서 왜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소개되고 있는 걸까요?
그런데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를 다루지만 역사서가 아니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자신의 뜻을 보이시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와 이야기에 몰두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경에서 펼쳐 보이는 역사와 이야기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앞뒤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편집의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읽기에 있어 인간적인 편집이 됐다느니, 글의 흐름이 모순된다느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오늘의 본문이 생뚱맞게 끼어든 데는 하나님의 의도가 개입된 겁니다. 즉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신적 권위의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을 하신 겁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게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그러하신 겁니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사건은 허구가 아닌 사실입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역사성을 갖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해보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단 자료여야 합니다. 그 중 ‘족보’라는 것은 가장 확실한 자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출애굽의 역사성을 위해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정리해주신 겁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이냐는 겁니다. 왜 6장 14절 이하에 이 내용을 끼어들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이 시점이 어떤 시점입니까? 모세가 하나님과 갈등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데, 모세가 하나님께 대들며 씩씩대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출 6:12)
모세가 하는 말로 미루어보면 “제게 맡기신 이 일 더 이상 못해 먹겠습니다. 그만 하겠습니다.”는 분위기로 갈 판입니다. 족보가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시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드러내시는 것은, 출애굽의 역사성의 위대함을 드러내시는 의도인 겁니다. 즉 “이 출애굽의 역사는 너희 인간의 감정여하에 따라 다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오랜 동안 품었던 계획이고, 나는 이것을 지금 너를 통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대역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역사인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신이 주인공이고 영웅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출애굽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상기 시키려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의 조상의 족보를 알려주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 위대한 역사에 어느 날 갑자기 쓰임을 받게 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너희들은 나의 계획에 의해 오래 전부터 준비된 소중한 사람들이다!”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상심했기에 대들고 있는 모세와 아론은 “오래 전부터 준비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들에 대해 참으시고 참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와 아론만 “오래 전부터 준비된 소중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고, 이 본문의 의미를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오래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재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출애굽의 역사가 한국에서 재현되길 원하셔서 오래 전부터 나를 준비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 대역사에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하나님의 족보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일반적으로, 족보라는 것은 한 사회에서 한 가문(지파)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족보는 모세와 아론이 레위라는 명문가의 후손임을 증명함으로써 대단한 인물들임을 보여주자는 겁니다. 레위 지파는 어떤 가문입니까? 전통적으로, 더욱이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일을 위해 구별된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구별시키신 지파로써, 바로 제사장 지파 출신이 모세와 아론인 것을 드러냄으로 모세와 아론 자신뿐만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에게 정통성과 합법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후,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그것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아론은 제사장의 역할을 합니다. 바로 그 때를 위해 이 사실을 못박아두시는 겁니다. 후에 “아론, 당신이 뭔데 제사장 일을 하시오?”라는 시비가 붙을 때를 대비해서도 아론에게 정체성과 더불어 자존감을 실어주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는 또한 모세가 “이 백성이 내 말을 안 듣습니다.”라고 불평하고 불안해하는 것에 대해 쐐기를 박아두신 겁니다. “너는 레위 족속이다. 제사장 가문이다. 그러니 당당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거룩한 제사장이다. 그러니 제사장답게 살아라! 그리고 제사장의 권위를 당당히 사용하라!”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당당히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족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세가 중심이 아니라 아론이 중심입니다. 23-25절을 보면, 아론의 아내의 이름, 자녀들의 이름, 자부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가족사항은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아론에게서도 소개된 부모형제 이름뿐입니다.
어찌된 영문일까요? 여기에는 모세보다는 아론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겁니다. 아론이 누굽니까? 모세의 형입니다. 모세보다 3살 많은 형입니다. 현재 모세는 80살이고, 아론은 83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형이 아니라 모세의 대변인이 된 겁니다. 소위 넘버 2, 이인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겁니다. 더욱이 이 일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쾌하고 불편한 자리일 수 있습니다. 동생 밑에서 일한다는 것이 유쾌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이 아론을 위로하시는 겁니다. “이 일을 동생하고 연관 짓지 말거라. 이 일은 나하고의 관계 속에서 너에게 맡겨진 나의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족보가 있는 너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자, 파이팅!”
우리는 이인자로서 산다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는 늘 이인자여야 하느냐고 불평을 일삼습니다. 내가 모세가 되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저 사람과 제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제가 더 낮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왜 넘버 2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넘버 1, 넘버 2, 넘버 3는 우리가 정해 놓은 구분이요 규정이지 하나님의 구분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주연이 누구고, 조연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주연을 조연처럼, 조연을 주연처럼 쓰시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26-27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아론과 모세요,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우리가 출애굽기 전체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있다면, ‘모세와 아론’이라는 순서로 이름이 배열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지도자고, 아론은 대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아론의 이름이 모세의 이름 앞에 배열돼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편집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이 아닌 ‘아론과 모세’라는 배열 구조를 보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주연을 조연처럼, 조연을 주연처럼 쓰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앞선 자이고 누가 뒤선 자이다’라는 평가는 죄 많은 인간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이런 평가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일꾼일 뿐입니다.
자, 아론과 모세, 모세와 아론이라는 배열구조를 다시 더 봅시다. 우리가 이해하는 상식으론, 굳이 상황에 따라 배열하시기로 하셨다면, 26절은 ‘모세와 아론’이 맞고, 27절은 ‘아론과 모세’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로부터 최초로 명령을 받은 자는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입을 여는 자는 아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모세와 아론을 각각 바꿔 놓으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의 생각을 무너뜨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고, 하나님의 관심은 모두에게 공평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자리에 아론을, 아론의 자리에 모세를 천연덕스럽게 배열하신 겁니다. 그리고는 “뭐가 문제지?”하고 되물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곧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는 겁니다. 더 이상 “모세와 아론이냐, 아론과 모세냐”는 시비든 질문이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는 우리 모두가 동역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족한 부분을 아론을 통해 채우게 하셨습니다. 혹 우리는 출애굽 사건을 모세 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 혼자 그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늘 아론을 앞세운 족보정리에서 당장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일이 시작될 때 필요한 리더를 세우심과 동시에 반드시 그 리더의 빈 부분을 채울 동역자를 함께 붙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아론과 모세의 역할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과 율법 수여를 하셨고, 아론에게는 제사장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둘은 기질과 성격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동역자로 삼으신 것은, 서로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강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이 실천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잘 살아 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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