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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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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덕순 목사 |
참고 : | 2005-10-09 한가람교회 http://www.hankaram.or.kr/ |
출6:1-13
여호와를 얼마나 아십니까
본문에는 "나는 여호와로라." 라는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네 번 나옵니다.
2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6절, “.... 나는 여호와라.”
8절, “내가 아브라함에게 주마 한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29절,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네게이른 바를 너는 애굽왕에게 다 고하라.
이렇게 네 번 씩이나 당신을 ‘여호와’ 라고 강조하여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했으나 그들에게 가나안을 주기로 약속했었다고 말씀하셨고, 7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리니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합계 여섯 번씩이나 여호와라는 이름을 강조하신 셈입니다.
본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인식시키시려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 외에,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얼마나 아십니까?
하나님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엘로힘, 엘 솨다이, 퀴리오스, 여호와 등입니다. / 엘로힘이란 이름은 무한하신 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 퀴리오스 라는 이름은 그분이 만유의 주인이고 모든 인류의 심판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기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되 당신의 약속을 확고부동하게 지키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만 알면, 그분을 두려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될 때에 비로소 그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가서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1-8에 보면, 내가 너희를 분명히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것이니, 너는 다시 가서 내 백성에게 그 사실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에게 가서 말했더니, 이스라엘이 더욱 고난만 당하게 되었나이다." 라는 호소에 대한 응답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줬지만, 그들은 더욱 고되어진 노역이 모세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 모세를 배척했고 바로는 더욱 강하게 핍박을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죽을 지경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그만 두고만 싶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기를 그렇게 갈망했던 당사자들인 이스라엘도 잠시 당하는 고난을 견기지 못해서 모세를 배척하는 상황인데, 간교한 바로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순순히 듣겠습니까? 이스라엘도 설득 하지 못하고 있는 모세가 애굽 왕을 설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을 당하였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말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의 두 가지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어려움을 겪게 된 기회에 아예 빠져나가려는 생각입니다. 이때 아예 하나님께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사표를 내자, 그런 심정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안되면, 더 노력을 하고 더 기도를 해서 일을 완성시켜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빠져나가 보려고 연구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먼저 서둘러 시작했던 일도 나중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기는 책임지지 않고 빠져나가 보려고 기회를 찾고 모든 책임은 남에게 떠넘기려 합니다. 전도하는 일도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자기는 빠져나가고 남들이 하게 하려고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모세가 빠져 나가면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한단 말입니까? 무책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는데 당신이 서둘러서 시작한 일이 아니냐, 그러니 당신이 알아서 다 책임져라.” 하면서 책임전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 반대한 일일지라도 일이 시작되어 잘 진행되거든 “내가 반대했지만 잘 된 결정이었네요. 좌우간 일이 잘되어 감사하네요." 라고 말하며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나 단체는 잘되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자기가 반대했던 일이 잘될 때에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것 봐라,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뭐라더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소에 계속 그 일이 잘못되기만을 바랐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단체는 무슨 일이든지 잘 될 리가 없으며, 그 책임은 그가 하나님 앞에 가서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사람은 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의견을 분명히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제시한 의견이라도 어떤 의견이 채택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팔을 걷어 부치고 수습하는데 힘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을 얻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단체나 교회에서 이런 인물이 되어 있습니까?
2) 책임전가 하지 않고, 자기의 부족을 고백하는 모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불러서 ‘너는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말하기만 해라. 그러면 내가 너희 백성을 해방시켜 주리라’고 하셔서 시작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았으면,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고는 왜 빨리 해방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나를 억지로 보내시고는 왜 약속대로 빨리 이루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책임전가 하지는 않았고, 자기의 입술이 뻣뻣하여 말솜씨가 부족해서 잘 못하겠다고 자기책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입술이 둔합니다. 나는 바로 왕을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 힘든 일에서 발을 빼려고 하는 생각이 들어있지만, 그렇게 된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는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우리는 하던 일이 잘못될 때,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책임질 그런 용기가 있습니까? 일이 잘못되면 누구 탓이라면서 책임전가 해버리는 어리석은 용기는 넘치지만, 자기의 책임을 통감하고 그것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그런 용기는 우리시대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우리는 경험과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고 이 세상은 우리에게 벅차고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중에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게 하던 일이 잘못 될 경우, 입장에 따라서 책임전가 할 대상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자기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그 일을 할 때에도 가장 큰 수고를 했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잘못되었을 때 자기의 책임은 없다고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할 때에도 가장 빈둥거렸을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실패의 책임도 가장 강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성공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책임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이제 핵심 문제로 돌아갑시다.
3절에 보면, 내가 아브라함에게와 이삭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창3: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여호와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적이 있었고,
창15:7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여호와라고 이미 계시하셨으며,
창28:13에서 야곱에게도 자신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미 계시하셨으면서도, 여기서는 “그들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시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진의는, 그들은 막연히 내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긴 하지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속성을 체험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의미를 잘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미래에 있을 큰일을 약속해 주시면서 “나는 여호와라” 하시니까, “아하, 하나님은 그런 큰일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란 이름을 특별히 강조하여 소개하십니다. 특별하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의 큰 능력으로 착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는 보상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지 못하고 죄만 가득한 사람에게도 은혜로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는, 그 약속을 기필코 이루어 주시는 성실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한번 약속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주고야 마는 믿을 만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능력이 많은 엘로힘 하나님으로는 이해했지만, 여호와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실 것이야 없는 줄은 다 알았지만,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고 성실하지 못했는데도 정말로 해방시켜주시고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 주실까?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을 약속 받고 출애굽을 하기는 했지만, 광야생활 내내 불안했고,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금새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불평하였습니다. 가나안땅을 건너다보면서도, 그 땅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낙담어린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렇게 자주 낙심하고 의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런 구원을 누릴 자격이 없으니, 나에게는 그 구원이 해당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뜻이 하나님이 한번하신 약속은 상대가 어떠할지라도 당신이 책임지고 이루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요약하면, “내가 약속한대로 분명히 구원을 주마. 바로가 어떻게 해도, 너희가 어떻게 해도, 나는 내가 약속한대로 바로를 굴복시킬 것이고,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뭐라고 하나님께 말했습니까? 1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문제를 잘못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아직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당한 문제는, 모세가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해서이거나, 백성들의 협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애굽 왕이 너무 고집이 세거나,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하룻강아지처럼 겁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고 상황만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다섯 번이나 ‘당신은 여호와라고’ 자기를 소개하셔야 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모세더러 “너는 가서 네 능력껏 애굽 왕을 설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는 가서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말해라. 그렇지만, 네가 말을 할지라도 바로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거든 너는 그들 앞에 내가 준 능력으로 재앙을 내려라. 그러면 오히려 그들이 강하게 반항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또 가서 말하여라. 그들이 강퍅해지고 강퍅해 지다가, 나중에 크게 맞은 뒤에야, 결국 듣고 내 백성을 보내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한 번 해봤더니 안 된다며 포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여호와 이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한두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기도 했는데도 응답이 없습니까? 그러면 또 기도하고, 그래도 응답이 없다면 또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하신 분이고, 응답한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약속을 절대 어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약속해 주신 것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약속해주신 말씀을 믿고 오늘 네가 할 일에만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책임지마는 확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점에서 “나는 여호와로라.” 고 자신을 강조하여 소개 하셨을까요? 모세가 한 두 번의 실패로 그 실패한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돌려놓으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반응을 보고,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고, 자기의 무능을 보며 낙담하니까, 내가 누군지 너 잘 모르지 하고 자기를 소개해 주시는 장면이 본문입니다. 시선을 환경에서 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행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쉽게 응답이 없는 것은 그분이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때가 안 되었기 때문이거나, 우리에게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약속한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영원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지금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지금 모세가 해야 할 일은 “저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보세요 저는 못하겠어요.” 하고 물러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니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확신하고 물러서지 않고 바로와 맞서서 하나님의 명령을 계속 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처음에 금방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이미 말씀해 주셨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것을 다 계획해 놓으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바로의 마음속에, 자기는 하나님을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했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바로와 맞서 싸우는 것이 모세의 사역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십니까? 모세가 바로와 맞섰던 것처럼, 우리도 쉽지 않은 상대와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질병이요, 잘못된 습관이요, 불의한 사상이요, 죄악인데, 그것들은 사단이라고 하는 총 사령관 밑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한번 기도했고 한번 믿음을 고백했다고 해서 금방 물러갈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싸울수록 훨씬 강한 모습으로 도전해 오고 또 덤비는 존재입니다. 모세보다 바로가 훨씬 강했던 것처럼, 죄와 불의와 고난은 우리보다 훨씬 강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상대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 대적과 싸우다가 쉽게 포기하고 패배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해놓고, 믿음이 이긴다고 해놓고 왜 지금 안도와주십니까? 하면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책임전가도 하고 낙심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단 한 번에 이기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죄악이 우리보다 약하다고 하시거나, 네 신앙고백 한마디에 사단이 네 앞에서 쉽게 물러가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하셨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넘어뜨린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피 흘리기를 각오하고 싸우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결국은 네가 이기지만, 그러나 네가 여러 차례 그것과 맞서 싸우면서 네 신앙이 자랄 만큼 자라고, 강해질 만큼 강해진 다음에야 이기게 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심과 약속의 성실성을 믿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13절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계획을 따라서 모세를 강권하여 보내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이 말씀은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 자신이 다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는 말씀은, 앞에서 인도한 사람은 모세였지만,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과 애굽 왕을 주관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당신의 일을 당신이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됩니다. 본장이 그렇게 반복하여 말하는 “나는 여호와로라.” 라는 말씀의 뜻이, “내가 명령했으니 책임도 내가 진다, 내가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내가 한다. 그러니 너는 믿고 순종만 해라.” 라는 뜻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약속해 주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사람들을 움직이고 주관하셔서 마침내 약속을 완성하고야 마시는 분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야, 라는 뜻이 “나는 여호와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데, 그 약속이 불변인 이유는 그 하나님 자신이 변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은, 잠시 한 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하기 위해서 그를 믿습니다. 일회용 물건을 사듯이 가볍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일생 전체를 내맡겨드리는 신뢰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건강하나 병드나, 부할 때나 가난하게 된 경우나, 바쁠 때나 틈날 때나 그 언제라도 내 평생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섬기는 신앙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바로 이런 신앙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거역하는 인간, 불성실한 인간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해 주신 약속은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괘씸한 짓거리들을 끝까지 참아내면서 설득하시고 변화시켜서, 마침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는, 인자함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만한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 여호와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신앙을 가집시다. 이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계속되는 고난과 연단 속에서도, 좌절과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참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체험합시다. 기도로 체험합시다. 순종하여 체험합시다. 그래서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됩시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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