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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신 로고스(The Logos Who Is the Light)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27 추천 수 0 2013.01.24 23:30:11성경본문 : | 요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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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2010년 12월 19일 설교 |
2010년 12월 19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 4
“빛이 되신 로고스”(The Logos Who Is the Light)
--요한복음 1:1-5, 9-13
1.
제가 사는 집 골목에는 집집마다 성탄 장식이 요란합니다. 예년에는 성탄 장식을 한 집이 몇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올 해에는 장식을 하지 않은 집이 드물게 보입니다. 장식을 하지 않은 집 중 하나가 목사가 사는 집이어서, 밤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민망함을 느낍니다. 경제 상황이 좋아진 것인지, 지난 해 새로 이사 온 몇 가정 때문인지, 아니면 믿음이 좋아진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성탄 장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빛’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별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 박사들은 별빛의 인도를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에 항상 커다란 별을 달아 놓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탄 장식을 할 때 불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장차 태어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메시야]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눅 1:78-79)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례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 때, 성전에서 평생을 지내며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눅 2:29-32).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여기서 ‘어둠’은 타락한 영적 세력과 죄에 물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타락한 인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빛이 비치게 된 것입니다. ‘비치니’라는 단어는 ‘지금도 비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 빛이 예수께서 2천년 전에 태어나실 때 잠깐 비치고 만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비치고 있으며 또한 영원히 비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그 빛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왔지만 그 빛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2.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빛이 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렇게 간단한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려면, 구약성경도 여러 군데를 찾아 보아야 하고, 헬라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 학파의 사상을 이야기 해야 하고, 또한 후대 유대교 사상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며, 초기 기독교의 사상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에서 한 학기 내내 강의해도 모자란 것이 로고스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요한은 왜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불렀을까요?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쓸 구상을 하면서 많은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요롭고 다양하고 심오하고 신비한 의미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전할 수 있을까?’를 두고 영적 씨름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묵상하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그에게 영감을 주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 가운데 예수님의 폭과 깊이와 넓이에 가장 적합한 단어가 무엇일까? 그래, 로고스, 바로 그거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 신학의 역사 상 가장 기억될만한 선언, 즉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는 선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요한은 계속하여 이렇게 적습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된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 1:3-5)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숨’과 ‘생명’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목숨은 우리의 생물학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목숨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만 살아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목숨은 목숨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다. 목숨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며, 목숨의 가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럴 때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 생명이 없으면, 목숨만을 부지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게 되고,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목숨보다 ‘더 큰 무엇’이 무엇입니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보다 작은 것을 위해 목숨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남용하고 오용합니다. 돈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고, 뛰어난 학업 성적도 그렇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이나 알코홀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한 목숨을 사용하여 그런 것을 손에 넣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목숨의 가치와 비교할 때 너무도 값싼 것이며 작은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옛날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인간]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시 8:5-6)
3.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드려 찾아야 할 ‘더 큰 무엇’은 오직 창조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창조자는 아무 뜻도 없이 심심해서 우주를 창조한 것도 아니요, 자기의 변덕대로 우주를 주물럭거리지도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바벨론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창조 신화들 혹은 인디아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창조 이야기를 보면, 창조자가 아무 목적도 없고 원칙도 없고 뜻도 없이, 그냥 심심해서 혹은 변덕에 따라 창조하고 파괴합니다. 만일 우리의 창조자가 그런 존재라면, 우리는 그 창조자에게서도 우리의 목숨을 드릴만한 ‘더 큰 무엇’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요한을 시켜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부르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른 고대 신화에서 보는 것 같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뜻이 있고 목적이 있고 뚜렷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선언은 “삼위일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신화에 나오는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라는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로고스라는 단어에 담겨진 뜻을 모두 다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문적인 학자들이 아니고는, 그 의미를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요한을 시켜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부르게 하신 이유들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생각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첫째, 로고스는 ‘말씀’(the Word)이라는 뜻입니다. ‘소리’와 ‘말’은 다릅니다. 뜻이 없으면 소리가 되고, 뜻이 있으면 말이 됩니다. 말 중에서도 무게가 있는 말은 말씀이 됩니다. 누군가가 한 말을 내가 ‘말씀’이라고 높여 불렀다면, 그 말을 내가 그만큼 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분에게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목숨을 바칠만한 뜻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둘째, 로고스는 ‘원리’(the Principle)라는 뜻을 가집니다. 헬라 철학, 특히 스토아 학파에서 로고스는 우주와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분에게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가 그분에게서 나왔고, 인간이 살아가는 원리가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살아가야 할 원리를 찾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자 성경은 로고스를 ‘도’(道, Tao)라고 번역했습니다.
셋째, 로고스는 ‘진리’(the Truth) 혹은 ‘지혜’(the Wisdom)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가 묻습니다. “당신이 왕이오?”(요 18:37). 그러자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그러자 빌라도가 되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38절) 빌라도의 이 질문은 특별히 철학을 좋아했던 그리스-로마인들이 가장 자주 토론하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 대답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에게서 진짜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과 진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바칠만한 ‘더 큰 무엇’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더 큰 무엇’을 찾지 못하고 우리보다 작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사용하며 살 때, 우리는 어둠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내 몸보다 작은 공간 안에 갇힌 것처럼, 부자유함과 답답함과 허무감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 어둠을 벗어날 방법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바칠 ‘더 큰 무엇’을 찾는 데 있습니다. 그 때, 마치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환히 밝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고도 남습니다.
4.
잠시, 빛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가짜 빛 혹은 모조품 빛을 받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깃불은 태양빛을 모방하여 만든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저 바깥으로 나가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전깃불이 필요 없습니다. 태양 빛이 우리를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양빛이 우리가 사는 지구 반대쪽을 비추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는 어둠이 깃들고, 그 어둠을 없애기 위해 인간은 모조품 빛을 창조하여 밤을 밝힙니다.
하지만 전깃불로도 혹은 태양빛으로도 없앨 수 없는 어둠이 있습니다. 내면의 어둠이요, 영혼의 어둠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서 겪는 어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겪는 어둠,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겪는 어둠, 길을 찾지 못해서 겪는 어둠,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 살아감으로써 얻는 어둠, 죄와 악에 빠져 살아가는 어둠을 말합니다. 그 어둠은 촛불로도, 전깃불로도, 심지어 태양빛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빛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빛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수 많은 종교들이 그리고 수 많은 철학과 사상이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인생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참된 삶의 원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종교와 철학은 수 없는 토론을 거쳐왔습니다. 그렇게 진보되어 온 인간의 철학은 지금 무슨 결론을 얻었습니까?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참된’ 혹은 ‘영원한’ 같은 형용사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다 각기 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지, “이것이 해답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아닙니까? 빛을 찾겠다고 나선 걸음이 더욱 어두운 골목에 당도한 셈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둠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나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음에도, 우리는 어둠을 택하려 합니다. 우리는 어둠을 싫어하고 숨이 막힐듯이 답답해 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합니다. 빛이 두렵고, 자유가 두렵고, 진리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성령께서는 요한을 통해 이렇게 쓰게 하십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0-11절)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나는 당신같은 사람 모릅니다”라며 밀어내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심각한 불화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혹은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나섰다가 돌아오려는데,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니 돌아오지 마십시오’라는 전갈을 받은 것과 같은 꼴입니다. 쿠테타가 일어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께 이처럼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유하자면, 인간들이 영적으로 바람 난 것이고, 영적인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인간의 편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자신을 지으신 분,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돌아가면, 그분에게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고, 삶의 길을 찾으며, 영원한 진리와 원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마음과 영혼의 어둠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목숨보다 더 큰 무엇을 찾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아낌없이 불태울 수 있는데, 그 엄청난 축복을 걷어 차 버리는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오신 분을 필요 없다고 밀어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새로 권사와 장로로 천거된 분들이 고시를 치루고 면접을 했습니다. 연합감리교회에서 섬기시는 몇몇 목회자들이 면접 위원으로 모여서 후보자를 한 분씩 만나 신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 년, 이 면접을 통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이번에도 여러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대학교 시절까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자라면서 주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는데,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속으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당신들보다는 더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무시하며 지내다가 대학 시절에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바래다 주는 택시 안에서 그분은 여자분에게 일요일에 다시 만날 것을 청합니다. 그러자 그 여자분이, 나는 주일에 교회에서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같이 교회에 나가자는 겁니다.
그분은 은근히 화가 나서 평소에 자기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그 여자분에게 쏟아 놓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다닐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약간의 신경전이 오가는데, 앞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던 기사께서 참견하십니다. (이것이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아무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 드는 것 말입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하다가 한국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당황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젊은이,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비유하면 이런 셈이네. 소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가는 사람이 이랑을 똑바로 내기 위해서 소의 꼬리만 집중해서 보고 갔지. 그런데 이랑 끝에서 돌아 보니 삐뚤빼뚤 하게 갈려 있는 거야. 그래서 다음 번에는 반대편에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를 향해 가면서 이랑을 갈았지. 그랬더니, 이랑이 곧게 만들어지더라는 거야. 자네가 자네의 생각과 의지로 바르게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소의 꼬리를 보고 밭 이랑을 갈겠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네.”
운전 기사의 훈계가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분은 이 이야기를 아주 인상 깊게 들으셨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지금의 아내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민 오신 후,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지속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면서 그분은 그 택시 기사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 거듭 거듭 확인하고 사십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케 세라 세라’를 애창곡으로 삼고 ‘될 대로 되라지!’를 삶의 모토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자유로와 보일지 모르나, 속으로는 지독한 어둠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혹은, 자기 스스로 세운 목표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표가 무엇이든, 분투하며 인생을 불사르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분투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투하는 그것이 우리의 목숨보다 큰 것입니까, 아니면 작은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바칠만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사에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면서,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합니다. 절대자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절대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겉모습은 자유롭고 수준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걷다가는 인생의 마지막에 돌아 보면서 후회할 것입니다. 뒤돌아 보니 인생의 걸음이 삐뚤빼뚤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고 올곧게 걷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에게서 우리는 인생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한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선언하며, 자기 혼자만으로도 얼마든지 강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 모습이 매우 당당해 보이고 강해 보입니다만, 실은 어린 아이가 눈을 질끈 감고 “다 필요없어! 나 혼자면 돼! 나 혼자서 잘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오히려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라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진실로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고스의 능력 안에 머물러 살게 되기 때문이며, 빛 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빛을 비추고 계시지만, 세상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빛을 알아보고 그 빛 가운데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고, 또한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빛을 알아보고 그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사람들에 대해 성령께서는 요한의 손을 빌어 이렇게 쓰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2-13절)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유전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혈통에서나”),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육정에서나”),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사람의 뜻에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삶의 원리를 찾게 되며,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되고, 삶의 길을 찾게 됩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 왜 사는지, 사방천지가 캄캄했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을 발견하고, 그 생명 안에서 영원을 경험합니다.
여기까지 와야만 성탄절의 의미가 완성됩니다.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 로고스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빛으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밝혀져야 합니다. 이같은 성탄의 은총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로고스이신 주님,
저희에게 오소서.
저희의 길이 되시고
저희의 뜻이 되시며
저희의 목적이 되시고
저희의 원리가 되소서.
그리하면
저희가 빛 가운데 살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참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정한 성탄의 은총을 내려 주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0년 12월 19일 주일 설교 “내 곁에 온 하늘” 네 번째
“빛이 되신 로고스”(The Logos Who Is the Light)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95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1-18을 다시 읽습니다. 왜 예수님이 빛이 되시는지를 묵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당신은 하나님을 떠나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마음의 어둠 혹은 영혼의 어둠을 겪어 본 일이 있습니까? 그 어둠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3) 당신은 빛을 알아보고 빛을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빛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빛을 받아들였다면,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4) 당신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찾기 원하십니까?
5. 중보기도
1)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으나 여전히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고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성탄절에 먼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92장 (혹은 96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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