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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 당하신 어린 양(The Lamb That Was Slain)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16 추천 수 0 2013.01.24 23:41:57
.........
성경본문 : 요1:29-31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2011년 1월 16일 설교와싱톤한인교회 

2011년 1월 16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 (8)
“죽임 당하신 어린 양”(The Lamb That Was Slain)
요한복음 1:29-31

 

1.

지난 주, 한국 신문에서 읽은 어느 기사로 인해 한 동안 마음이 아렸습니다. 약 10년 전, 청순하고 순결한 이미지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던 한 여배우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그렇게 인기의 고공비행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사적인 생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여배우는 한 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 참을 잠적해 있다가 재기를 시도했지만, 싸늘한 여론을 확인하고 다시 뒷걸음질 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최근에 어느 봉사 단체에서 밥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그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 듯 했고, 질문에 대해서도 말을 극도로 아꼈다고 합니다.
 
그 여배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인기와 그에 따르는 엄청난 이권을 한 순간에 내어 놓고 몇 년을 자숙하며 살았습니다. 죄 값을 충분히 치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하면 그로서는 할 만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대중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내밉니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을 바라 볼 때 여전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부끄러운 사건을 먼저 기억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도 조심스럽고, 행동거지도 조심스럽습니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이렇게 한탄할지 모릅니다. “아, 나의 죄는 언제쯤이나 사라질까? 얼마나 많은 벌을 받아야 나의 죄가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제거될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 여배우의 사정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속성을 발견합니다. 죄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의식 속에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 여배우가 아직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대중의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죄 때문일지 모릅니다. 연로하신 어느 교우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젊은 시절에 범한 잘못들이 새록새록 생각나고, 그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습니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무의식의 깊은 구석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겁니다.

때로는 충분히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죄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벌을 받았다고 하여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하여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법의 심판을 받고 나면 그나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한 번 범한 죄는 마치 다 치료되지 않은 병균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흉칙한 모습을 하고 나타납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2.

여기까지 들으시고서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게는 그런 죄가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잠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죄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법을 어기는 죄가 있습니다. 범법 혹은 범죄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crime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양심을 찌르는 죄가 있습니다. 법에 걸어 고소할 수는 없지만 본인 스스로 죄라고 느끼는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죄가 있습니다. 영어로 sin이라고 할 때는 보통 세 번째의 죄를 가리킵니다.

자신에게 별다른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종류의 죄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범죄는 각 나라의 법에 따라 정해집니다. 법이 정한 범죄 중에 전혀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그같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양심수’(良心囚, prisoner of conscience)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파렴치범’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반면, 법에 걸어 고소할 수는 없지만 엄연한 죄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고 있다면, 법은 죄가 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양심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할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종류의 죄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나 자신의 재판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두둔해도, 내 양심이 나를 고발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정죄해도, 내 양심이 나를 죄 없다 하면 나는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양심은 자라면서 왜곡되기도 하고 마비되기도 합니다. 물론, 아무리 썩었어도 양심의 뿌리는 남아 있습니다. 큰 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양심의 고발을 받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죄 혹은 사소한 죄에 대해서는 양심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이 무뎌져 있거나 썩어 있으면 자신이 얼마나 죄를 짓고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뛰어난 두뇌를 사용하여 법망을 요리 조리 피해 다니고 무뎌진 양심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기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 인정하지 못합니다. 양심이 무뎌지고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구제 불능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양심이 순수하고 예민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서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 만은 죄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마치 투시경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영적 체험에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심각한 죄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종류의 죄입니다. 세 번째의 죄에 관해서는 “나는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단언합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3.

이 대목에서 또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만 깨닫게 되는 죄가 있다면, 왜 굳이 그것을 알려 합니까? 그냥 법에 걸리지 않고 제 양심에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럴 듯한 반론입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진상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았다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자신이 아는대로, 그 모습 그대로, 그만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야 나에게 뭐라 하든, 내 기준에서 의롭게 살아가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주하기를 회피합니다. 교회에 나온다 해도 문지방 근처에서 맴돕니다.

앞에서 말한 세 종류의 죄를 우리 몸에 있는 질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첫째, 법을 어기는 죄는 몸에 일어난 외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질병에 걸린 것 혹은 다친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양심을 찌르는 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고통을 본인이 느끼는 질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설 때 드러나는 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본인이 느끼지도 못하는 질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질병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질병입니다.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건강 검진 받는 것을 즐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건강 검진을 추천하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건강 검진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거야.” 실제로, 많은 경우에 우리는 건강 검진의 결과를 보고 안심합니다. 하지만 때로 가슴이 덜컹 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때로는 당장 입원하라는 다급한 이야기도 듣습니다. 혹시나 그렇게 될까 두려워 차일피일 미룹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혹은 느껴지는 것에 근거하여 “나는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면서 회피합니다.

괜찮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내 눈으로 보지 못하고 내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질병 혹은 병균이 우리 몸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오염된 환경, 잘못된 식습관, 혹은 잘못된 생활 습관 때문에 병을 키웁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 때문에 혹은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건강 검진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맙니다. 이 기회에 교우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성전을 보살피는 일에 좀 더 정성을 다하십시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시간도 녹록치 않겠지만, 할 수 있는대로 건강 검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래 도록 함께 영적 여정을 걷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바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치 X-ray 기계 앞에 혹은 MRI 혹은 CT 촬영기 앞에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보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처음으로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의 투시하는 광선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엄청난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양심에 느껴지지 않았던 엄청난 죄들이 들끓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그냥 두었다가는 인생 전체를 망가뜨릴만큼 파괴력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직감합니다. 마치,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그분 앞에 무너져 내려 통곡합니다. “내가 몰랐던 내 죄로 인해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육신의 질병은 때로 우리의 수명을 몇 년 혹은 몇 십 년 단축시킵니다.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질병인 경우에는 우리의 삶의 질을 손상시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질병 즉 죄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의 질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적 질병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꿰뚫는 광선에 우리 자신을 비추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흉칙한 내면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4.

이렇게, 우리에게는 법을 어기는 죄, 양심을 찌르는 죄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드러나는 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법을 어기는 죄 중에는 처벌을 받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교통 법규를 위반한 경우, 벌금을 내면 그것으로 죄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법을 어기는 동시에 양심을 찌르는 죄가 있습니다. 살인이나 사기와 같은 죄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죄에 대한 대가를 달게 받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무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개인의 차원에서는 그 죄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드러나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무시하고 살거나, 망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무시했던 그 죄가 혹은 망각했던 그 죄가 눈 앞에 선명하게 드러나 우리의 목을 조입니다.

죄는 우리가 짓지만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때로, 자신의 죄의 대가를 자신이 책임 지겠노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 모로고 하는 말이며,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법을 어긴 죄에 대해, 양심을 찌르는 죄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죄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할 응분의 책임을 기꺼이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인용한 그 교우님의 말씀대로, 그 죄는 항상 남아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찌르고 양심을 찌릅니다.

기독교는 이 죄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봅니다. 이 죄는, 작게는 개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이며, 크게는 인류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더 크게는 우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영적인 질병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병들고, 내면은 썩고, 성품은 왜곡되고, 혈기는 퉁제 불능 상태에 빠지고, 정서는 비틀리며, 의지는 빗나갑니다. 한 인간의 문제의 뿌리는 결국 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병든 영혼들이 모여서 병든 사회를 만듭니다. 죄로 인해 관계는 깨어지고 왜곡되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립니다. 지난 주, 아리조나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깊이 병들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인간의 죄가 깊어지고 굳어져서 결국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인간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를 조장하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사탄은 악한 영들을 시켜서 인간을 속이고 유혹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그 속임수와 유혹을 빌미로 한 두 번 죄의 맛을 봅니다.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이 됩니다. 그렇게 죄의 소굴을 드나들다가 나중에는 아예 그 소굴에 들어 앉습니다. 악한 영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죄를 죄로 알지도 못하고 죄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공중의 권세를 사탄이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우주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계속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이제까지 지은 죄의 ‘찌르는 가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5.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문제가 많이 있지만, 죄의 문제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가장 뿌리 깊은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 받을 때, 우리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며, 우주의 통치권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의 말씀입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여기서 ‘지고 가는’이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제거하는’ 혹은 ‘치워 없애는’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짊어 진 이유는 그것을 치워 없애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9절을 의미를 담아 번역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보시오,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선택하여 십자가 위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를 드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린 양처럼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 바쳐진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진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에서 드려졌습니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세상의 죄를 위해 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죄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고 죄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양이나 염소 혹은 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로 바치기 전에 제사장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짐승의 희생으로 인해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가 없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율법에 정해진대로 그 제물을 도살하여 제물로 바칩니다. 제사를 드린 사람은 그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믿고 깨끗한 양심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 제사 제도를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제사장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자신의 죄가 옮겨진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 짐승이 다 타 없어지고 한 줌의 재만 남겨졌다 해서, 자신의 죄도 그렇게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성적으로도 맞지 않고, 자연 법칙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방도로 그같은 제도를 마련해 주셨고, 믿음으로 그 제사를 행하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렇게 해 주신다고 믿는 사람만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일어난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이 나의 죄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해결한다는 말은 이성으로도, 자연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한 유대 청년’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의 희생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정하신 것이므로 그분의 약속을 믿고 행할 때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할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행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완전한 제사 후에 그분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밧모섬에 유배 되었던 장로 요한은 환상 중에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하고 외쳤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하고 말하였습니다. (계 7:9-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서두에서 예를 든 그 여배우처럼, 어디를 가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죄의식이 문제입니까?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다 해도, 혹은 아무리 많은 일로 봉사를 해도, 그 죄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어린 양의 피에 씻을 때에만 그 죄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혹,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죄책감으로 인해 잠 못 이룬다는 그 교우처럼, 해결되지 않은 죄들로 인해 여러분의 양심이 불편하십니까?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머물러 앉아 성령께로부터 오는 빛을 기다리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빛을 비추시면 내가 몰랐던 혹은 잊었던 죄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로 인해 통곡하시고 그 모든 죄의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자유와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죄의 족쇄 때문에 고민이십니까? 여러분을 죄로 끌어들이는 악한 영과 싸우고 계십니까? 그 싸움은 뻔히 지는 싸움입니다. 사탄의 결박을 깨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미 우주적인 통치권을 손에 쥐셨습니다. 그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보혈이 우리의 결박을 깨뜨리고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혹, 이 모든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만 같습니까? 나는 죄와는 별로 상관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나에게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보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더 이상 늦추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꿰뚫는 광선에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 보시고,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치명적인 죄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그 영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는 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그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 길을 여셨음을 믿고 그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탄의 악한 손으로부터 놓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제거해 줄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이 그 여배우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이 제게 죄의 문제로 인해 고민을 털어 놓으신 그 교우께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 하나님의 다스림이 더욱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 죄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시여,
경배와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올립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 거룩한 희생의 덕을 입게 하시고
죄와 죄책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정결하고 거룩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이 세상에 만연한 죄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으로
이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게 하소서.
아멘.
 
2011년 1월 16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8)
“죽임 당하신 어린 양”(The Lamb That Was Slain)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02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29-31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살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세 가지 질병(외상, 감각으로 느끼는 병, 검진으로만 알 수 있는 병)과 세 가지 죄(법을 어긴 죄, 양심을 찌르는 죄,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죄)의 비유에 대해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나누어 보십시오.
3) 성령께서 주시는 회개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4) 죄의 문제에 대한 당신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서로 이야기 해보십시오.

5. 중보기도
1)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주변 사람들 중, 죄를 죄라고 깨닫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186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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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 요한계시 새롭게 하소서 계21:5  한태완 목사  2008-01-18 2346
769 요한계시 중,근동 여행길의 하나님 계3:16-17  김병종 교수  2007-12-20 2161
768 요한계시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계21:4  한태완 목사  2007-11-11 3679
767 요한계시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사람 계14:13  한태완 목사  2007-11-07 2110
766 요한계시 책임감과 충성 계2:10  한태완 목사  2007-11-08 2471
765 요한계시 교회들의유형2- 말세교회들의 모습(사,빌,라) file 계3:장  강종수 목사  2004-09-19 2796
764 요한삼서 그리스도인 어버이의 바람 요삼1:2  조용기 목사  2008-05-13 2007
763 요한일서 말세훈-(2)거짓교훈의 역사 요일4:1-3  강종수 목사  2008-12-07 1939
762 요한일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요일3:9  김경재 목사  2008-12-06 1897
761 요한일서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요일4:13  명정옥 자매  2008-12-06 2036
760 요한일서 왜 하나님은 악을 방관하시는가? 요일5:18-21  조용기 목사  2008-10-22 2464
759 요한일서 하나님의 감탄: '보라! 매우 좋다.' 요일4:19-20  김기동 자매  2008-10-05 1525
758 요한일서 내가 잘못했어요 요일1-910  조용기 목사  2008-09-06 2234
757 요한일서 하나님을 아는 길 요일4:7-12  길희성 형제  2008-04-25 1993
756 요한일서 세상을 이기는 힘. 요일5:1-5  길희성 형제  2008-02-26 2626
755 요한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 요일4:10  김남준 목사  2008-02-10 2561
754 요한일서 믿음의 승리 요일5:4-5  권진관 형제  2008-01-13 2102
753 요한일서 사랑이란 하나님은 사람되시고 사람은 하나님... 요일4:7-12  한완상 형제  2008-01-09 2123
752 요한일서 사랑의 실천 요일3:14-18  한태완 목사  2007-12-01 2714
751 요한일서 양심,종교,성경 요일5:1-5  강종수 목사  2007-11-25 1886
750 요한일서 있는 그대로 요일4:7-13  차옥숭 원장  2003-11-28 2838
749 요한일서 예수의 현존체험 요일1:1-2  김 진 목사  2003-11-28 2745
748 요한일서 세상을 이기는 힘 요일5:1-5  한태완 목사  2007-11-08 4204
747 요한일서 성도들이 기도로 간구해야 할 것 요일5:14  한태완 목사  2007-11-06 2572
746 베드로후 불심판의 가능성 벧후3:3-6  강종수 목사  2009-01-18 1633
745 베드로후 그리스도의 영광과 증거 벧후1:16-22  소재열 목사  2008-01-23 1791
744 베드로후 몸을 긍정하는 신앙 벧후3:11-13  홍명관 형제  2004-05-05 2456
743 베드로후 종말을 바라보는 사람 벧후3:8-13  강종수 목사  2007-07-22 2055
742 베드로전 희망, 그 놀라운 힘 벧전1:3-6  한완상 형제  2008-10-15 1895
741 베드로전 종말론적인 삶 벧전4:1-11  정용섭 목사  2008-09-18 2059
740 베드로전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벧전3:18-22  소재열 목사  2008-01-23 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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