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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아라(Come and See)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45 추천 수 0 2013.01.24 23:53:28
.........
성경본문 : 요1:35-3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2011.2.20 
2011년 2월 20일: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13)' -  “와서 보아라” - 김영봉 목사

“와서 보아라”(Come and See)
--요한복음 1:35-39, 43-46

1.지난 3개월 동안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강림절 첫 주일에 우리는 우주의 저 끝까지 여행을 했고 또한 시간의 한계를 넘어가 보았습니다. 지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가 하늘 저 끝과 맞닿아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 묶인 우리 존재가 영원에 잇대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이 우리 곁에 내려왔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선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층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짝 열렸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납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아하!” 하고 무릎을 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우리의 두뇌는 현대의 과학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고 신비롭습니다만, 그 두뇌로도 이 우주적인 진리, 이 영원한 진리를 알아내고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범위는 이 우주의 광대한 크기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이 내 곁에 내려 왔다는 진실, 하늘에 이르는 층계가 활짝 열렸다는 진실, 영원으로 도약하는 길이 열렸다는 진실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두뇌는 적합한 도구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자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활용합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적 생활을 지탱해 주는 네 기둥이 있는데, 제일 중요한 ‘성경’과 ‘체험’, ‘전통’ 그리고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 질문을 억압하는 신앙, 그리고 연구하지 않는 신앙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믿음의 사람은 가장 합리적인 사람 혹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팡세>(Pensees)의 저자 블레스 파스칼(Blase Pascal)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들밖에 없다. 즉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심으로 그분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심으로 그를 찾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가 생각만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의문을 통해 모두 대답될 수 있으며, 연구를 통해 그 전모를 모두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령에 들어서려면, 때로 이성을 초월하고 분석을 무색하게 하며 모든 의문을 침묵시키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체험의 신앙’입니다.

‘체험’이라는 말을 들으면 열광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꼭 그런 체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체험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만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하늘에 이르는 층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내 곁에 온 하늘을 만질 수 있고 내 속에 들어온 영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와서 보아라.”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들이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38절) 그러자 두 제자는 대답합니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절)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39절)

원문의 의미를 담아서 이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오너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오너라. 그러면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빌립과 나다나엘 사이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찾았는데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 같은 촌구석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손을 잡고 “일단 가서 보자.”고 권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드레를 통해 시몬을 만난 다음 날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찾아가십니다. 미리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를 만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43절) 그분은 빌립을 만나 많은 말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를 초청합니다. 와서 함께 살면서 경험해 보기를 청합니다. “와서 보아라.” 이 한 마디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가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찾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분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연구하는 것과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을 위인으로 존경하는 것과 그분을 구원자로 여겨서 그분을 찾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넌센스 퀴즈 중에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이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정답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거리는 물리적으로 30센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이가 가장 멉니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그토록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빌립에게 하신 “와서 보아라.”는 말씀은 가슴으로 느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현으로 존경하는 것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분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머리로 하는 일입니다. 반면, 그분 앞에 머리 숙이고 모든 자존심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예수여, 내 구주시여, 저에게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고백하는 것은 가슴으로 하는 일입니다.

제가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친 분야가 신약성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성경을 붙들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늘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영적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영적 생명력이 시름시름 약해져 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늘 성경을 가지고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칠흑 같은 영적 밤을 맞았습니다. 그 때 저는, 머리로 읽는 말씀만으로는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모름지기 무릎으로 읽어야 생명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을 때에 “와서 보아라.”는 초청에 응해 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그분 안에서 활짝 열린, 하늘에 오르는 층계를 보셨습니까?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앉은 하늘을 보셨습니까? 그분 안에서 영원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러한 만남을 통해 여러분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내 곁에 옴으로 인해 부르기 시작한 새 노래가 있습니까? 영원을 맛봄으로 인해 할 이야기가 생겼습니까?

앞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 파스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토록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명상록 <팡세>는 인류의 고전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가장 심오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사람들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그가 입고 있던 외투의 한곳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뜯어보니, 그 안에는 잘 접혀진 양피지 두 장이 꿰매어져 있었습니다. 그 양피지에는 그의 하나님 체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늘 기억하고 살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그 양피지를 옮겨 꿰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부터 12시 반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양피지에는 적힌 체험을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과 모든 것에 대한 망각.
그분은 복음서에서 배웠던 길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어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시려하십니까?
내가 영원토록 주를 떠나지 말게 하소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떠나 있었다.
나는 그분을 회피하였고, 버렸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내가 결코 주를 떠나지 말게 하소서.
그분은 복음서에서 배운 길을 통해서만 간직된다.
단 마음으로 완전한 포기.

파스칼의 이 체험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와서 보아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답하여, 기도와 묵상과 예배와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같은 체험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이 같은 체험을 열망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가서 그분을 만나 보면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 온전한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의를 알고 그 의로써 거룩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와서 보아라.”는 초청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팔짱을 끼고 앉아 손가락을 까딱이며 계산하기를 멈추고, 그 초청에  응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분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 안에서 내려앉은 하늘이 환히 보일 때까지 찾으십시오. 기도로써, 예배로써, 말씀 묵상으로써, 사랑의 섬김으로써 찾으십시오. 매일 매일의 경건 생활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오. 정기적으로 모여 말씀을 연구하고 삶을 나누는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때로 충분한 시간을 떼 내어 혹은 하루 혹은 그 이상을 떼 내어 하나님을 찾는 일에 몰두하십시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내게 찾아온 그리스도로 여기고 정성껏 섬기십시오.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파스칼이 경험한 것처럼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중에 누군가가 나를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눈물이 핑 도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마치 마음의 귀에 들리는 듯 또렷이 마음에 새겨지는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보이지 않는 이슬이 내려 내 존재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때로, 바울이 보았다는 삼층 천의 신비가 드러나기도 할 것이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변장하고 나타난 주님으로 여겨 전심으로 대할 때, 진짜로 주님을 만나는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4.
이렇듯,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요 만남의 종교이며 깨달음의 종교이고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또한 ‘증언의 종교’입니다. 체험을 하고 난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만났던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무엇인가를 직접 깨달은 사람은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체험하고 만나고 깨달은 것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더 말하고 싶어집니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만난 그 사람을 다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본 그 세상을 다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기 때문입니다. 체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는 법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증언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증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더욱 간절히 그리고 마음을 담아 증언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시몬의 동생 안드레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세례 요한의 증언 때문입니다. 그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가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생 최고의 만남을 얻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장 먼저 형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그 대목을 요한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사람[안드레]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41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라는 뜻과 “누구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안드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만난 분에 대해 증언하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해 증언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먼저 시몬을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빌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여 그분을 따라갑니다.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빌립은 그분이 “모세가 율법 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45절)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만났다는 감격이 그의 마음에 차오르자, 그에게 절친 나다나엘이 떠오릅니다. 앞 뒤 볼 것 없이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 같은 촌구석에서 메시야가 나올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때, 빌립은 나다나엘과 논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논쟁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와 앙금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나다나엘에게 권면합니다. “와서 보시오.”(46절)

5.
세 사람의 증언 이야기에서 우리는 증언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첫째,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자신이 만나고 경험하고 깨닫고 발견해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카더라’ 식의 증언은 통하지 않습니다. 사안이 중대할수록 스스로 만나고 체험한 것만이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동안 증언자로 사셨습니까? 여러분이 만난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가졌습니까? 여러분이 본 그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만일 전혀 그래 본 적이 없다면 혹은 그러고는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과연 증인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는지 혹은 내가 그분 안에서 내려앉은 하늘을 본 사람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선교사의 전설이 되어 버린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목사님은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2/3는 선교의 대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 셋 중 둘이 선교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아직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증인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체험, 그런 만남, 그런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우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을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그 체험과 만남과 확신이 강할수록 우리의 증언은 더욱 강력해지는 법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의 감동적인 증언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가이사랴라는 도시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총독과 왕 앞에서 신문을 받습니다. 그 때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 증언에 대해 총독은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행 26:24)라고 반응했고, 왕은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28절)라고 반응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29절)

바울은 예수 믿어서 부자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어서 고질병을 고침 받았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어서 만사형통했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판정에서 바울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하고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증언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곁에 온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 가져도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 가져도 그 나라를 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과 유다 왕은 바울을 불쌍하게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입니다.

6.
둘째, 증언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일수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물론, 소중한 것을 낯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 가까이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외시한다면, 멀리 있는 낯모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과연 참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낯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 사람이 내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증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그 사람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말을 해도 그것이 내 삶 속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내 안에 진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 내 삶 속에 뭔가 변화를 만들어 냈어야 합니다. 내가 본 하늘이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다르게 만들어 냈어야 합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가 나를 변화시켰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만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증언이 힘을 가집니다. 미국 교회성장 연구소(The Institute For American Church Growth)에서 10,000명의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주요 원인은 무엇입니까?”(What was responsible for your coming to Christ?) 이 질문에 대해 무려 79%의 응답자들이 “친구 혹은 친척을 통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전도가 무익하다거나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증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뜻입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7. <DIV></DIV> <DIV>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에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측량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체험의 종교’이며 또한 ‘증언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체험이 있습니까? 내가 체험한 것을 증언하며 살고 있습니까? 나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나로부터 시작된 증언의 고리가 또 다른 증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체험과 증언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면, 나의 믿음은 얼마나 본질에 가까이 있는지, 위의 질문들로써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아, 내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뭔가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문지방 근처에서 서성이는 분들이라면, 성큼 안마당으로 들어오시고, 안마당에 오셨다면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오시고, 마루에 오르신 분이라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와서 보아라.”는 주님의 초청을 회피하지 마시고 그분을 찾아 나아가십시오. 그분과의 만남이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줄 것이며, 그 체험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을 당신도 만나라고, 그리고 내가 본 세상을 당신도 보라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주님의 은혜로 내게는 체험도 있고 증언도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의 본령에 가까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깊은 만남, 더 진한 체험, 더 높은 깨달음을 찾으십시다. 평생 동안 탐험해도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세계를 탐험하는 일을 중단하지 마십시다. 온 우주보다 더 크고 높고 깊고 넓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사귀어 아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다. 그 세상을 보는 만큼 세상은 넓어집니다. 그분을 아는 만큼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신비로워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증언은 더욱 능력을 가질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
저희를 초청해 주신 주님,
저희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 초청에 응하여
주님을 만날 때까지,
주님 안에서 우리의 하늘이 열릴 때까지,
그 하늘을 만질 때까지,
주님을 찾게 하시고,
찾으면 또한
사귀게 하시고,
사귀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증언하는 일에 능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저희에게 하신 일을
노래하게 하시고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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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 요한일서 사랑의 실천 요일3:14-18  한태완 목사  2007-12-01 2714
751 요한일서 양심,종교,성경 요일5:1-5  강종수 목사  2007-11-25 1886
750 요한일서 있는 그대로 요일4:7-13  차옥숭 원장  2003-11-28 2838
749 요한일서 예수의 현존체험 요일1:1-2  김 진 목사  2003-11-28 2745
748 요한일서 세상을 이기는 힘 요일5:1-5  한태완 목사  2007-11-08 4203
747 요한일서 성도들이 기도로 간구해야 할 것 요일5:14  한태완 목사  2007-11-06 2571
746 베드로후 불심판의 가능성 벧후3:3-6  강종수 목사  2009-01-18 1632
745 베드로후 그리스도의 영광과 증거 벧후1:16-22  소재열 목사  2008-01-23 1791
744 베드로후 몸을 긍정하는 신앙 벧후3:11-13  홍명관 형제  2004-05-05 2456
743 베드로후 종말을 바라보는 사람 벧후3:8-13  강종수 목사  2007-07-22 2055
742 베드로전 희망, 그 놀라운 힘 벧전1:3-6  한완상 형제  2008-10-15 1894
741 베드로전 종말론적인 삶 벧전4:1-11  정용섭 목사  2008-09-18 2059
740 베드로전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벧전3:18-22  소재열 목사  2008-01-23 2077
739 베드로전 여행과 지도자 벧전2:11-12  한태완 목사  2007-11-07 1938
738 야고보서 믿고 참고 기다려라 약5:10-11  조용기 목사  2009-01-02 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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