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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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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1강) 요한일서 1:1-3 나에게 복음은
<본문>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1-3)
<설교>
이번 시간부터는 요한 일서에 대해 강해하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요한일서의 내용이 부디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으로 남고 여러분을 신앙인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능력으로 여러분을 다스릴 수 있는 말씀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선 요한일서는 언급되지 않은 저자 문제로 논란이 있는 성경이지만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에 대한 논란은 신학자들의 할일로 맡겨두고 우리는 요한일서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믿으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가에 초점을 두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1절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라는 말로 시작이 되는데 이 구절은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는 시작 구절과 비슷한 문체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본문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역시 ‘생명’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절의 내용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귐이라는 용어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용어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요한복음과 많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요한일서는 중심 주제가 사랑이라고 할 만큼 사랑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으로 끝나는 것을 볼 때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요한복음이 끝난 후 요한 일서를 강해하게 된 이유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가 사도 요한이라는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요한복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답변에 하신 말씀이 ‘내 양을 치라’ 또는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에 보낸바 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에게 단순히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보낸바 된 제자들을 통해서 증거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보낸바 된 제자들은 그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었고, 여기에 비해 요한일서는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을 마치고 요한일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요한복음을 통하여 알았으니 이제는 세상에 보냄 받은 신자로서 무엇이 신자 됨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지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는 들었고 눈으로 봤고 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봤고 만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예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절의 말씀은 당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하지만 보고 듣고 만졌다는 용어는 사도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지고 보고 들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기 보다는 확실한 실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고 듣고 만졌다는 것은 확실히 실재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즉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함과 실재함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사도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것이고 확실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막연한 복음이 아니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에게 복음은 막연한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께 복음은 확실하고 실재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여러분께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의심이 없고 막연하지 않고 확실하고 실재한 내용이며 사건이라면 마땅히 복음으로 인해 영향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나를 다르시고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나에게 복음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즉 죽은 복음, 추상적인 복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복음을 외칠 뿐 실상은 자신조차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여러분께 확실한 사실로 자리하고 있고 장차 있을 실재하는 사건이라면 과연 삶이 어떻게 되어지겠습니까? 재림은 곧 세상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그 어떤 소망도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세상을 소망 없는 곳으로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말하지만 심판을 않고 마지막을 말하지만 마지막을 믿지 않고 천국을 말하지만 천국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교회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는 자신에게 가장 확실하고 실재하는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로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만진 바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복음을 전하자’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복음은 과연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부터 예수님의 말씀으로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없고,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리는 식이라면 그런 내 자신이 누구에게 예수님을 믿으라 할 수 있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복음이 전달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 판사가 교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어떤 목사를 재판하면서 내린 판결문 가운데 ‘전도는 밖을 향하여 외치는 함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전도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부터 전도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전도를 교회 부흥의 도구로 삼는 현대 교회를 크게 부끄럽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판사가 불신자였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 판사를 세우셔서 그러한 말을 듣게 하신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복음을 증거할 증인이요 신자인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살아가느냐?’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만 잠깐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이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동과 깨달음이 나를 붙들어서 말씀이 요구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게 되는 삶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깨어져 있
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죽는 길도 피하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실재하신 분이고 확실한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죽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실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놀라시기 바랍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자 하고 믿고 있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위해 여러분이 부름 받았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분별하시고 신자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먼 옛날 얘기가 아니고 지금 여러분께 실재하는 확실한 사건이라면 주님의 은혜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은혜를 알기에 주님이 가신 길을 갈 수 있는 신자로서 신자 됨이 증거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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