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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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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1-3)
<설교>
은석 교회가 속해있는 재건교단은 일제 시대 때 있었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다가 해방이 되어서 풀려나온 사람들로 시작이 된 교단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도, 옥에 갇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우린 성경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던 사도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때도 그리스도로 인해 핍박을 받으며 죽기까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듣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이 우리에게 한낱 위인전이나 역사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린 그런 일들에서 믿음의 위대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기 길을 가려고 했던 사람을 붙들어서 주님을 위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믿음의 능력에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은 죽음을 두렵게 하고 옥에 갇히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붙들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 그리스도는 막연하게 기다리고 바라보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분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너무나 확고한 분이기에 나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그분 안에 거한다면 내 모든 것이 사라지다고 해도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담대함과 당당함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부러워해야 하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내 한 몸, 썩어질 육신의 편안함과 잘됨을 바라고 믿음을 구하는 것이라면 너무 가난하고 유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내 육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고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모든 것을 알게 합니다. 때문에 믿음은 가난하나 부요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에 거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셨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도 목격을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기도 했으니까 믿음이 확고할 수 있었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신비한 경험을 하면 믿음이 좋아질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기적을 다 봤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죽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볼 때 신바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이 향상되거나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지순례라는 것도 사실 그때뿐입니다. 처음에는 감동이 되는 것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조금 지나면 모든 기분과 느낌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은혜는 어떤 경험에 의해 얻어지고 지속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어떤 경험으로 인해서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그 말씀으로 인해 잊었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의해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것이 곧 은혜이며 신앙의 확고함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그 모두가 특별한 삶이며 경험입니다. 밥 먹고 살 가치도 없는 것이 나임을 생각한다면 밥 먹는 것조차도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밥 먹는 것도 그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주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님 때문임을 생각한다면 그는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그는 주님을 만나고 보고 듣고 만지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증거 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하지만 예수 믿으면 부활하여 영생한다는 교리적인 차원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았다고 말할 만큼 사도들에게 실재하는 생명이었습니다.
3절에서도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은 사도들에게는 확고한 진리였으며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전도하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이 보고 들었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진리이시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우신 분으로 존재하는가를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할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함이 여러분의 가슴에 살아있는지 묻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확고함이 있다면 전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 속에 있는 진리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증인으로 일하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는 증거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함이 없는 것에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세상의 문제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요한일서에는 저자 자신에 대한 소개 같은 것이 없습니다. 문안 인사도 없습니다. 다만 참으로 놀라운 복음을 알고 믿게 된 사도가 이 놀라운 사실을 꼭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전달자이며 증거자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전달하고 무엇을 증거 하시겠습니까? 보고 들은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만을 증거하고 전달하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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