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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계명과 새 계명

요한일서 신윤식 목사............... 조회 수 2556 추천 수 0 2013.02.02 23: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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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2:7-11 
설교자 : 신윤식 목사 
참고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15강) 요한일서 2:7-11 옛 계명과 새 계명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한일서 2:7-11)

<설교>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숙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명에 대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계명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계명을 실천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여 지켜낼 수 있는 약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는 계명의 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함이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흔히 지금을 은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다만 신약에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확증하셨고 구약에는 다만 은혜의 예표가 주어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앙을 보면 교리는 은혜이면서도 실제 삶은 계명에 매어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즉 은혜로 시작한 신앙이 결국 실천, 행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자기 신앙에 안심을 하지만 행함에 게을렀던 사람은 결국 낙심하기도 하고 자기 신앙에 대해 큰 의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은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우리가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 기도가 만들어 졌고, 40일 금식 기도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기도라는 겉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예전에 들었던 계명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면 굳이 새 계명, 옛 계명으로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계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7절과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7절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이지만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명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본질상 뭔가 새롭기 때문에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간에 중요한 것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입니까?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소위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 대해 친절을 베풀고 조금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여지는 열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6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신자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후螁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때문임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란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말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행함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사랑을 행한 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새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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