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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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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연재선 목사 |
참고 : | 2008년11월8일 새생명교회 http://nlc1.cafe4.com/ |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애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여러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모세로 하여금 애굽으로 들어가 바로 왕 앞에 서도록 만드시고야 말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약속하신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최후 심판도 약속하셨다. 이러한 모든 약속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자유는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그런 자유가 아니었다. 그 자유는 제사를 향한 삶으로 나아가는 자유였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주셨다. 4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이스라엘을 향해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애굽에서 자유함을 얻게 될 하나님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그런 자유가 아니었다. 그 자유는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자유'였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단지 ‘~~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로부터 벗어나 ~~로 향하는 자유’였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자꾸 벗어난 것만 강조하다 보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로부터’의 구원은 있는데 ‘어디에로’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구원 받은 감격은 있는데,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이 없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나라 교회의 강단에 서는 많은 간증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과거에 전과 몇 범이었던 사람이 목사나 장로가 되고, 엉망진창으로 살던 연예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예수 믿고 성공한 사람들이 간증자로서 다니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감격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구원의 감격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것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름인 것이다. 즉 거룩함에로의 부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의 감격이 있고 난 이후에 과거의 일들을 정말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성공했으면 그 많이 번 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얘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그들은 군대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가? 그들은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노예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당시 애굽이라고 하면 세상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그 나라와 대결할 군대라면 더욱 큰 힘을 가진 자가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노예들인 이스라엘을 군대로 부르신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군대로 부르심으로써 하실 일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 애굽땅에서 불러내실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당시 애굽이란 온 세계이다. 그러니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군대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군대는 군대로서의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했었는가?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즉 왕의 자격인 셈이다. 병마(兵馬)란 곧 군사력(軍事力)이다. 은금(銀金)이란 재력(財力)이다. 그런데 아내를 많이 둔다는 것은 단지 정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력(政治力)과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세상의 왕과는 정반대의 왕이다.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쌓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한 왕이 솔로몬이었다. 그는 말을 얼마나 많이 두었는지 병거가 1,400대요, 마병이 12,000명이었다(왕상 10:26). 솔로몬은 금이 많아 왕이 마시는 모든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고 은은 귀히 여기질 않았다(왕상 10:21). 솔로몬 왕은 후궁이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었다. 그 여인들이 솔로몬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여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다(왕상 11:3).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고 말았다.
오늘의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군사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우리의 싸움은 어떤 싸움인가? 성전(聖戰)이다. 즉, 거룩한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은 힘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는 싸움인 것이다. 세상과 구별되는 싸움인 것이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싸움인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쉽게 잡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는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칼을 빼서 상대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보시면서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셨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군대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이고 목표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오토바이 소음을 내며 질주하는 것은 자기 과시이며 스트레스 해소이다. 그런 것쯤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가을 여행 떠나고 싶다고 해서 가족들에 대해선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 훌쩍 떠나는 것은 누가 못하겠는가? 요즘 이혼이 많은데,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당장 돌아서는 것은 누가 못하겠는가?
그것을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군사로서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병사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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