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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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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1.6 http://dabia.net/xe/sermon/633996 |
정용섭 목사
예수가 왕이다
마태복음 2:1-12, 주현절, 2013년 1월6일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 이야기
동방박사 이야기는 주로 성탄절 노래나 연극의 소재로 사용됩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예고하는 점성가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점성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고대에는 그들에게 상당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점성술이 일종의 과학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점성가 박사들은 별을 관찰하다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고대 문서를 살펴보면서 그 별의 기운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를 검토했겠지요.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에 동방은 요즘의 이라크나 이란을 가리킵니다. 더 멀리는 인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와서 이렇게 수소문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
이런 동방박사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예루살렘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사실 여부를 알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왕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동방 박사들을 은밀히 만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를 찾거든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도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고 싶다는 말을 붙였습니다. 실제로는 그 아기를 제거할 생각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헤롯왕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꿈에서 어떤 암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방 박사 이야기의 대강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이 이야기에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동방 박사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요? 어떤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니까 당연히 실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고 싶지만 너무 동화 같은 이야기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동방박사 이야기는 허술한 구석이 많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가 왜 베들레헴에 와서 출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명령에 따라서 그들이 베들레헴까지 왔다고 설명합니다.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처치할 꿍꿍이가 있었다면 동방박사들이 돌아갈 때 알려달라고 할 게 아니라 자기 부하들을 딸려 보냈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른 성탄절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불빛에서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왕
동방박사 이야기가 예수님의 어릴 적 이야기라고 한다면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총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 이 질문이 빌라도 총독에게 중요한 이유는 당시에 왕을 사칭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혁명가들이기도 하고 선동가들이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모아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무력혁명으로, 때로는 정신혁명으로 나타납니다. 일종의 메시아 운동입니다. 그런 이들로 인해서 기존의 질서는 도전받습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일들은 허다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1세기 스파르타쿠스 노예혁명은 유명합니다. 스파르타쿠스는 BC 73년에 70여 명의 동료 노예와 함께 기층 민중을 끌어 모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보낸 진압군 2개 군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기도 했고, 잘 나갈 때는 12만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BC 71년에 로마 원로원에서 파견한 크라수스 장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혁명 기간 동안에 로마의 지배계급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크고 작은 혁명들이 당시 유대 지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억압이 강할수록 민중들의 반발도 정비례해서 크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도 그런 혁명가냐?’ 하고 묻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장 싹을 잘라야만 합니다.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저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절대 이념이었던 안식일과 성전을 상대화한 예수를 이런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들의 고발 내용을 누가복음은 좀더 자세하게 전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닙니다. 만약에 긍정이라고 했다면 빌라도는 당장 사형 판결을 내렸을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 대답을 조금 비틀어서 전합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요 18:34) 복음서 기자들의 말을 따르면 빌라도는 가능한대로 이 사건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고를 당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 특별 사면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민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재판은 세기적 오판이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를 대표하는 총독이 단순히 산헤드린과 민중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나름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사법적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사도신조는 분명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빌라도의 책임으로 못 박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다른 혁명가들처럼 무장폭력으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질서를, 즉 로마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의 결과는 십자가 처형 선고입니다. 총독의 군사들은 로마법에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십자가 머리 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명패가 달렸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마 27:37)
이 명패는 수치의 상징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려고 왕을 사칭한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모욕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따라 나옵니다. 하나는 총독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장면입니다. 마 27:27-31에 따르면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린 뒤,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침을 뱉고 머리를 갈대로 쳤습니다. 죄수들에게 가해지는 합법적 린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장면입니다(마 27:38-44). 함께 못 박힌 두 사람, 지나가던 사람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두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이르는 예수의 운명에 대한 세상의 평판입니다.
예수만이 참된 왕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저주의 대상이었던 십자가 처형을 구원의 길로 경험했던 것처럼 조롱의 대상으로 언급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참된 구원자의 칭호로 새롭게 해석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동방박사 전승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왕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심각해졌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왕을 상징하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미 5:2절을 인용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키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들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세상은 왕을 세웁니다. 그 왕을 통해서 힘을 과시합니다. 왕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명사회는 왕정을 거쳤습니다. 봉건사회를 거쳐서 지금은 민주사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왕에 대한 환상은 여전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지지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국정 책임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세상의 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대선이나 총선 등은 어떻게 보면 선이 아니라 필요악입니다. 정치 자체가 필요악입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사무엘 말년에 왕정을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중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왕을 둔다는 것은 상비군을 둔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민중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왕정이 시작되면 결국 민중들이 왕에게 억압당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지만 민중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정치 지도자는 아무리 선하게 정치를 하려고 해도 구조적으로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권력의 속성에 있습니다. 상대방과 경쟁해야만, 더 나가서는 상대방을 제거해야만 권력이 유지됩니다.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예수를 살해하려고 했었다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로 상징되는 로마 체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도 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왕이 있거나, 못한 왕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상대적인 것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이 땅에 사는 한 상대적으로 나은 것을 우리가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구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이미 자본이 왕으로 군림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권력이 정치에서 이미 경제로 넘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요즘은 돈이 왕입니다. 돈을 지배하는 재벌이 이 시대의 황제입니다. 그들이 많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듭니다. 그런 권력은 헤롯왕이 그랬듯이, 그리고 로마 황제가 그랬듯이 상대를 강압적으로 제압하려고 애를 씁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로마 황제가 참된 왕이 아니었듯이 오늘 이 시대에도 참된 왕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그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를 파이와 당근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파괴합니다. 기껏해야 우리의 삶을 조금 편리하게 할 뿐입니다. 그것도 대개는 속임수입니다. 사시사철 냉난방이 완비된 집에서 산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는 이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세상의 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참된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부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체제 아래서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교회력으로 지키는 주현절의 근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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