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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2: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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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한일서 2:12-14)
<설교>
성경에서 ‘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내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여길 때 감히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험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냥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죄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실천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죄인이야’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들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대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좋은 일을 하며 산 사람이 살인을 하고 악한 짓만 일삼은 죄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다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정작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임을 인식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임을 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이나 인격, 감정 등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세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을 두고 신자의 신앙 수준을 세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자녀와 같은 신앙, 아비와 같은 신앙, 청년과 같은 신앙이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신앙의 높고 낮음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신앙의 세 단계를 의도한 말씀이라면 ‘아비들아’ 다음에 ‘청년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청년의 호칭 다음에 아비의 호칭이 오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호칭이 신앙의 수준 차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내용 사이에 본문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본문은 사랑과 연관이 있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가르친들 배우고 듣고 기억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문제가 정작 우리에게 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것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말씀을 함으로써 사랑이란 짐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
다.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함을 얻는 것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수준 높은 신앙입니까? 분명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호칭은 신앙의 수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호칭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녀, 아비, 청년이란 호칭은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녀, 청년, 아비는 하나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한 것이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한 것은 청년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서 사랑하게 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를 용서 안에 있게 한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우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의 용서함으로 형제를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짐을 지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의식이 있다면 결국 형제에 대해서도 차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자입니다.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 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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