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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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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9-12)
<설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신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앎에 있어서 신자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자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 처지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고 신자가 아닌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든 십자가에서 죽었든 그 모든 것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자신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 처지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나는 죽은 자다’는 자기 현실, 자기 처지를 발견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증거 하는 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죽은 자란 구원을 위한 어떤 의의 행위도 나올 수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죽었다는 것도 생명이 없는 것이고 활동성도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서 의의 모습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자신을 죽은 자로 보게 된 신자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도 나의 의지도 노력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증거보다 하나님의 증거가 더욱 크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증거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그보다 더욱 크니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람을 신뢰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게 되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무작정 신뢰해 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의 말이기에 그 말까지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증거가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평가나 신뢰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항상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처럼 어떤 기적과 말씀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계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조용히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무슨 증거를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조용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과 전지전능하심으로 세상을 운영하시고 또 계시의 말씀을 남기시므로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에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9절 뒷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아들을 향하여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 멋대로 변경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 하시는 것은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 하시는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 멋대로 분산시키면 안됩니다. 아들 외에 마치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사실 우리 자신의 관심이 아닙니까? 내가 관심 두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관심으로 포장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아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하면 반발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내포한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교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그것은 내 관심거리에 교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관심을 두는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에 나의 관심거리를 하나님의 관심으로 끌어 당겨서 정당성을 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심사에서는 멀어진 채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일치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삼서 1:2절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구절도 하나님은 내 영혼도 잘되게 하시고 육신도 잘되게 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분이라는 것으로 기준으로 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이해하는 방향이 전혀 새롭게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실 때 나의 관심에서는 벗어난 채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모든 말씀들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아들에 관해 증거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라는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시고 죽게 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누구신가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에 관해 증거를 받은 신자 역시 관심이 십자가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기에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것인가 따위의 관심에서는 멀어짐을 뜻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은 신자입니다.
10절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는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안에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 안에서 증거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십자가 사건이 있음으로 아들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외치는 것은 ‘너는 죽은 자다’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단절된 비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결국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할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열심히 외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피가 그 사실을 외치고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고,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가 그 속에 있는 신자입니다. 즉 하나님이 증거하신 증거가 속에 있는 신자라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러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 속에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생명과 연결됩니다. 아들이 있고 없고는 십자가를 믿느냐는 것으로 드러나고 십자가를 믿는 것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것으로 드러나고 자신이 죽은 자임을 진심으로 알게 된 신자라면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착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악한 죄인일 뿐이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구출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갈 뿐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3절을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기도를 많이 했느냐? 성경을 많이 읽었느냐? 헌금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증거하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죽음을 대신하셨음을 아는 것이고, 나는 죄에서 죽어야 할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 있다면 그는 이미 영생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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