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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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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형준 목사 |
참고 : | 동안교회 |
홍해를 건넌 사람, 죽은 사람
본문: 히브리서 11:29
인천에 한 고층아파트, 30대 주부가 8살, 3살 된 어린 딸을 떨어뜨리고 곧 6살 된 아들을 안고 자신도 함께 떨어져 동반 자살한 사건이 지난 7월 17일 제헌절에 신문과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사건을 목격한 사람에 의하면 어린 딸들이 자신에게 “우리 엄마가 나를 죽이려 해요” 호소했지만, 이 사람은 “엄마가 설마 너를 죽이겠니?” 하면서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격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왔을 때, 두 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쓴 유서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살기가 싫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카드 빚 독촉전화, 딸 치료비가 없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신세,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부모로서 느끼는 자괴감 등, 죽기 전까지 여인의 마음과 머리에 가득차 있었던 생각입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 일정한 수입이 없었고, 자신은 식당에서 일을 했지만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여인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 안에서 또 자신이 살아갈 사회 속에서 여인은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노력하고 몸부림 쳐봐도 어떤 변화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절망이었습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래와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고통 당할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겠다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엄마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에게 가장 끈끈하고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식 사랑의 정마저 끊고 세상을 포기하게 할 정도의 절망감이라면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희망 없는 땅임에 틀림없습니다.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좌절감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이 가정의 비극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어떤 부분을 대변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IMF 때는 기업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가정과 가계가 어렵습니다. 잘못된 정책과 소비 성향의 변화로 각 가정마다 빚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해서 전쟁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상황은 점점 불안해져 가기만 하는데 마치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무감각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격해져만 가는 집단이기주의의 모습들. 저는 특별히 병원에 가서 집단농성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생명까지 볼모로 할 정도로 우리 마음이 각박해지고 절박해졌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념과 생각의 갈등으로 인한 분열도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들쳐봐도 부패가 끊이질 않습니다. 희망과 밝음의 상징인 자녀들 속에서 병든 사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바로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온 나라가 희망보다는 절망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오늘도 겨우겨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출애굽기 14장 2절,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와 믹돌 사이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믹돌이라고 하는 곳에는 애굽이 아시아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서 요새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바다와 믹돌 사이에 진 쳤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빠져나갈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보고 저들은 완전히 갇혔다고 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해서 쳐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바로 군대의 칼에 찔려서 죽는 것 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공포의 순간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원망도 불평도 분노도 터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순간에 홍해를 가르셔서 죽음의 막다른 길로 여겨지던 홍해를 생명의 길로 바꾸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왔던 바로의 군대를 오히려 물속에 수장시켰습니다.
더 이상 살아날 방법도 희망도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다시 소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것을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믿음 때문이었다면 그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쫓기는 삶, 그러나 돌파구 없는 홍해를 앞두고 어떻게 할 줄 모르며 두려워하는 그것이 오늘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던 믿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첫째 성경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문제와 더불어서 계속해서 끓어오르는 분노, 안타까움, 절망감,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들 등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우리들 속에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앞에 있는 홍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뒤에는 자기들을 죽이기 위해 따라오는 애굽의 병거와 고함소리였습니다. 바로 이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 12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의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게 노라”
그들이 고통과 고난 속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감정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억하게 되었습니까? 자연스럽게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두려운 현실 앞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모세는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들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찌니라. 모세는 하나님과 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시는 그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심리학에서 보면 기억을 3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감각기억이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경험이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들어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 시각과 청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감각기억입니다. 특별히 잠깐 머물러 있는 것을 단기기억이라 하고, 3분 혹은 5분 동안 의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반복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면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이 됩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기억을 장기기억이라 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장기기억의 용량은 무한합니다. 지속시간도 영원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장된 정보가 인출작용으로 의식 밖으로 나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판단하고 생각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인출작용이 일어나는가 하면 외부 자극이 그 사람 속에 있던 장기기억을 자극해서 끌어내는 경우가 있고, 또 기억을 저장한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환경이 조성되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장기기억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을까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습니다. 여러분 노예가 무엇인지 아시죠? 거절 당함이 그 상처 속에 남아있습니다. 또 자유함이 없습니다. 노예의 삶이 가져다 주는 심리적 문제점을 데이빗 시멘스는 수치심과 굴욕감, 두려움과 공포, 증오심 같은 것들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시멘스는 장기기억이란 단순히 옛날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의 경험을 다루기 때문에 기억 속에 감정, 생각, 습관, 태도 그리고 마음속 영상을 따라 행동하는 성향들이 모두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즉 일정한 환경이 되면 그 기억들이 나오는데, 끄집어 내보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노예의 기억들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환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분노와 두려움, 거절 당함, 상처입니다.
여러분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열두 명 중 열명의 정탐꾼은 그곳은 정말로 크고 놀라운 족속들이 산다고 보고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처를 자극했을 때 백성들은 그곳에서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장기기억을 떠올리며 우상숭배와 애굽의 문화를 노래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애굽의 기억들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출애굽 했을지라도 그들 마음과 생각은 애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지우고자 광야에서 40년 동안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억을 주셨습니까?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대로 된다는 기억으로 바꾸는 작업이 광야 40년 동안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출근길에 제과점 앞을 지나고 있는데 그곳에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앵무새가 “아가씨, 이리 와봐요!” 하는 것입니다. “아가씨 정말 못생겼어. 호박같이 생겼네. 왜 그렇게 못생겼지.” 하면서 놀립니다. 아가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새가 이야기 하니까 신기해서 쳐다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음날 앵무새가 또 부릅니다. “아가씨, 이리 와봐요!” “오늘도 역시 못생겼네. 아가씨 이상하게 못생겼네. 아가씨 왜 이렇게 못생겼지?” 화가 난 아가씨는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여보세요! 앵무새 교육 좀 잘 시키세요! 당신하고 똑같은 것 같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앵무새에게 “너 한번만 더 그러면 목을 비틀어 버린다.” 했습니다. 다음날 이 아가씨가 기대를 하고 지나가는데 역시 앵무새가 부릅니다. “아가씨, 이리와요” 오늘은 어떻게 하나 하고 갔더니 앵무새가 하는 말이, “아가씨, 알지?”
바로 누가 이야기 해주지 않아도 상황만 되면 옛날 기억들이 끓어 오르는 것이 우리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떠올리는 기억이라고는 패배했던 것, 절망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고 이 일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기억하다’라는 단어가 250번 정도 나옵니다. 그 중에서 일흔 다섯 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되어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기억해라, 내가 한 말을 기억해라, 내가 너희에게 지시한 말을 기억해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것을 기억하라’고 오늘날 주님은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말씀합니다. 기억했던 사람들에게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무리 편안한 상태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지막엔 멸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기억하기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절망과 어둠 속에서, 원치 않는 죄 된 속성들이 우리 속에 끓어 오를 때입니다. 우리는 애굽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죄 아래 살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 합니다. 이미 죄에 대한 기억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 따라 절망과 어둠이 일어나면 우리 속에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끓어오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쫓아다닙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절망스러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과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라.“시편 37편 23절부터 24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이겨낼 수 있는 용기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입니다.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거나 불행이 그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이라는 것은 겉보기에 불행으로 보일 뿐 실상은 불행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참뜻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불행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홍해 앞 그 절망감 속에서 부르짖는 분들이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나약함과 실패의 기억이 계속해서 내 삶 속에 끓어오르고 있습니까? 이제 그것을 중단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나를 무시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내 속에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원망과 불평과 좋지 않은 기억들을 그만두십시오. 그 생각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중단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십시오. 오늘 모세가 말하는 것처럼 잠잠히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씀을 그리고 끊임없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생각들을 중단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약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선하게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권고입니다. 주님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방황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백성 앞에 모세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대신해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신해서 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향한 신실하신 주님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거기에 홍해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던 절망과 고통의 상징인 홍해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위협하던 것들이 결국은 구원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믿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절망과 절박한 상황 속에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그 믿음입니다.
둘째 홍해를 건넌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입니다.“출애굽기 14장 15절 1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과 생각은 행동을 전제로 한 단어입니다. 어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따르는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믿음을 가지고 그 음성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홍해를 건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만해!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야. 이제는 내가 네게 한 약속을 따라 나아가야 할 때야.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가 아니야.’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성경 주석가인 맥킨 토시는 홍해는 일순간에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차츰차츰 점진적으로 갈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은 결코 한번에 두 걸음을 안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내가 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다음 걸음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한꺼번에 모든 길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한가지씩 순간순간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는대로 따라가서 승리의 길로 갔지 한꺼번에 승리하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 9장 19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시편 42편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1장 3절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68편 19절 보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한 걸음씩 인도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가장 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부목사님들과 신방하러 가면서 제가 가끔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옆에 앉은 부목사님에게 나는 길눈이 어두우니 어디로 가야 할지 임박해서 말해 달라고 합니다. 제가 둔해서 오래 기억 못하기 때문입니다. 임박해서 좌회전, 우회적 이렇게 알려줘야 제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미래를 활짝 펼쳐주시면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을 소경이라 하는데, 시각장애자를 인도할 때도 “바로 앞에 계단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물이 있습니다” 하지 않고 “저기 앞에 계단이 있고 돌면 화장실이 있습니다.” 라고 인도하는 사람은 없듯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한걸음씩 인도해 가십니다.
로버트 모건 목사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만약 유명한 화가에게 풍성하게 열매가 달린 사과나무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그는 단시간에 아주 멋진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가에 심기운 사과나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나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꺼번에 다 자라게 하지 않습니다. 씨앗에서 싹을 틔어서 묘목으로 그리고 과실을 맺는 큰 나무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게 합니다. 비와 바람과 폭풍을 견디며 튼튼하게 자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건강하고 더 복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피어슨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갔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도할 때 갔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 갔습니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나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절망과 어려움 앞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홍해 앞에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주의 음성이 귀에 들릴 때에 손을 내밀어 지팡이로 바다를 가리킨 모세처럼 작은 발걸음부터 한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디시길 바랍니다. 우리 기도의 언어부터,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우리의 기억부터 이런 작은 것부터 믿음으로 하나씩 시작하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홍해를 건넌 믿음입니다.
홍해에 뛰어든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홍해에 뛰어들었어도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길로 여겨졌던 홍해는 구원의 길로 바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애굽 군대가 뛰어들었습니다. 애굽 군대에게 갈라진 홍해는 열린 통로 같았지만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듣고 나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노에서 나온 지시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노예로 부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니까 아깝고 분하고 억울하여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곤고하고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인가 합니다. 분별없이 말을 하거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좌충우돌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잠잠하고 조용 하라고. 그리고 네 판단을 내려놓으라고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의 기억을 멈추라고! 그리고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걸음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605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10대 때 유럽의 유명한 30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장애인으로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18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가 50세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모습이 몹시 피폐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을 날이 생애에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프랑스의 갈메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배치된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는 것은 모멸과 멸시와 천대를 의미했습니다.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지 고민을 안고 들어왔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꾹 참고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냄새 나고, 사람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만 계속 기억났습니다. ‘나를 무시하다니,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간 함께 하시겠다고 동행하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은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더럽고 냄새 나는 곳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에 그곳이 어떤 곳이든 주님을 모시고 있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는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삶의 보람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이 변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인생을 밝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수도원장이 그에게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와 대화 나눈 것과 주고 받은 편지 15통을 묶어 책을 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1600년도 중반에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요?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좌절과 절망의 기억으로 가득 찬 사람, 함께하시는 하나님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기억나게 하는 책으로서 많은 사람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뒤에서 점점 죄어져 오는 현실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고 좌우로도 나갈 수 없습니다. 둘러봐도 희망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어디서 힘을 공급 받아야 할지 알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파트에서 떨어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어떤 기억이 여러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죽이는 기억들로 마음들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살아야 될 생명의 기억들이 마음 속에 가득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홍해를 건너는 믿음! 절망의 현장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절망과 두려움에서 거품처럼 올라오는 생각들을 멈추고 그 문제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변치 않는 구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앞에 홍해의 두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을 따라 한걸음 내딛게 될 때에, 그 걸음은 좌절과 절망의 홍해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시는 신앙의 체험 현장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무너뜨릴 것 같았던 홍해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홍해가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길 바랍니다. 이제 그 말씀 붙들고 절망의 자리에서 한걸음 나아가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이라 고백했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오늘도 내 걸음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 모든 절망을 내려놓고 나아가십시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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