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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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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8-03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세 번째 특성을 말합니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Ⅰ. ‘투기’의 말 뜻
A. '젤로이‘
투기는 희랍어 성경에 ‘젤로이’라고 나옵니다. 긍정적 의미로는 열렬히 끌어 오르는 감정의 상태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 다른 사람의 성취나 성공에 대해 느끼는 격렬한 부정의 감정을 말합니다. 타인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거나,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했을 때 그 상황과 사람에 대해 느끼는 총체적 부정의 감정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투기는 대상에 대한 미움과 기대에 못 미쳤던 자신에 대한 학대의 감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투기의 가장 파괴적인 효과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공평성을 가르치실 때 사용하신 품꾼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일한 시간이 다름에도 주인이 모두 동일한 품삯을 나눠주자 아침 일찍 부름 받은 품꾼에게 투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감사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주인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교의식에서 오는 투기의 감정입니다.
B. 사랑과 투기치 아니함
그러나 오늘 사도는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는 하나의 사랑 안에서 통합된 마음입니다. 13장의 사랑에는 모두 정관사가 붙어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모두 ‘그’ 아가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사랑이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결합시키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단절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교통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고 자기사랑을 버리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은 서로 다르지만 질적으로 하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와 남을 아우르고 결국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회귀적’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자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사랑할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과 비전, 주님이 주신 교회, 내게 붙여주신 지체, 말씀, 찬양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수단일 뿐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며 그렇지 않은 사랑은 철저한 자기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과 함께 신자의 마음속에 사랑을 심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더 깊어지면 한 성향이 됩니다. 그 성향이 바로 하나의 사랑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서, 다른 이들이 그런 사랑을 알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기게 됩니다. 모두 이런 하나의 사랑의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웃이 내가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더라도 그것은 나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그들의 기쁨이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Ⅱ. 참된 사랑이 투기치 아니하는 이유
좀더 구체적으로 참된 사랑이 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A.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
첫째는 참된 사랑이 갖는 만족적 특성 때문입니다. 즉 참된 사랑, 참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을 누립니다. 영혼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이 있을 그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사랑주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하나님 사랑의 충만에 대한 확신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주님을 믿고 온전히 순종했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질서들이 단번에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의 환경이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에는 예전에는 견딜 수 없던 상황인데 이제는 영혼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만족 때문에, 교제의 참된 기쁨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랑의 차이점입니다.
게다가 사람으로부터 온 사랑은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도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랑을 받으면 투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신비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동시에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도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투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반갑고 기쁩니다. 그래서 한데 뭉쳐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참된 사랑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행복이 커질수록 이상하게도 눈물이 많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염려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이 사랑은 자기와 같은 사랑을 나눈 사람을 향하여 확장되고 또 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확장되어서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과는 다르게 사랑의 파문이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파문을 그리면서 사람과 사람을 묶고 사랑이 밖으로 흐르고 뻗어나가서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하나의 사랑으로 아울러 지는 계획을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뛰어넘는 순수하고 짙은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주셨습니다.
전도나 선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단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서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가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전도가 아니라 사랑도 함께 전해주어 그들의 성향이 이 사랑으로 온전해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자기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 사랑이 이웃에게 흘러가는데 자기 사랑이 방해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그 사랑으로 흘러가고 굽이치며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 예수 믿는 사람이 늘 사랑을 외치지만 차라리 하나님 모르고 이 세상에서 착한 이들의 도덕이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이 강력하게 사랑의 성향을 넣어주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는 것이고 이후에는 성장해야 합니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끊임없이 감화를 받으며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서 사랑의 성향이 계속 증진되는 사람들은 이웃을 향하여 해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모두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은혜의 공급을 붙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여 주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이타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한 참된 만족이 신자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그는 투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그의 진정한 기쁨은 주님의 임재에서 오는 기쁨인데 그가 이 세상에 썩어질 무엇에 대해서 투기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B.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성향
두 번째로 사랑이 투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가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이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게 되었을 때 그가 어찌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웃이 하나님 밖에서 좋은 것을 성취했다고 해봅시다. 그래도 투기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얻은 행복이 신앙과 영혼을 팔아서 얻은 행복이라면 그의 영혼의 고통과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게 되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물질이나 명예에 대하여 투기하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 갖는 특성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강물처럼 세상을 향해 흘러가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봉우리의 높음에도 있지만 봉우리를 휘감고 흐르는 개울이 그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물이 없는 계곡은 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강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황야를 흐르는 흙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세월을 머금고 끊임없이 흐르자, 흐르는 그 물을 주변의 흙들이 끊임없이 빼앗았고, 빼앗기는 것 같았지만 그 때문에 풀들이 돋아나고 나무들이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새가 찾아오고 들짐승도 모여들어 숲의 생태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예전에는 흙이 강의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는 강이 흙의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산이 머금었던 많은 물들이 메마른 철에도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갈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어디서도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지 쥐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최종 목적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많은 자원을 구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영적인 자원들, 은혜와 사랑, 용서와 진리에 대한 깨달음,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들, 또 우리에게 주신 젊음, 육체의힘, 건강, 물질들을 가지고 무지하고 어둠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건져내고 붙들어 주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할 때 자기사랑에 사무쳐 있으면 부르르 떨게 되지만 만약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다면 다른 이가 우리를 이용해서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 주안에 있는 행복이라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것을 잃어버려도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투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의 참된 만족은 이 세상과 다투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투기하지 않는다는 모본을 사도는 그리스도로부터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요한 자도 많이 만나셨지만 그들을 질투하시거나 부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부요함 때문에 영혼이 궁핍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도 많이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에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타이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더라도 그 다양한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돼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계에 흘러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하고 궁극적인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 안에서 넘쳐나는 세상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꿈을 교회에 심으셨습니다.
그 교회에 넘치는 사랑을 주셔서 이웃을 향해 투기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사랑을 이미 안 이들이 서로 단단하게 묶여 지식을 나눠주고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영혼도 이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복음전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선교적인 삶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사랑의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 진리와 함께 일하는 사랑, 그 속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탁월하신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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