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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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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11-09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앞에서 기독교의 장엄한 교리에 관한 설교를 마친 후에 12장부터는 그 교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삶 전체가 예배의 정신을 따라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드렸던 예배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식이어야 하며 예배는 그러한 삶을 집적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전한 헌신이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예배 두 가지입니다.
II. 좁은 예배와 넓은 예배
좁은 의미의 예배는 시간을 정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를 말합니다. 그 때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이 우리를 향해가지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듣습니다. 또 그것으로 자신을 살피고 또다시 뉘우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구하게 됩니다. 이런 좁은 의미의 예배 속에서 신자는, 주님의 용서와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닌 백성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쳤을 때 신자는 언약백성으로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명확한 의무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일주일의 삶은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받았던 말씀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구현입니다. 그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물론 일주일 동안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항상 즐겁고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밖으로는 온갖 핍박과 유혹, 안으로는 자신의 육욕적인 자아와 끊임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신자는 좁은 의미에서 받은 선명한 말씀의 지식과 충만한 은혜가 넓은 예배를 드리는 의미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 분투하고 돌아왔을 때 신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위로를, 자신과 분투하던 사람들은 옛 자아를 이기며 새 본성을 따라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죽는 날까지 이 두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또 다른 삶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III. 복음적인 통합: 영적 예배
사도는 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예배의 정신이 다르지 않고 복음적으로 통합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A. 구약: 헌제와 제물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제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 제사는 죄를 용서 받는 것과 하나님 은혜를 힘입는 것, 또한 감사를 표현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사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 역시 본질적으로 영적인 예배였기 때문에 영적 예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모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말하는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의 일치였습니다. 그런 제사만이 하나님께서 영적인 예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물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때 짐승들은 완전히 죽임을 당한 후에 헌제자의 손에 의해 바쳐졌고 단지 제사장에 의해 드러내어 맡겨졌을 뿐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 짐승은 어디로나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였지만 피를 흘리고 난 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헌시되어 바쳐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헌제자 역시 그런 정신으로 온전히 자기가 죽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예배를 드릴 때 열납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삶에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과 깨뜨려진 심령이 있다면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이 일치되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B. 신약: 마음과 몸
신약에서는 어떨까요? 신약에서의 하나님께서는 비록 죽일 제물과 바칠 헌물이 없다할 지라도 마음과 몸이 일치한 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될 때 영적인 예배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나와 마음에 진정한 경배의 정신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회개가 없는 구약 백성의 제사와 똑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몸은 예배당에 와있어도 그것은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진정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일주일 동안 예배의 정신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힘겹게 살아왔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없이 욕망을 따라 산 일주일 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을 찾으며 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또 일주일 동안 삶은 그 시간의 예배를 감격스럽게 드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삶을 삶은 예배를 위한 것이 되니 그렇게 구분은 되지만 나뉘지 않도록 통합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분투하던 사람들은 더욱 마음을 모아 감사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예배 시간이야말로 죄를 용서 받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참된 영적인 예배를 드릴 때 예배시간에 만나주시며 삶속에서도 동일하게 동행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IV. 참된 영적 예배를 위하여
사도는 이런 참된 영적 예배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세가지를 제시합니다.
A.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음-두 가지 본받음 첫 번째는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를 쓸 때나 지금의 세대는 똑같습니다. 타락 후 하나님 없는 세대의 정신은 언제나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받다’라는 희랍어의 의미는 어떠한 틀에 의해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찍혀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항상 두 가지입니다. 예수의 형상이 아니면 세상에 의하여 틀이 찍히는 것입니다.
① “세상”을 본받음 : 옛 본성의 움직임
옛 본성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욕망을 따라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교만함이었습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된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때는 저절로 미끄러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기도 안하던 사람이 기도 하려고 애를 쓰면 얼마나 힘듭니까? 늘 졸던 사람이 정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이것들에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매우 그릇된 태도입니다. 신자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이 진리에 부합하는 삶인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아니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싶을 때마다 그 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냐고 혹은 어제 주님을 만난 몸으로 불순종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② “예수”를 본받음 : 새 본성의 움직임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에 나아와서 일주일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틀 찍혀 이 세대를 본받은 것에 대해 성찰하고 말씀에 의해 깨져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틀에 의해 찍히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는 비록 연약하고 종종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예배의 힘으로 주님 앞에 조금씩이나마 예수의 형상을 본받으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뜻을 따라 살며 자기가 죄인임을 기억하고 십자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새 본성이 살아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의해 틀이 찍히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와 온 삶이 진정한 영적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본받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매우 강한 힘으로 우리를 찍으려 하는데 거기에 어떻게든 항거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는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B. 영적 변화를 받음
영적인 변화는 영혼의 변화입니다. 영혼은 물질이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영혼은 본질적으로 힘입니다. 영혼은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향 혹은 힘을 가지고 영혼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마음은 그런 힘을 느낄 때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본성의 힘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 감정에 까지 실제적인 행동을 규율하게 됩니다. 이런 힘은 모든 영혼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힘의 방향입니다. 영혼이 부패하면 그 힘의 방향은 항상 정욕의 방향으로 행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은 볼 수 없지만 그 힘의 작용이 악하기 때문에 마음의 형상들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그런 움직임은 마음 안에서 그렇게 하나의 성향이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은 사실 객관적인 물건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성향이 악하면 돈을 통해 악을 행하고 불순종해서라도 마음에 만족만을 꿈꾸지만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면 어떻게 하나님께 그것으로 영광을 돌릴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향한 사랑은 자기 욕망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똑같은 사물이라도 마음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사물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음을 움직이는 본질적인 것이 영혼의 힘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적인 변화, 악에서 선으로, 나에서 하나님께로 바뀌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바로 오직 진리와 성령으로 가능한 이런 영혼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모여서 펑펑 울고 뛸 뜻이 기뻐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진정한 영혼의 변화는 언제 옵니까? 예배입니다. 예배시간은 영혼이 변화 받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 교회 밖에서는 영혼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C. 마음을 새롭게 함
그런데 이런 신자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놀라운 변화는 대부분 마음을 통해서 영혼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혼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도 내 마음의 주인이고 나도 내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주인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주님이시지만 은혜에 서 멀어지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모든 것 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신자의 영혼을 변화시킬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을 통하여 영혼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된 영혼은 마음을 통하여 그 변화를 드러내고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영혼의 변화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그 변화를 간절히 사모하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자의 의지적인 참여가 없다면 그의 영혼은 변화될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영혼의 변화를 꿈 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사모함이 있는 거기에 신비하게도 그 의지와 함께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고 구태적인 습관으로 은혜를 불가항력적으로 받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나무꾼이 나무의 결을 따라 도끼로 그 나무를 자르듯이 우리의 마음의 결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결을 보고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킬 말씀의 도끼를 내리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준비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이 변화받기 적합한 마음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V. 결론: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 마음으로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그쳐서 참된 예배자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썩어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무릎을 꿇고서 간절히 기도하며, 지가가 아무것도 아닌 벌레 못한 구원받은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 그것들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바로 예배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게으르고 나타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뿌리를 갉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을 본질을 굳게 붙드십시오. 신앙에 쉬운 길은 없습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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