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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2)

에배소서 김남준 목사............... 조회 수 1900 추천 수 0 2013.03.08 12: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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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4:15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2008-12-14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I. 본문해설

 

오늘은 신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성장입니다.

 

II.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길

 

성경은 어디에서도 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도록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성장을 도외시한 양적 성장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강조하십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한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사도는 이 구절에서 목회자인 그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진정으로 품고 있는 소원과 기도의 제목을 피력했습니다.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영적인 성장 없이 커지는 교회는 비만한 상태와 같고 쇠약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신자 개개인이 영적인 성장을 거듭 한다면 큰 교회는 건강하지 않은 작은 교회 수백 개가 할 수 없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며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오직 하나, 신자 개개인의 영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성장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정도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두 가지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A. 참된 것을 행함

 

여기서 참된 것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은 한자어 ‘진실’이란 말로 부를 때 그 의미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피력했는데 그 소망도 에베소 교회를 향한 소망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참 됨, 참된 것, 참된 생활로 대변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표리부동하지 않고 안과 겉이 같아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어떤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뻔뻔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진실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참됨은 진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사람 각자가 자기의 마음의 자세와 삶의 방식에 적용한 내적인 질을 가리켜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생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판단을 내릴 때 A라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 진리의 빛 아래서 사물과 사람을 보고 다시 판단해 보니까 B로 가라는 것입니다. A는 욕망에 합치하는 것이고 B는 진리가 가르치는 길입니다. 내 삶은 아직 B를 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진리가 가르치는 길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고 내 생각을 꺾은 후 어렵지만 진리에 합치되고자 애를 쓸 때 우리는 그것을 ‘진실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을 보고 ‘진실한 마음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와 관련 없다면 차가운 사실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됨의 의미입니다. 진리의 힘은 질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밤길에 산을 오르는 이들 앞에 비추는 전등불과 같지만 그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빛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님이 아무 이유 없이 핍박받았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후기근대주의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새롭게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되게 사는 것입니다. 거짓되게 이 세상에서 번영하기 보다는 참되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 그래서 신자의 존재의 가치는 그 진실한 삶을 통해 진리의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진리를 부인하고 가증스러운 거짓의 삶을 살아도 진리는 여전히 있으며, 그 자체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마지막 반사체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물론 진리의 힘은 폭력을 동원해서 일어나는 혁명과 같은 단기적인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힘은 무엇에 의해서도 진압되지 않는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삶을 통해 진실 속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여줄 때 그 방식이 간접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진실을 함유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님처럼 진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진리를 본 적이 없다고 여겨지는 타락하고 어두운 인간이 그 전에 진리를 경험했다면 더 이상 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 이치는 이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라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행복해진 적이 있었기에 바랬을까? 그래서 물음표로 남겨둡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만큼 진리에 대한 감각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진리가 나타날 때에는 어김없이 저것이 진리라고 소리칠 수 있는 감각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아 진실한 삶을 살게 되면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실하게 살려는 여러분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진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하며 소중한 것이기에 저 사람이 온 삶을 다하여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할까를 생각하며,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하나님이 주신 감각과 일치를 이룰 때 하나님께서 그가 감탄하며 예수가 빛이시고 자신은 어둠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은 후 금방 데려가지 않으시고 괴로움과 죄가 있는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참된 것을 ‘행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순종이며 진리에 대한 복종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어떤 개념일까요? 순종은 진리의 판단과 나의 판단이 상충될 때 나의 판단을 버리고 진리의 판단에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의미에서 순종은 반드시 진리의 대한 앎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분이 진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중심이 사실 중심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들일 뿐이고 오직 진리는 나와 같은 표면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차원에 있는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앎과 순종의 관계를 순환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알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면 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전자입니다. 진리를 알면 그것의 결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지 못하게 했던 수많은 오류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만 말하지 않고 순종해야지만 주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더 빈번하게 강조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와 관계없는 허위의 삶을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허위의 삶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들을 볼 때 일정한 진리의 빛이 없으니까 그 때의 기분과 인생관, 생각과 욕망들이 통제되지 않고 쏟아지는 것입니다. 또 생각과 감정, 의지가 제 맘대로 가는 동안 그 사람의 영혼과 정신 안은 마치 시장바닥과 같이 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는 우레와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속에서는 진리가 말하여도 들리지 않고 빛으로 나타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두 설명해주시지 않으셔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내어주신 우리의 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멘으로 순종하게 될 때 시장바닥 같던 소란한 상태가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만 되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해석하면 또 다른 하나의 내면적 신비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이 진리를 진리로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두 가지 요소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의 비추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진리를 알아 볼 수 있는 감각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고 감각입니다. 감각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진리를 발견하고 나서 자신의 지성의 위대함이나 감각의 탁월함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끊임없는 진보는 영적 성장의 핵심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 것이 영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성장에 는 또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한 때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성경을 펴면 꿀송이처럼 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돌아가는 생활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깨달음이 올 때에 우리의 영혼을 점점 예수 닮아가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들이 멈춰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대답이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붓는 것은 뜬 물에 생수를 쏟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일종의 깨달음이 이 이성의 표면을 스쳐가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이 마음은 소란스러워서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고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이유는 잘 몰라도 순종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계속한다든지 습관적인 불순종이 있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제해버리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예배시간에 혹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빛줄기 같은 진리를 가슴이 시리도록 깨달았다면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려는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부분적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전체의 주인이 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명백히 해야 되는 것을 계속 안하는 것도 말씀의 빛을 제하시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은혜를 주실 때는 반드시 소명도 포함되어 있는데도 타산적인 계산이나 충동으로 그 자리에서 이탈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거둬들이십니다. 이 일은 그 만큼 예민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에 많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직장을 잃고 건강을 상실하고 가족들에게 위기가 오고, 애인을 잃어버리고, 결혼을 제때 못하는 것이 인생의 위기이지만 신령한 사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위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힘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가 물이기 때문에 배를 띄우고 항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사람이 그 물을 먹으며 항해할 수 없기에 마른목을 붙들고 빗물을 기다리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의 끊임없는 내림을 통해서 그 진리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힘으로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별의 고통과 핍박, 시련을 견뎌냈고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막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신자의 삶에서 무엇이겠습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영혼의 침체 내지는 영적인 성장의 멈춤에 대해 아무리 고민해도 같은 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이제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빨리 순종하고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진리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B. 사랑 안에서 삶

 

두 번째는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경에서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고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이라도 그것은 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발생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그 유지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에 있는 사랑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우리 안에 받은 하나님 사랑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게 함으로써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을 통일성 있게 하시기 위하여 묶으셨는데 그 방법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다양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님 사랑의 신비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들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계속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마지막 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서 역사할까요? 바로 인간의 본성에서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본성이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이 본성이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이외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오심은 죽어도 변할 것 같지 않는 이 본성을 변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런 놀라운 변화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은 성령의 은혜의 작용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성장은 이러한 은혜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감으로써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행동은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나오지만 우리의 행동 자체는 영혼을 바꾸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마음의 변화는 행동을 바꾸는 원천이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종 질문합니다. 지식은 계속 자라나는데 왜 그런지 마음에 기쁨이 없고 삶에 적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은혜의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개념이 되어서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 지식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의 일어남이 언제나 함께 동시에 일어나 그 말씀을 놀랍도록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 됩니다.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이 멈추지 않습니다.

 

III. 결론: 구원의 목적-주를 닮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사랑 안에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의 제목을 다시 회복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되게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진실하게 사는 것이 내게는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예수를 더욱 더 사랑 하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가장 큰 죄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교훈의 핵심입니다. 그분께 다 바치기에 아까워서 남겨둔 마음은 어디에 쏟아 버리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유일한 즐거움을 삼고 살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성장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은 나를 많이 사랑하시는데 나는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심한 후 보다 그리고 지금보다 앞으로 남아 있는 날들이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진리를 알고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절대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0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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