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님의 <아, 그렇군요/신앙과지성사>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최용우

 

1.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16:9)

 

"자네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세상에 속한 것'(개역성경에는 '불의'로 변역됨)을 떠나 살 수는 없네. 지금 자네 주머니에 있는 돈도 어김없는 세속의 재물이지. 그런데 그것을 더 많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일세. 명심하시게. 자네가 인생을 마감하는 날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마나 돈을 사랑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을 사랑했느냐라는 사실을. 사람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너와 네 이웃)이지 돈(재물)이 아니라네. 예수님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눅16:9)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너희'란 재물이 아닌 사람을 먼저 사랑한 사람들 아니겠나? 그렇게 살라는 말씀일세."

 

2.끝나지 않은 마귀의 시험(눅4:13)

 

"사람이란 아무리 깨끗하고 위대한 성인군자라 해도 죽는 순간까지 마귀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네.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받는 얘기가 누기복음 4장 13절에서 '마감'되지 않고 '다음 기회'로 이어지는데서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뒤로도 계속 마귀에게 유혹(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렴. '마귀는 이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잠시 예수님을 떠나갔다.'(현대인의성경)"

 

3.오른뺨 왼뺨 (마5:38-41)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낡은 법(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을 선포하시는 말씀 아닌가? 예수님의 이 새로운 법이야말로 불의에 당하지도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비폭력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극복해 내는 엄청난 혁명의 수단일세.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기껏 용감해봤자 그대로 앙갚음할 궁리나 할 뿐인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 근본적인, 그래서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듯이 보이는 주문이긴 하지만 악에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방법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오른뺨 맞고 왼뺨을 돌려대는 것이 오냐, 나 죽여라 하는 심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어야 하겠지?"

 

4.세례자 요한이 한눈을 팔았나? (마11:2-3)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이냐고 묻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고, 더구나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례 베풀기를 사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무엇을 더 확인하려고 제자를 보냈던 것일까요?"
"사람의 믿음이 그토록 쉽게 흔들린다네. 어떤 사람 말 한마디에 십년 우정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잖은가? 세례 요한도 감옥에 갖혀 있으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믿음이 흔들렸던 것일세. 들리는 소문으로 예수님이 자기가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정말 당신이 메시아냐고 물어보게 했던 것일세. 자네도 자네 믿음을 믿지 마시게. 그랬다가는 크게 낭패를 볼 수 있어. 자네가 믿을 대상은 자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네. 이점을 착각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해. 요한이 의심을 묻어두지 않고 곧장 밖으로 드러내어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 것은 아주 잘한 일일세."

 

5. 예물을 바치기 전에(마5:23-24)

 

 "한(恨)이란 마음에 무엇이 맺혀 있는 것인데, 무엇이 맺혀 있는 마음은 맑지 못하지. 맑지 못한 마음은 하느님을 뵐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네. 마음 맑은 사람이 하느님을 뵙는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이 그 말씀아닌가? 따라서 한이 이쪽에 있든 저쪽에 있든 그것을 안은 채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건 합당치 못한 일일세." 

 

6. 예수가 마을 밖으로 나간 까닭은?(막8:22-26)

 

"예수님은 왜 그 자리에서 맹인을 바로 고쳐주시지 않고(다른데서 그러셨듯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을까요?"
"베세다는 고라신과 함께 심판날에 무서운 벌을 받으리라는 저주를 받은 도시였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눅10:13-14)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게는 은총도 함정이 될 수 있다네. 아마 그들이 맹인을 데려온 것도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걸세. 예수님이 그를 마을 밖에서 고쳐주신 행위 자체가 그 도시에 주신 강력한 메시지였네. 몇이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7.모세와 엘리야는 부활한 분들인가?(마17:1-3)

 

"그날 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참으로 특별한 사건이라네. 시공간(時空間)에 갇혀 있는 지상(地上)의 존재들(제자들)이 시공간을 벗어난 천상(天上)의 존재들(예수, 모세, 엘리야)를 목격한 걸세. 지상의 언어로 말할 때에는 '처음'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지만 천상의 언어에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어. 시간도 공간도 없는 데가 하늘이니까.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성서를 읽는 게 좋겠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사건들이 성서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얘길세. 그것을 다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마따나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담으려는 것과 비슷한 일이지."

 

8.예수도 제자들을 편애하셨나? (막5:36-37)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열 두 제자 중에서 유독 이들만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건에 동참하게 되었을까요?"
"자네 질문은 왜 예수께서 특별한 경우에 세 제자만 데리고 다니셨느냐는 거지? 그거야 누구나 경험하는 일 아닌가? 자네한테도 특별히 가까운 친구가 있겠지? 예수님도 그런 제자들이 있었던 걸세. 모든 제자를 상대할 때도 있지만 몇 사람 측근만 데리고 일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그 세 사람이 왜 하필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까?"
"자네는 왜 하필 자네인가? 그들이 '누구'였느냐는 건 문제의 핵심이 아닐세."

 

9.비어 있는 산 같은 사람(눅11:24-26)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말을 알고 있겠지? 임자 없는 빈 산이라는 뜻인데, 그런 산에는 아무나 들어가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는 걸세. 사람 내면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말은 그가 지금 무주공산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악령이 나왔다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들어가기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할 수 있었던 거야. 이야기의 요점은 사람이 텅 빈 상태에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르치는 데 있다고 봐야겠네.
그리스도인은 속이 깨끗하게 비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세. 그런 사람에게 어찌 악령이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 수 있겠는가?"

 

10.돼지 떼와 예수의 경제 논리(막5:1-17)

 

"2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의 몰살은 경제적으로 너무 큰 손실이 아닙니까?"
"자네는 사람 목숨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보험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모양인데, 그 '한 사람'이 자네 자신일 때에도 돼지 이천 마리가 아깝다고 하겠나?" 

 

11. 왜 우셨을까? (요11:5-35)

 

"자네는 감정(感情)이 이성(理性)의 통제를 받지 않는 그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나? 사람이라면, '가슴'이 돌처럼 굳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를 당해 보았겠지. 예수님도 자네와 똑같은 사람이셨네. 그분께도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으셨어. 아무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슬픔에 가슴이 공명(共鳴)하여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진실한 정경(情景)을 자네는 그려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다네"

 

12.빵 속에 사탄이? (요13:21-28)

 

"지금 식탁에서 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유다 한 사람 뿐일세. 그래서 '내가 빵을 적셔 줄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며 빵을 적시어 자기에게 주셨을 때 유다는 그 동안 은밀히 추진해 온 자신의 배신 행위를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며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이신다는(허락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겠지. 빵을 먹자 사탄이 들어갔다는 말은 그 순간 유다가 마음을 굳혔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걸세. 빵 속에 사탄이 들어 있었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사탄을 넣어 주셨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나? 그건 안 될 말이지."

 

13.왜 지나쳐 가시려고 했을까? 9막6:47-48)

 

"물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지나쳐가려고 하셨습니다. 기껏 도와주러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려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일상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 곁을 지나쳐가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주님은 그날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발견' 되기를 바라셨던 것일세. 진정한 도움이란 일방적일 수는 있겠지만 강제적일 수는 없는 걸세. 도움을 받는 쪽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도움을 베풀 수 없는 법이지.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 자에게 도움을 강제로 준다면 그것은 도움의 얼굴을 한 폭력 아니겠는가?
명심하시게. 자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대가 언제든, 어떤 경우든, 자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자네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분이 계시다네. 인생의 풍랑(곤경)을 만나거든 눈을 뜨고 잘 보라구. 바로 그 풍랑(곤경)속에 자네를 도우러 달려오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일 걸세. 아시겠는가?" 

 

14. 진주는 무엇이고 돼지는 무엇인가?(마7:6)

 

"돼지는 무엇을 던져 주어도 일단 입에 넣어 씹는 버릇이 있지. 왜 그러냐 하면 생각이 온통 먹는 데만 가 있거든. 사람들 가운데도 육신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에만 몸과 마음이 온통 쏠려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의 귀에 '하나님의 도(道)'라든가 '이웃 사랑' 따위가 제대로 들리겠는가? 진주를 먹는건 줄 알고 씹었다가 먹지 못하는 것인 줄 알았을 때 돼지는 성이 나서 진주를 던져준 사람에게 덤벼들겠지.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자들이 있지 않던가?"
"있지요"
"아무리 값진 물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쓰레기나 마찬가질세."

15.예수는 초라한 방랑객인가? (마8:18-20)

 

"예수님은 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는 말로 율법사에게 대답을 하셨을까요?"
"자세히 살펴보시게. 과연 무엇을 자네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자네 몸이 자네 것인가? 건강? 재산? 젊음? 시간? 재능? 자기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닐진대 하물며 무엇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란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런 존재라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께만 통하는 진실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통하는 진실을 밝히신 것일세. 알아듣겠는가?" 

 

16. 예수와 성령은 비껴가는 존재인가? (요16:5-7)

 

"예수님 시대 이전과 이후의 성령에 어찌 차이가 있겠나? 다만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이 일하셨고, 예수님 이후 시대에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하신다고 새겨듣는 게 좋겠구먼."

 

17.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마22:2-14)

 

"예복이 그토록 중요한 건가요?"
"예복을 입었다는 말은 여태까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는 뜻일세. 갈등과 다툼으로 빚어지는 살생의 어둠 속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는 얘기지. 알겠나? 이건 선악의 문제와 차원이 다른 매우 중요한 문제라네. 하늘은 땅으로 내려올 수 있지만 땅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법이야. 하나님은 사람으로 될 수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으로 될 수는 없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내려올 수는 있지만 사람이 어두움의 옷을 벗지 않고서, 자기 본바탕인 빛을 가리는 '어둠의 껍질'을 입은 채로, 하늘 밝음에 들어갈 수는없다네."
"제가 어떻게 하면 하늘잔치의 예복을 입을 수 있을까요?"
"우선 그 입고 있는 옷부터 벗으시게. 사람이 만든 옷을 모두 벗은 벌거숭이 알몸뚱이, 그게 바로 하늘 잔치 마당에 들어갈 자들이 입고 있는 눈부신 예복이라네." 

 

18.100. 60. 30인가? 30, 60, 100인가? (마13:3-9)

 

"만약에, 마가는 삼십에서 백으로 올라갔는데 마태는 백에서 삼십으로 내려온 까닭이 무엇이냐고, 어느 쪽이 '오리지널'이냐고 예수께 직접 여쭙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는가?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싶네.
'글세, 나도 기억나지 않네. 그날 내가 삼십에서 시작했는지, 백에서 시작했는지, 필경 둘 가운데 하나겠지만 그게 그거 아닐까?'
그래도 자네가, 왜 마태는 백에서 삼십으로 내려왔을까 하고 고집스럽게 계속 물으면 틀림없이 아주 '기발하고 심오한 뜻'을 얻게 될 걸세. 그런데 바로 그 '심오한 뜻'이라는 게 십중팔구 본문의 핵심에서 자네를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농간일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거든. 아시겠는가? 명심하여 언제나 본문의 핵심을 찾아 그것을 캐어묻는 자세를 잃지 마시게. 우리 주님은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네."

 

19.잡고 싶은 마음, 잡지 말라시는 주님 (요20:11-18)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고 '랍비여'하고 불렀을 때 예수님이 '나를 붙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잡고 싶은데 왜 그러셨을까요? 섭섭하게 느껴집니다."
"마리아가 비록 영의 눈을 떴지만 아직 '육체'를 벗지는 못했네. 영체(靈體)를 보려면 영의 눈이 열려야 하듯이 영체를 잡으려면 영의 손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마리아에게 있는 것은 육의 손밖에 없었거든. 그 손으로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었네.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잡았다가는 예수님이 유령이나 아미면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 몸을 잡지 말라고 하셨던 것일세. 소중한 것일수록 손으로 잡으려 해서는 안되네. '잡는자 잃는다(執者失之)'는 노자의 말도 있잖은가?" 

 

20.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행1:9-11)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기사로 시작됩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도 그분을 뵐 수 있는 걸까요?"
"하늘에 오르신 분이 하늘에 계시지 어디 계시겠는가? 자, 눈을 들어 보시게 하늘이 어디 있는가?"
"저 위에 있습니다."
"그 하늘이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가?"
"제 발 밑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자네 몸 또한 지금 하늘에 있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시방(十方) 세계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분으로 되셨다는 뜻이라네. 그러기에 그분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28:20)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것일세." 

 

21.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쯤? (마10:16-23)

 

"마태복음10장 23절에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실제로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복음 때문에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격려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게 순리일 듯 싶네. 복음 때문에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한다는 '재림 신앙'보다 큰 위로가 따로 있었겠는가? 따라서 이 말씀을 '재림에 대한 예고'로 볼 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믿음의 고백'으로 보면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걸세." 

 

22. 왜 똑같이 대우하지요?(마20:1-16)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할 때 왜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삯을 주고 먼저 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어 혼란을 일으켰을까요? 하늘나라가 그런 데라면 기분 나빠서라도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겠네요"
"있다면 참으로 딱한 자들이지. 사실 그런 자들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데가 하늘나라일세. 남들이 자기와 똑같이 대접받는 게 배가 아픈 자들은 하늘나라 백성 될 자격이 없거든"
"그렇군요"
"자네가 맨 나중에 온 일꾼이라고 생각해 보게. 그래도 불평을 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평이라니요? 너무나 황송하고 고마운 일이지요."
"이제 어째서 유다인 상류계층보다 서민 대중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더 따랐는지 그 까닭을 알겠는가?"

 

23.예수에게 친형제가 있었나요? (마12:46-50)

 

"마태복음 12장 46절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하는데, 그 형제들이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 친형제들이었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 점에 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의 견해가 다른 것 같더군. 천주교는 일반적으로 성모님의 평생 동정설을 믿으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친형제들일 수 없고, 개신교는 마리아가 자녀들을 낳았다고 믿으니까 그들을 예수님의 친형제로 보는 데 아무 장애가 없지. 증명되지 않은 사실은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으며,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일이라네. 그들이 예수님 친형제들이었느냐, 아니었느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사실'에 관계된 질문이 아니라 '믿음'에 관계된 질문일세. 사실이 어떠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대답을 해야 하는, 그런 질문이란 얘기지." 

 

24.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눅12:49-53)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어둠 속에 들어가서 어둠으로 융(融解)해될 수는 없다네. 반면에 어둠은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빛이 제 속에 들어오는 순간 빛으로 바뀌게 마련이지. 그게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예수님과 세상(사람들)의 관계일세.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두운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히시어 사람들이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네. 세상을 평화롭게 하러 오신 게 아니라는 말씀은 어둔 세상과 더불어 융화(融和), 공존하러 오신 게 아니라는 말씀 아니겠나?"
"그렇다면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빛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불일세. 무엇 또는 어디에 불을 지른다는 말은 무엇 또는 어디를 불로 바꾼다는(불이 되게 한다는) 말과 같지. 장작에 불을 지르면 장작이 불로 바뀌지 않는가?"
"그러니까 세상에 불을 지른다는 말씀은 세상을 불로 바꾼다. 곧 빛덩어리로 바꾼다는 말씀이 되겠군요?"

 

25.거센 풍랑 속에서 주무시다니요?(마8:23-27)

 

"거센 풍랑에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나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보아야겠네. 성인(聖人)은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라, 성인은 말없이 가르침을 베푼다 하지 않았나? 예수께서는 풍랑속에서 주무심으로써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없이 가르치셨던 것일세."

 

26.마르다는 괜한 일을 한 걸까? (눅10:38-42)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은 일의 '순서'일세. 마르다가 하는 일들에서 마리아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얘기지. 육의 양식에서 영의 양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영의 양식에서 육의 양식이 나온다는 말일세.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마르다의 일이 먼저요, 마리아의 일이 나중인 것 같지만 진실은 그 반대라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앞에 두셨지. 모든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히11:3)는 진실을 잘 아셨기 때문일세. 그런데 사람들은 곧잘 이 순서를 둘러놓고 살아가거든. 인간 세상의 온갖 비극과 곤경이 바로 이 선후(先後)의 뒤바뀜에서 빚어진다고 하겠네."

 

27.몸으로 마시는 물 마음으로 마시는 물(요4:6-14)

 

"사람은 크게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겠는데, 몸도 마음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양식이 필요하다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먹어야 산다고 하셨지. 마시는 물도 마찬가질세. 몸으로 마시는 물과 마음으로 마시는 물이 함께 필요하다는 얘기지.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마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있거든. 그래서 몸으로 목이 마르면 물이 있는 곳에 가야만 하지만 마음으로 목이 마르면 언제 어디서나 있는 거기에서 마실 수 있지. 마음으로 마시는 물은 언제 어디서나 바로 거기에 있으니 목마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28.용서받지 못할 죄?(마12:22-32)

 

"예수님이 당신을 거역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행위에 결코 좌우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으시지. 사람이 성령을 모독할 수는 있지만 성령은 사람의 모독을 받지 않으신다네. 용서란 용서받을 자와 용서할 자가 마주보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 아닌가? 그러나 성령께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잘못한 자네는 있어도 자네 잘못으로 상처를 입거나 피해를 당한 상대는 없네. 용서받을 자는 있어도 용서할 이가 없으니 어떻게 용서가 가능하단 말인가?"
"아하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셨군요."

 

29.아흔아홉 마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마18:12-14)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두면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들 또한 목자 없이 헤매는 것 아닙니까?"
"비유를 읽을 때 조심할 것이 있네. 비유 하나에 한 가지 가르침이 드어 있음을 유념하는 일일세. 비유의 핵심 가르침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비유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네. 하나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의 무게를 길 잃지 않은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무겁게 여기시는 분일세.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분명하고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비유의 핵심을 바로잡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헷갈리게 하는 궁금증들을 경계하시게."

 

30.니느웨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자인가? (눅11:29-32)

 

"같은 복음이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 그대로 살아간 자에게는 구원의 열쇠가 되거니와 그것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의 도구가 된다네. 이는 마치 같은 거울이 뚱보는 뚱보로, 말라깽이는 말라깽이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네. 복음을 받아들임이 곧 생명이요, 그것을 거절함이 곧 죽음이라는 그런 말일세. 따라서 복음이 그에게 생명을 주거나 죽음을 주는 게 아니라 제가 저에게 생명을 주거나 죽음을 주는 것이라고 해야겠지." 

 

31. 심판은 무섭기만 한 것인가?(마13:47-50)

 

"자네는 공포영화 본 적이 있지? 영화를 보면서 무서웠나? 정말 무서워했어? 아니지. 사실은 무서운 영화를 보면서 즐겼네. 안 그런가? 정말 무서웠다면 돈을 내면서까지 그곳에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심판 받지 않는 자리에 있다면 심판이 두렵지 않을 것이네."
"어떻게 하면 심판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 심판받지 않으려겨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네를 심판하지 않은 터인즉, 아무리 무서운 심판이 정경이 눈앞에 벌어진들 자네가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32.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막12:18-27)

 

"귀담아 들으시게.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가운데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하나님 나라에 '죽음'이 없어. 다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알 수도 없는 여러 세계(차원)가 있고 그 세계와 세계 사이를 연결짓는 문(門)들이 있는데,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바로 그 문들 가운데 하나일세. 아브라함은 자네 말대로 오래 전에 그 문을 통과하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네. 여기 한국에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거기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것처럼." 

 

33. 슬기로운 것인가, 이기적인 것인가? (마25:1-13)

 

"열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잘못은 있음니다만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달라고 했을 때 그녀들은 매정하게 거절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이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교적 나눔이 없어 보여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만일 가진 것을 나누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비유를 지으셨다면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일세. 그러나 이 비유에 담으신 메시지는 그날을 대비하여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네. 이 메시지를 전하는 데 깨어 있어서 그날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대비시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겠나?"

 

34.예수님이 거짓말을? (요7:2-10)

 

"예수께서는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겠다 하시고는 혼자 몰래 올라가십니다. 이것은 형제들을 속이신 게 아닌가요?"
"누가 누구를 속인다는 건 뭐가 그런데 안 그런다고 하거나, 안 그런데 그렇다고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정말 올라가실 뜻이 없으셨다면 그래도 그 말씀이 '거짓말'이었다고 하겠나?"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지요. 그러나 진심이셨다 해도, 그러면 당신 말씀을 금방 뒤집으신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순간'을 살아가는 성인(聖人)의 자유로움이라네. 성인은 과거(어디서)나 미래(어디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순간의 삶'을 살고 계시는 것일세. '순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신 게 아닐까?"

 

35,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마5:1-3)

 

"가난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저 하늘과 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얘길세. 예수님 말씀으로 바꾸면 '내 뜻을 모두 비우고(버리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사는 것이지. 그런 사람이 어째서 행복한 지 그걸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36.예수님은 내 운명을 알고 계실까?(요13:21-38)

 

"물론 알고 계시지. 그분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니까. 궁금하거든 직접 여쭤 보시게나. 혹시 만에 하나, 너도 유다나 베드로처럼 나를 등질 것이라고 대답하시더라도 유다가 그랬듯이 스스로 절망하여 목숨을 끊지 말고. 비록 자네가 그분을 등진다 해도 그래도 그분은 자네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걸 믿고서 베드로가 그랬듯이 눈물로 뉘우치며 그분 곁을 떠나지 마시게. 그러면 자네도 베드로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37.'이 세대'란 어떤 세대인가?(마24:32-34)

 

오늘은 어제가 없었으면 없는 날 아닌가? 또 내일이 없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겠나? 그런데 어제 오늘 내일은 서로 동떨어진 '다른 날들'이 아니라네. 어제는 오늘의 어제요,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면서 내일의 어제요, 내일은 오늘의 내일이나까.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때는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지. 바로 이 '오늘'은 모든 어제와 모든 내일이 그 안에 들어있는, 그래서 '영원한 오늘'이라네. 2천년 전에 말씀하신 '이 세대'와 오늘 우리의 '이 세대'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같은 세대요, 그 세대가 이 세대라는 얘길세."

 

38.변모 사건은 초능력?(막9:2-9)

 

"종교인의 신비 체험에는 장차 있을 세계의 씨앗과 같은 것들이 있다네. 씨앗이 싹을 틔울 때까지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하듯이 그런 체험은 때가 되기까지 발설되지 말아야 하는 법일세. 함부로 천기를 누설하는 자는 도인(道人)이 될 자격이 없지."

 

39.닫힌 방에 들어오신 예수님(눅24:6-40)

 

"부활 사건 자체가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 아닌가? 인간의 인식은 결국 경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네. 자기 몸으로 겪을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그런 얘기지. 자네도 나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아직 아닐세. 안 그런가? 자네도 나도 아직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겪었겠나? 그러니 나로서는 자네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구먼. 혹시 누가 무슨 오묘한 말로 자네 질문에 대답을 한다 해도 자네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걸세."

 

40.십자가 사건은 모순인가?(요10:18)

 

"예수님의 죽음(십자가)은 스스로 당신 목숨을 바친 것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명(命)에 대한 복종이었네. 완벽한 능동이면서 완벽한 피동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얘길세.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모순되는 두 말을 한 입으로 할 수밖에 없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기도하셨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셨지요"
"그러셨지. 당신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뜻이었다네. 당신 뜻을 비우기로 뜻하셨다는 얘기지. 그러니 예수님은 결국 당신 뜻을 이루신 것인가, 아닌가?"
"..........?"
"양쪽 다일세. 그러니 모순되는 두 말씀을 한 입으로 하실 수밖에 없잖은가?"

 

41.'혼자'있을 수 있는 용기(막6:45-46)

 

 "군중을 꺾을 힘은 군중한테 있지 않다네. 물론 더 큰 군중의 힘으로 더 작은 군중의 힘을 꺾을 수야 있겠지. 그래서 강제로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나 그건 결코 참된 승리가 아닐세. 주먹으로 주먹을 누르면 결국 주먹만 커진 셈이니까. 군중이 스스로 무릎을 꿇거나 발길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힘은 연약해 보이는 한 사람, 그러나 혼자 있을 줄 아는 진정한 용자(勇者)인 '개인'에게 있다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군중들을 돌려보내신 게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고 혼자 되셨기 ' 때문에' 군중을 돌려보내실 수 있었던 것일세."

42. 유다가 불쌍해요.(요13:21-30)

 

"유다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자네를 이끌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지만 그에 연관된 다른 질문들(유다는 억울한 희생양인가? 예수님은 그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면서 왜 제자로 삼으셨나? 그의 영혼은 지옥에 가 있을까? 등등)은 자네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에 모두 버리게. 종교란 가장 높은 한 곳을 지향해 나가는 것인데, 물음만 있고 대답은 없는 궁금증 때문에 그 한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늘 자신을 경계하시게."

 

43.유다는 '어떻게' 죽었을까? (마27:3-8, 행1:15-19)

 

"마태복음은 배반자 유다가 自殺하기 전에 돌려준 돈으로 제사장이 밭을 샀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도행전 1장에는 그 밭을 '유다'가 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 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한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록이 나타날 경우 어느 쪽 기록이 사실인지 묻는 대신에 서로 다른 그 기록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그것을 물으시게. 과거에 대한 기록에 무슨 가치가 있다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가르침은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 그런 가르침이라네. 유다가 自殺을 했느냐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 배가 터져 죽었느냐 그런 것을 따지는 것보다 그의 죽음이 내게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묻는 것이 성서를 읽는 바른 태도일세"

 

44.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막2:8-12)

 

"예수님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는 것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가라'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고 율법학자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요?"
"비유를 하자면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당신이 과연 쌀 한가마를 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쌀 두가마를 번쩍 들어올리신 걸세. 중풍으로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결코 아니지.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사람들이 더 어려운 일은 곧잘 시도하면서 더 쉬운 일에는 엄두조차 내지 않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네."

 

45.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왜 저주하셨나? (막11:12-14)

 

"그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게 무엇일까요?"
"열매는 없고 잎들만 무성한 개인과 집단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 아닐까? 허울은 근사한데 실속이 하나도 없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의 앞날이 어찌 되겠는가?"

 

46.악마들의 입을 왜 막으셨던가? (눅4:4:31-41)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하면 하늘로부터 벌받는다는 말 들어봤겠지? 왜 그럴까 생각해 봤나? 천기란 온갖 조화를 이루는 하늘의 비밀을 일컫는 말일세. 비밀은 언제고 밝혀지게 되어 있어서 비밀이지만 그러나 밝혀질 때가 되기까지는 묻혀 있어야 하네. 씨앗이 싹을 틔우기까지 땅에 묻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땅 거죽으로 드러나면 그 씨앗은 결국 싹을 틔우지 못한 채 말라버리지 않겠나?"
"그러니까 마귀들이 에수님의 비밀을 미리 드러내어 그분의 일을 망치려 했던 것이군요?"

 

47.뭐라고 낙서를 하셨을까?(요8:2-8)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낙서하신 내용이 무엇이냔 말씀입니다."
"하긴 나도 그게 궁금해서 한 번은 예수님께 여쭈어봤네."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해 주시던가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낙서를 한 것은 기억나는데 뭐라고 썼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는 네가 낙서한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느냐? 낙서는 낙서일 뿐이다. 괜한 호기심으로 길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라.' "

 

48.어째서 눈이 마음의 등불인가?(눅11:33-36)


"등불을 밝히면 세상이 환해지고 등불을 끄면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눈을 뜨면 환하고 눈을 감으면 어둡지. 그래서 눈을 등불이라고 하신 것인데, 등불은 바깥세상을 환하게 하지만 눈은 자기 자신을 환하게 하기 때문에 눈을 그냥 등불이라고 하지 않고 '몸의 등불'(몸을 밝히는 등불) 이라고 하신 것일세. 그래서 '네 눈이 성하면'(바깥 세상이 아니라)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병들었으면(역시 바깥 세상이 아니라)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시잖는가?"

 

49.예수님은 노예제도를 인정하셨나? (눅17:7-10)

 

 "종이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물건이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라네. 목숨마저 제 것이 아닌데 다른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나?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왕이든 거지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종'과 다름없다는 사실일세.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지. 이 진실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간 이들이 바로 성현(聖賢)들이라네.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단 얘길세. 그런 사람은 간디의 말대로 '기계 부속품처럼' 자기 뜻도 없고 계획도 없고 마침내는 '나'까지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네.
예수님께서는 지금, 비참한 노예로 살라는 게 아니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나를 얽매는 마지막 사슬인 '나'로부터 해방된) 참 자유인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걸세."

 

50.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다니? (요13:6-8)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네. 당신은 '전체'시고 우리는 그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라는 말씀이시지. 나무와 나뭇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세. 만일 어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 가지는 더 이상 나뭇가지가 아니라네. 그런데 나무와 나뭇가지의 관계를 무엇이 이어주고 있는가? 섬김과 나눔일세. 섬긴다는 것은 남을 있게 함으로써 자기를 있게 하는 길이요, 서로 섬겨 모두가 함께 사는 길,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길이지.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섬김의 도(道)'라고 하겠네."

 

51.왜 제자들을 알몸으로 보내셨을까?(눅:1-6)

 

"회사 사장도 직원을 출장 보내면서 출장비를 주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냥이야 보내셨겠나? 본문을 잘 읽어보시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네. 돈이나 옷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언제 어디서나 있게 할 '능력'을 몸에 지녔거늘 공연히 짐만 되게 식량자루나 옷가지 따위를 들고 다닐 까닭이 무엇인가? 대통령이 지방나들이를 하면서 자기 먹을 양식을 싸들고 다니는 것 보았나?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먹고 입고 쓸 것들이 미리 마련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52. 참된 행복은 어디에? (눅11:27-28)

 

"참된 행복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게 주거나 내게서 가져가거나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길세. 훌륭한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에, 착한 배필을 만났기 때문에 그래서 누리는 행복은 어디까지나 조건부 행복으로, 그런 행복은 아들딸을 잃거나 배필과 헤어지는 순간 오히려 더 큰 불행으로 바뀌게 마련이지.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일은 다른 누가 나 대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이 말은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따라서 누구든지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얘길세. 성모 마리아가 복되신 것은 훌륭한 아들을 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처녀 몸으로 아들을 낳을 것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라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