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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자아의 팽창, 사랑

요한일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774 추천 수 0 2013.03.09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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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4:7-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6.10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영적 자아의 팽창, 사랑
요일4:7-12

지난주에는 우리가 성암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성취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것은, 고전 13:13에 나오는 ‘그 날’ 곧 ‘하나님의 얼굴을 또렷하게 대면하게 되는 날’을 위해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영적인 자아가 팽창되는 것입니다. 그 팽창된 영적 자아가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냐? 어떻게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냐? 하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뭘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해하기 있기 이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 하늘 위에 계시다고 생각했고, 전지전능하고(창 17:1, El Shaddai), 무소부재한 분(시 139:1-10)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브라함이 늙고 약한 처지에 있을 때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때는, 그들이 노예에서 벗어나 스스로 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서게 하는, 있게 하는) 나다”라고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던 것이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60년을 잡혀 있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새롭게 자신을 계시합니다. 이 마당에서는 ‘전능’이라든지, ‘스스로 있는 존재’라든지, ‘만군의 하나님’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아주 처참하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맥없이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하나님 이해가 필요 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하나님을 표현 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어서, 상황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왔다 갔다 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본문 10절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자기중심적이고, 부분적인 것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영적 자아가 팽창된 상태입니다. 나를 벗어나 우리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하나님 이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해와는 다르죠?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의 뜻은 뭐가 될까요? ’전능‘의 반대는 뭔가요? 무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무능하시다‘는 것입니다. ’무능하다‘는 말을 하나님에게는 할 수 없으니까 바꾸면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도 안 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거, 그게 뭡니까? 사랑 아닙니까?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십자가 밑의 병사들이 “네가 메시아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했을 때 하늘의 군사를 동원하여 왕으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는,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뜻대로 못하는 게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진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고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남편을 살해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범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체 비밀에 붙이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딸이 찾아와서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하면 어머니가 정당방위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입을 닫고 아무소리 없이 감옥살이를 합니다. 어머니가 법을 모르고 말을 할 줄 몰라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상황을 말 못하는 게 아닙니다.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남편이 딸을 성 추행하려던 그 순간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그걸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어머니가 살기 위해 그 사실을 말해 버리면, 그 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 걱정이 된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감옥살이를 하고, 영원히 비밀로 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사랑과 연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게 사실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음으로 ‘전능’을 능가하는 ‘사랑’을 선언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주 “하나님,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소서”라고 합니다. 이는 신명기 32:10 말씀인데, 몸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듯 이스라엘을 그렇게 소중히 지켜 주신다는 뜻이죠.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이 감시하는 큰 눈동자처럼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뜻으로 오해를 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감시자 또는 형리(刑吏)의 이미지로 일그러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노래 가운데 “예배시간에 떠드는 아이(장난꾸러기) 예수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까... 아니 아니 안 돼요. 예수님이 화내실 거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한 감시자로 만드는 노래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노래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꾸만 죄의식을 키우게 되는 거죠.

월현리 1387번지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사과 상자로 만든 토끼장이 있었습니다. 거기 암수 한 쌍의 토끼를 길렀는데, 아카시아 꽃이 흥청흥청 필 때였습니다. 토끼가 자꾸 입으로 자기 털을 뽑아서 자리에 깔고 그러더니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습니다. 새끼들 모습이 하도 궁금해서 토끼집을 가끔 들춰 보았는데, 그래선지 새끼들이 다 죽었습니다. 어른들이 설명하기를, 불안해진 어미 토끼가 새끼들을 물어 죽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가만히 덮어두었으면 시간이 지나고 예쁜 새끼 토끼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잘 모르고 조급하게 열어본 것이 후회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는 창녀, 간음한 자, 반역자, 세리, 죄인의 비밀을 묻어주고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 압니다. 알면서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번번이 죄인으로 정죄하고 따돌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비밀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들은 현미경으로 보듯이 그들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면 자신도 판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눈의 티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하셨습니다. 간음죄로 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치셨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나는 그것은 못 한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못하는 게 있어야 하는 겁니다.

늘 비유로 가르치신 것도 그렇습니다. 비유는 분명하게 말하는 대신 약간 감추는 방식입니다. 전지한 존재 같으면 한 마디 말로 깨달음을 주어서 명령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시는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진정한 이웃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스스로 깨닫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숭고한 하늘의 진리를, 잃은 양, 잃은 돈, 장사꾼, 누룩, 씨 뿌리는 농부 등등 가장 평범한 단어들 속에 담으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뜻이 무식한 농부와 잇속 차리는 장사꾼의 삶에서 나타나게 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는 이런 식으로 평범한 것들, 작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만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 때,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뵈면 죽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다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도망을 가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 139:1-10).

그런데 본문 12절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떨어져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겁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살과 피를 지닌 인간으로 오셔서 스스로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1절). 그 사랑의 방식도 이미 정해졌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전능’을 버리고, 못하는 것 많은 사람, 안 하는 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전지’를 버리고 모르는 게 많고, 알아도 말 못하고, 덮어주고 비밀을 간직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율법 전문가이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드는 가시 돋친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소외된 작은 사람들에게 “세리와 죄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술꾼, 먹보, 귀신들린 자” 등등 악의적 칭호들을 갖다 붙였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면 왜 안식일에 고치느냐고 트집 잡고, 흥겹게 잔치를 하면 왜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을 안 하느냐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을 하니까 이번에는 그가 귀신이 들렸다 하고, 예수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시니까 바알세불에 지폈다고 모함을 하였지요. 영적인 자아가 팽창되지 못한 사람들은 이래도 탈이고 저래도 탈입니다. 이것도 불만이고 저것도 불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고 싶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는 기도는 자꾸 하나님을 먼 곳으로 밀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잘난 체 하는 게, 남을 깔보는 게, 남을 나쁘게 말하는 게, 우리의 생체 유전자 속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또렷하게 보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 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 이라면, 그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그 사랑이라는 게 ‘할 수 없는 일도 있는’그런 것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살면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계신다는 말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모든 것의 으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믿음의 과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하지 못하는 게 많은’그런 삶을 살면, 영적 자아가 팽창됩니다. 그가 사랑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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