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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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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12.16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불확실의 시대, 불안으로부터 탈출
시편43:1-5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천국에 갔답니다. 집사님이 들어오니까 예수님께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며 고생했다고 천사들을 시켜 좋은 음식을 대접하더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까 목사님이 들어왔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 기쁘게 맞이해 주는데 천사들을 시켜 음식은 대접해 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물었답니다. “아니 예수님, 우리 목사님 우리는 식당에서 먹어도 늘 당회장실에 차려준 음식을 드셨는데 천국에서 이런 대우를 합니까?”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세상에서 잘 대접받고 왔지 않느냐? 그래서 목사는 여기 천국에서는 셀프 써비스니라.” 조금 후에 대통령을 지낸 장로님이 천국에 들어왔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지 않고 본체만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접을 받은 집사님이 물어보았답니다. “왜 대통령을 지내신 우리 장로님이 오셨는데 일어나 반갑게 맞이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일어나면 제는 내 자리에 앉으려고 하니까 그런다.”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력욕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권력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이며 그 밑바닥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니체는 "이 의지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며 삶의 근본 충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주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각 정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권력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정치는 일체의 도덕 ·종교에서 독립된 존재이므로 일정한 정치목적을 위한 수단이 도덕·종교에 반(反)하더라도 목적달성이라는 결과에 따라서 수단의 반(反)도덕성 ·반(反)종교성은 정당화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보수와 진보라는 색깔론과 지역감정, 아니면 말고, 너죽고 나살자 식의 인신 공격적 네가티브 전략을 사용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갖가지 편법과 불법을 사용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 권력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권력욕은 예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입법, 사업, 행정권을 가진 절대적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들 암논이 배다른 딸 다말을 겁탈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반역하여 아버지를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첩을 겁탈합니다. 노년에 당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살다가 적장 골리앗을 이기고 단숨에 모든 백성의 시선을 끄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왕이 되었고 명예와 권력 부를 한 손에 쥐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살기 위해서 모든 것 내버려두고 왕궁에서 맨발로 도망 나왔습니다. 인생 말년에 명예도 돈도 권력도 다 잃어버리고 생명까지 위태로운 인생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 것입니다. 쫓기는 몸입니다. 실패하고 파산되고 밑바닥에 떨어질 때에는 항상 최악의 경우입니다. 권력도 명예도 돈도 다 잃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아들이 보낸 암살자에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오늘 이 시편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다윗이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럴 때 찾아오는 대표적인 정서가 무엇이겠습니까? 불안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 불확실한 미래 앞에 찾아오는 대표적인 정서가 불안입니다. 존재의 위협을 당할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서입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대한 불안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갑자기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불행한 환경들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태풍이 다가올까 불안해하고, 운전하는 사람은 갑자기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난 보도를 보면 유학을 보낸 부모들은 내 자식도 그런 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부도가 나지 않을까, 직장인은 실직을 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무서운 질병에 대한 보도만 들어도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주위에서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만 들어도 불안해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잘못하여 비난을 받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불안해합니다. 심리학자들은 현대를 일컬어서 "불안의 세대(the age of anxiety)"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롤로 메이(Rollo R. May)는 "불안은 이 시대의 가장 절박한 문제"라고 합니다. 2월 14일자 시사저널을 보니까 “불안 도미노처럼 번지는 이 시대의 암”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불안(不安)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0대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20대는 취업, 30대는 결혼, 40대는 노후, 50대는 고립, 60대 이상은 건강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면연되어 있는 이 시대의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하여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5)
불안을 탈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이라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어떤 일에 걱정이 되어서 늘 마음이 긴장되어 편치 못하고, 초조하여 감정이 압박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면 불안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구들, 위협, 위험, 자존심, 분리, 갈등, 두려움, 적의, 생리적 기능, 개인차 및 성격 그리고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다. 그 원인에 따라 불안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기독교 교육학자 루이스 쉐릴은 (Lewis Joseph, Sherrill)은 다른 학자들의 여러 가지 이론을 종합 정리하여 불안의 종류를 크게 셋으로 구분합니다. 즉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정상적 또는 실존적 불안(Normal or Existe-ntial Anxiety)과 초기의 정서와 무의식에 근거를 둔 비정상적 또는 신경증적 불안(Abnormal or Neurotic Anxiety) 그리고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자아의 위협을 경험하는 상황적 또는 환경적 불안(Situational Anxiety)으로 구분합니다.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도덕적 불안은 당연한 것입니다. 빈센트 (Merville D. Vincent)가 말한 과거로부터 오는 불안은 당연한 것입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갈등, 경험, 기억, 실패 등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감 일, 시험, 대인 관계에 직면에서 오는 현재 불안도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는 미지의 가능성의 위협에 대한 미래적 불안도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현실적인 불안(Reality Anxiety)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불안 (Neurotic Anxiety)입니다. 실제로 불안을 느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아가 본능적인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므로 해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은 위협을 느껴서 불안에 사로잡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불안이 아니라 불안,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만성적 불안입니다. 심한 신경증적 불안은 주의력이 감소되며, 집중을 어렵게 하고, 기억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의 몸은 항상 건강을 유지하려는 강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생리학자 캐논이라는 이것을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하였는데 불안을 느끼게 되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질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심신 상관(心身 相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육체와 심리 활동은 상호작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의학에서는 이것을 “PNI & E(Psycho-Neurology, Immunology & Endocrinology)”라고 합니다. 심리, 신경, 면역, 내분비 등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쌓이면 식욕이 없어지고, 놀라거나 무서운 일을 당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울프라는 의사의 실험에 의하면, 불안감은 위장 내 혈액순환 및 위 운동을 급작스레 증가시키고 특히 위액분비를 현저히 증가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위액분비로 인해 위벽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소화장애, 위염, 소화성 궤양 등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의 벤슨(Benson) 교수는 "질병의 60%-90%는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즉 신경성인데 그 원인은 삶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불안이 커다란 주범임이라는 것입니다. 존스 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의 심장내과학 교수인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불안한 상태에서 1년 3개월 이상 노출되면 92%가 심장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깊고 느린 복식호흡으로 불안과 긴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벤조디아제파인(Venxodiazephain), 리브리움(Librium), 바륨(Valium) 같은 신경 안정제나 항불안제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치료법이 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불안을 탈출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대하며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미래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혼할 수 있을까? 합격할 수 있을까? 취업이 될 수 있을까? 노후 생활이 안정적일까? 건강할 수 있을까? 빚을 갑을 수 있을까? 사업에 성공할까?” 이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키를 가지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한나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삼상 2:6-8)” 어떤 상황에서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불안해할 것이 아닙니다. 존재가 위협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내일도 절망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고 사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나타나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방치해 놓고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불안해하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대부분 사람들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있는 능력 있을 때는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내가 힘이 없으면 사람들은 나를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우리의 도움이 되신 분이십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도망다니면서 얼마나 불안해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다윗을 도와주어 죽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쫓겼지만 다윗은 그것으로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아주어 다시 왕권을 회복하였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사41:13)”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121).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2.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1-3).
사람이 불안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힘이 없어 아들에게 쫓겨난 것입니다.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안합니다.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안합니다. 질병에 걸렸는데 질병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안합니다.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있으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힘이 없어 낙오자나 실패자가 되고 세상의 왕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입니다. 능력이 없어 경제 불황, 실업률 증가, 구조 조정 등의 어두운 사회현실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힘이 없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잃을까봐 불안해합니다. 힘이 없어 관심의 대상에서 살아질까봐 불안해합니다. 매력을 잃어 인정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합니다.
스위스 출생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돈=능력’인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경제적 부가 인간의 불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 불안은 경제적 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불안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기 전의 일이랍니다. 하루는 BBC방송과 인터뷰하기 위해 택시를 잡고 운전기사에게 급히 방송국까지 가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기사는 "미안하지만 손님,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조금 후면 처칠 경의 특별방송이 있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움직이려고 합니다."고 대답했답니다. 기분이 좋아진 처칠은 "거금"을 집어 주었답니다. 그러자 기사가 시동을 걸며 말했답니다. "손님,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부터 벌고 봐야겠습니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수의 체면도, 변호사의 체면도, 정치인의 체면도 종교인의 양심도 필요 없습니다. 자식의 정도, 부모의 정도 필요 없습니다. 돈이 우리의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실직한 부부가 돈 문제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내가 벌어다 주는 돈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 가정이 여기 있지도 않았어!" 부인이 맞받아쳤습니다. "맞아요. 그 돈이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 안 있어요." 돈이 있을 때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돈이 달아날 때 힘도 함께 달아납니다.
경제적 부가 인정을 받게 하고 경제적 부가 지위 상승을 가져오게 하고 경제적 부가 존경을 받게 하는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넓혀주고 가난은 곧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되고, 그는 더 이상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처럼 취급되어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불안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기독교 상담 심리학자인 로렌스 크랩 (Lawrence J. Crabb)은 불안의 발생 원인을 목표에 이르지 못한 행동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목표에 이를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욕구와 필요가 생기면 그것을 이루려는 동기가 발생하고 기본적인 가정을 만들어 목표를 향한 행동을 하지만 능력이 없어 목표에 이르지 못하면 불안하고 그것이 발전되면 신경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 욕구로서 생리적인 욕구, 외부 환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호받으려는 욕구, 애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 성취의 욕구 등이 채워지지 못하면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안을 해소할 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욕구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은 욕망의 하녀" 라고 말합니다. 욕망이 있는 한 불안은 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인기와 명예가 있다고 해서 인간의 불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욕망하는 한 불안은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욕망의 성격을 '구멍 난 술통'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가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필요를 적합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고 불안에서 탈출케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아옵니다. 돈에서도 권력에서도, 명예에서도, 아름다움과 인기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힘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골리앗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울 왕 앞에서도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들에게 쫓겨난 절망적인 순간에 힘이 되신 여호와를 의지하며 불안에서 탈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여호와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시인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 무능함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되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판단하여 주십시오. 신의가 없는 나라를 고발하는 내 송사를 변호하여 주십시오. 거짓을 일삼는 저 악한 사람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표준새번역)” 불안의 늪에 허우적거리거나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신실하심을 나에게 보내 주시어, 나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 주님이 계시는 그 곳으로, 나를 데려가게 해주십시오.(시43:3 표준새번역)” 하나님 말씀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우리의 힘이 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의 근원이시고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3.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찬양함으로 나의 즐거움이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4)
불안은 위협이나 범죄, 전쟁, 광포한 날씨, 설명할 수 없는 질병 등과 같은 위험, 자존심의 침해, 갈등, 공포, 스트레스 등으로 오지만 프란시스 세이퍼(Francis A. Schaeffer)는 불안의 원인을 관계 단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이웃과 자연과의 단절 등으로부터 불안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분리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토 랜크(Otto Rank)는 한 때 모든 불안은 분리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 즉 소외, 이동, 죽음 그리고 이혼 또는 그 밖의 혼자 된다는 것은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분리불안입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분리 때문입니다.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따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친구에게, 직장에서 따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리 단절을 신학적인 의미에서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을 죄와 연관해서 죄책감을 불안과 동일시하였습니다. 죄가 증가함에 따라서 불안도 증가된다고 본 것입니다. 개리 콜린스(Gary,R.Collins)는 불안을 "비신앙적 대표적인 감정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의 심리적인 상태"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인 오츠 (Wayne E.Oates)도 마찬가지로 불안은 죄와 연관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보고 죄를 자백함으로써 실제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를 통해서 관계 단절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의 해소를 위해서 죄의 회개와 하나님으로부터 속죄를 받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롤로 매이(Rollo May)도 불안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써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심리 요법의 마지막 근본 문제는 신앙이 아니면 대답할 수 없다고 그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불안에서 어떻게 탈출하고 있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갑니다. “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들이 배신하고 떠나고 명예도, 권력도, 돈도, 인기도 다 떠난다하여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어떤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7)”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 올 때 분노하고 책망하고 징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 나의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두 다 떠난다 하여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노년에 감옥에 갇히니까 사람들이 바울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7-18)”
우리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내 가장 큰 기쁨이신 하나님께서 나아가렵니다.” 그 하나님께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기뻐하면서, 수금으로 주께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찬양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분리되고 소외되어 불안할 때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신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불안 버리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최주연 의사가 쓴 책입니다. 불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말하면서 “불안과 두려움도 생각을 바꾸면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어떻게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지 모르고,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안할 때 깊고 느린 복식호흡으로 불안과 긴장을 조절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노출을 통한 불안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노출하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노출하라고 합니다.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노출하라고 합니다. 반복해서 노출하라고 합니다. 자꾸 말하게 하면 불안도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불안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찬양을 통해 노출하는 것입니다. 불안할 때 더욱 찬양하면 불안이 떠나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 보아도그어느 것 하나 주의손길 안 미친 것 전혀없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마음속에 불안이 있는데 어떻게 찬송하라는 것입니까라고 생각하는 성도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할수록 찬송해야 합니다. 내 문제와 불안의 걱정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여 창세전에 부르신 하나님은 나의 미래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기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17여 년 동안 공포와 불안한 세월을 도망다니면 보냈지만 시편에 보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불안에서 벗어납니까?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다윗만큼 힘들겠습니까? 문제 앞에 불안할 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찬양합니다. 길을 알지 못하고 불안할 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영영부를 나의 찬송 예수인도 하셨네" 찬양합니다. 기쁨이 없고 불안하라 때 "내 맘에 한 노래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찬양합니다. 찬양할 때 불안은 썰물처럼 밀려가고 평강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불안하십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5)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1-3).
우리가 불안에서 탈출하려면 찬양함으로 나의 즐거움이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4)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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