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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4: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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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4장 12절-24절.
12절-24절: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우리가 12장에서 자체구원에 대한 기초 작업을 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 말씀을 하신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면 구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그 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함을 거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의지구원이라든지 선택구원이라든지 예정구원이라든지 그러한 면을 모르면 궁극적 결과적 영원적 구원도 모릅니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선택을 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으로 중생을 입혀서 천국에 가게 했다’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말이 맞느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그게 성경에서 진하게 말하고 있는 그 구원이냐?
지옥에 가게 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천국에 가게 했다고 하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으나 이렇게 되면 뭐가 빠지는가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어진다 그 말이요. 이해 가지요? 이게 아주 중요한 거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를 붙이지를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했다면 어디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시작을 해야 되겠느냐? 상당히 어려워지지요?
우리 인간은 미련한데 ‘해는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기울어진다’, 또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하는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을 하지요. 말하자면 인간 보기에는 꼭 그렇게 보인다 그 말이요. 물론 과학적인 의미에서는 다른 말이 되겠지만 ‘아침 해가 떴다. 서쪽으로 해가 진다’ 하는 건 해가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또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차 안에 있는 나는 가만있는 것 같은데 나무가 막 뒤로 지나가지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의 눈은 절대 정확성이 없다. 인간의 의지도 그렇고.
사실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해서 돈다고 하는 게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지만 이게 우리에게 자연계시로 보여주는 것도 맞는 것 같아요. 즉 세상이 주님을 중심해서 돌아간다고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떠나라’ 하신 그 분은 무한 절대자이시고 지혜자이시고 지선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고, 또 우리 인간을 지혜지식적 도덕적 능력적 온전자로 만들기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가운데 두신 겁니다. 이게 간단한 지식이지만 아예 이렇게 기초적인 신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이 다 풀려나가요.
만물의 창조의 목적이 뭐냐? 우리의 구원을 입히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인간창조의 목적이 뭐냐? 궁극적 결과적 목적적 영원적 구원이다. 만물창조의 목적, 또 인간창조의 목적. 믿는 우리로 자체구원을 입히기 위해서 나를 만물 가운데 두었다. 그러니까 자체구원은 왜 입히느냐 하면 천국은 누리고 느끼고 활동을 하고 하는 곳인데 그 천국에 간 사람 모두가 그 천국을 누림에 있어서 동등이 아니고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아멘이시요’ 하고 나오지요? 역시 그 말씀이, 그 주님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각 교회마다 나타나신 그 주님이 미래적으로 그렇게 나타나신다 그 말이요, 현재적으로 그렇게 나타나신다 그 말이요? ‘요한계시록’ 그러니까 자꾸 말세 미래만 생각을 하니까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그 주님도 미래적으로만 그렇게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게 아니라 현실이란 말이요. 현실에서 그렇게.
그러면 아멘이 뭐요? 뭐라고요? 요한계시록에 뭐라고 그랬지요? ‘아멘’ 그 말씀하기 전에 ‘창조의 근본이요’ 하고 나오지요. 창조의 근본이 뭐요? 글자 그대로 보면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러니까 그 근본을 놓고 하나님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의지적 근본이 그 주님과 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바로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게 아멘이라 그 말이지요. 그런 사람으로 되는 거, 만들어지는 게 아멘이지요.
우리가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개인적 타락과 기독자의 타락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된다. 타락을 구별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 타락과 기독자의 타락을 구별해라.
그리고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산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건데 천국에 저축된 것만 자기의 소유다. 이걸 갖다가 소유구원이라 한다. 천국에 이전등기해서 올려진 것만 내 것이다. 그 면에서 소유구원이라.
저축의 종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요. 경제도 시간도 정력도 생명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을 깨닫고 나면 자기 신앙에 정평 정가 정립 정돈 정리가 되어 나옵니다. 가치판단이 나오는 거요. 이제 그렇게 되니 물질과 사람과 사건과 진리가 병행돼서 나올 때에 가치판단이 빨리 나온단 말이요.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사관계 대물관계가 바로 된다.
선이라고 해서 다 선이라 할 수 있느냐? 독립적으로 있을 때는 선이지만 마찰이 생기게 되면 선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찬송 부르는 건 선이지요? 혼자 있을 때 찬송 부르는 건 선인데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막 찬송을 부르면 그게 선이요? 그건 선이 아니지요. 그런 경우는 이제 악이 되는 거지요.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정리정돈을 못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적 가르침에는 성도로 하여금 정리정돈을 못하게 합니다. 그게 마귀의 수법이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세상을 자랑하듯이 가르치는 자가 세상을 가지라고 자랑을 하면 그건 마귀의 축복으로 돼 있는 거요. 이러면 신앙성분에 정리정돈이 안 되고, 또 신앙이 정리정돈적으로 자라지를 못해요. 그건 결국 악이에요. 교훈적인 측면에서의 악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대악에서 대선으로 나가게 하고, 악령은 대선에서 소선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구별이 어렵지요.
우리 기독자들은 설교자도 그렇지만 ‘하나님, 나, 너’의 관계가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언제든지 삼각관계. 그렇지요? 아브라함은 앞서 말씀드린 이런 등등의 이치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자기의 수권범위 내에 있는 것을, 육의 것을 영에게로 이전등기 한 겁니다.
어느 날 목자들이 찾아와서 롯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가 싸운다고 보고가 들어왔지요? 이 때 아브라함이 정평 정가 정리 정돈이 안 됐다면 롯과 대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취하든지 그 선택권을 롯에게 준 것은 아브라함이 대선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마음속에는 그 틈을 타가지고 요단 들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거지요. 롯은 평소에 들었던 마음대로 ‘잘 됐다’ 하고 기뻐했지요.
우리는 창세기에서 심판을 볼 수 있는데 홍수심판을 볼 수 있고, 소돔 고모라성의 불심판을 볼 수가 있지요? 육본주의로 산 자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부요나 행복이나 존영이나 안식이나 모두 지상저축 소유주의로 사는 게 육본주의입니다. 아브라함은 천국저축 소유주의에 정력을 쏟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롯도 다 같은 셈족입니다. 다 똑같이 하나님 제일목적이고 하나님의 택자요, 하나님도 같고, 거주지도 같았고, 같이 출발했고, 같은 코스였고. 그런데 뭐만 달랐지요? 주의(主義)가 달랐단 말이요. 주의가 달라. 다 똑같은데 주의가 달라. 롯은 육본주의란 말이요. 롯의 기도는 요단평야 달라는 거, ‘믿고 구하면 소돔성도 준다’ 그렇게 나가고,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미 주신 이걸 기회가 되면 저축을 하고 간다’ 하는 겁니다. 판이하게 다르지요?
아마 롯은 목자들을 충동해가지고 요단 들을 가질 운동을 꽤 했을 것 같아. 그래, 결국 절반은 응답된 셈이지요. 다 주실 줄 믿고 간구를 했는데 절반은 주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믿고 나가면 된다는 식이지요.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이 말은 절반만 가지라는 뜻입니다. ‘주려면 주고 말려만 말라’ 하는 것은 절반이요, 전부 다요? 전부 다. 다 갖겠다는 뜻이지요?
롯은 사람이고 요단평야는 물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경우에 요단평야가 아까워서 안 뺏기려고 하면 롯을 잃어버린다 그 말이지요. 물질을 안 뺏기려고 하면 롯을 빼앗긴다. 사람 빼앗긴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물질과 사람이 병행해 올 때는 물질을 버리고 사람을 잡아라.
롯은 요단 온 들을 택해서 하루아침에 다 차지했으니 믿는 대로 기도대로 소원대로 큰 축복을 받은 셈이 되겠습니다. 육본주의자로서는 이건 큰 축복이지.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진리 진리’ 하다가 다 빼앗겼습니다. 물질 다 날아갔습니다.
그러면 누가 복을 많이 받았느냐? 롯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축복 받고, 아브라함은 진리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빼앗겼다고 봐진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빼앗겼다’ 그렇게 생각질 않고 ‘천국에 저축했다’ 이렇게 생각이 돼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렇게 생각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서 갈라지는 겁니다. 알겠어요? ‘빼앗겼다’ 하면 누가 되지요? 롯이 되고, ‘저축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되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진리 진리’ 하다가 물질이 다 날아갔어요? ‘진리 진리’ 하다가 물질이 다 날아갔어.
우리가 육본주의로 믿어갈 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할 때는 뭔가가 조금 되는 것 같더니 ‘진리 진리’ 하고 나갈 때에는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면 ‘내가 이렇게 믿는 게 진짠가’ 그럴 거 아니요? 참 말이 쉽지 실질적으로 그렇게 당해놓으면 참 착잡할 거야. 안 그럴까?
진리가 좋다고 하더니 진리대로 안 한다고 떠나가는 교역자들 내가 많이 봤거든요. 왜 그러냐? 나의 행동을 보고. 그러니까 내가 ‘진리 진리’ 하는데 상대가 보기에는 내가 냉대스럽고 고약하게 보이는 점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요. 그럴 때에 내가 진리대로 안 한다고 떠난단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진리를 보는 기준이 그렇다 그 말이지요.
여러분들은 그런 소리 들을 때는 바로 듣지 말아요. 그 사람의 개인적인 면에서 고약한 그런 것은 그 사람이 성품적인 면에서 그런 것이고, 진리의 노선을 가는 그 신앙은 진리적 신앙이다 이렇게 봐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성화구원적으로 사람이 만들어져가는 면에는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또 교역자가 7계명을 범했다 그랬을 때에 그 교회가 ‘이단이니 삼단이니’ 그렇게 하지 말아요. 그게 그만 중심 척도가 돼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 버리면 안 돼. 문제는 ‘그 사람이 신앙사상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그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볼 때 다윗도 악랄한 죄를 지었지요? 그러나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른 노선으로 돌아온 자는 하나님께서 반겨주시고 그러는 건데, 인간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대해주더라’ 하는 그것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넘어져요.
아브라함의 경우 롯에게 한 행동 방편을 보면 우리가 이유를 붙이려면 얼마든지 이유를 붙일 수가 있지.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너는 저 쪽으로 택하라’ 그랬으면 될 텐데” 하고 이유를 붙이면 한이 없지.
아브라함은 헤브론 산골로 가고. 산골로 갈 때에 하나님도 같이 가는 겁니다. 롯은 요단평야에 대궐을 가지러 가고. 그러나 롯의 경우는 물질을 차지하느라고 하나님을 빼앗겼고, 아브라함은 물질은 빼앗겼지만 하나님을 차지하고.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사사건건이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진리를 갖자니 물질을 빼앗기고, 물질을 갖자니 진리를 빼앗기고. 진리 빼앗기면 그건 하나님 빼앗기는 거요. 우리는 불신자들처럼 겉으로만 보고 계산하지 말고 아브라함이 보는 그 이면적인 거, 즉 천국에 저축을 하고 하나님을 독차지 하는 그 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사람 물질 사건 그런 걸 잘 정평 정가해서 걸어가지요?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시지요. 그 동서남북 속에는 롯에게 준 땅도 들었을까요, 그 땅은 외일까요? 예, 그 안에 다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빼앗긴 것 같은데 빼앗긴 게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동서남북의 그 온 땅이 롯이 가져간 땅의 몇 배나 될까요?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동서남북’은 물질에 관한 거고, ‘네 자손’은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물질을 물질의 가치만큼 알았으니 그 물질을 다 주고, 사람을 사람의 가치만큼 알았으니 사람을 다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치를 아는 자에게 준다 그 말이요. 알겠어요? 우리는 가치평가를 바로 해야지요.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면 소중한 것을 줍니다.
‘동서남북을 종과 횡으로 행하라’: 이걸 땅으로 보면 안 됩니다. ‘대신관계를 바로 하고, 대인관계를 바로 하고, 대물 대사관계를 바로 하는 그 면으로 종과 횡으로 행해봐라. 진리 붙잡고, 사랑 붙잡고 그렇게 하면 너와 관련되는 것은 다 붙잡을 수 있다. 관련되는 것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많던 적던 오직 종과 횡으로 행해봐라. 그러면 너에게 다 주겠다.’
종, 그러니까 하나님 또는 진리 그 면을 버리고, 횡, 그러니까 사람을 버리면 정복이 안 됩니다. 알겠어요? 밟는 땅이 뭐냐? 너와 상관되고 접촉되는 모든 것. 도전해오는 것 전부는 다 너에게 주겠다. 밟는 땅 족족 모두.
헤브론 산골에서 늙은 노인이 살자니 얼마나 고통이 될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조카가 괘씸할 테지.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이나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13년째에는 바치지 않고 14년에는 배반을 하니 네 나라가 연합해서 소돔 고모라를 공격해서 들어왔습니다.
롯과 그 외의 모든 백성들이 포로가 되고 물질을 빼앗기고 한 그런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보고가 됐을 때에 아브라함이 정평 정가 정립이 안 됐다면 ‘그러면 그렇지. 제가 나가서 얼마나 잘 되려고’ 하며 롯이 재앙 만난 것을 아주 고소하다고 그럴 테지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그랬지요? 아브라함이 좋아라 그랬어요? 남이 재앙 만난 걸 보고 좋아라 그러면 그 재앙이 자기에게 올 수가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브라함이 롯이 포로로 잡혀간 것을 보고 어떤 진리를 써야 되느냐? 어떤 진리의 행동으로 나와야 되느냐? 첫째, 걱정을 한다? 두 번째, 기도한다? 세 번째, 가서 데리고 온다? 어느 게 진리요? 그래, 첫째나 두 번째나 다 선 아닙니까? 선은 선인데 소선이지. 그것보다 더 좋은 선은 대선이란 말이요.
그 전쟁은 우연적으로 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어나게 한 겁니다. 롯을 보니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전쟁이 일어나야 하겠다는 식으로 보일 테지만 첫째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일어났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이치를 써먹게 하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켰다 그 말이요. 참 멋있잖아요? 두 번째는 성도를 위해서. 인과법칙적으로 만고불변의 진리인 ‘이런 원인은 이런 결과가 온다’고 하는 거. 그렇게 살면 그런 결과가 온다.
세 번째는 롯을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다. 그러니까 롯은 자기를 보고 지금 자기의 신앙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군대들이 와서 롯이 삼촌으로부터 요단평야를 빼앗아 가려하니까 롯이 ‘이 놈들아, 내 것이다. 왜 뺏어가느냐’ 할 거 아니요? 그러니까 군대들이 ‘자기 삼촌 거 빼앗아 가지고는 무슨 말이냐?’ 한단 말이요. 우리는 천국에 저축한 것 외에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야 돼요. 소돔성에 전쟁 나면 모두 빼앗깁니다. 조만간에 빼앗길 거, 조만간에 없어질 겁니다. 예수님이 도적 같이 온다고 그랬으니까.
롯이 요단평야를 가지려고 할 때에 아브라함은 빼앗기는 입장에 있으니 롯의 입장에서 볼 때에 아브라함의 그러한 마음을 좋다고 그렇겠어요, 나쁘다고 그렇겠어요? 좋다고 하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빼앗겼던 주던, 주는 아브라함의 그 마음은 새사람이요, 옛사람이요? 새사람. 그렇지요.
어느 것이 나를 위해주는 것 같으냐? 아브라함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보면 대내전에서 이긴 거지요. 롯을 경우는 진 거지요. 빼앗았지만 진 거지요. 롯은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새사람은 대내전에서 졌습니다. 그러니까 새사람은 옛사람에게 포로된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요. 소돔전쟁에서 포로 되기 이전에 벌써 롯은 요단평야에서 포로가 됐단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걸 보고 경험을 하는 건데, 경험이 빠를수록 회개도 빠르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 이 진리 깨달아가지고 많이 써먹습니까? 잘 생각을 해 보세요. 가만히 있으면서 자기가 포로 되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 빨리 빨리 그걸 알아야지요. 우리 기독자는 그 면에 대해서 빨리 빨리 알아차리고 새사람이 확장되도록 살아야지요.
선(善)이라면 남을 시키는 것보다 자기가 하는 게 좋다. 자기가 하면 수입을 보지요? ‘기도는 네가 하고 싸우는 건 내가 하마’ 그럴 정도로. 기도하면서 구해달라고 하는 것은 약한 거지요? 아브라함은 전쟁을 누가 했습니까? 자기가 나간 거지요. 믿음으로 금식기도 한다고 그러면서 이루어 달라고만 하고 자기 자신을 안 드리는 건 큰 잘못입니다.
생사문제는 하나님의 예정에 맡기고, 성공 실패 성패문제는 하나님의 의사에 맡기고,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이 승패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이롭게 되겠느냐 해롭게 되겠느냐, 나에게 이익이 오겠느냐 손해가 오겠느냐’ 하는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겨버리고 나는 다만 이 길로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긴 것을 대개는 ‘기도하고 318명을 데리고 나가서 싸워서 이겼다’ 그렇게 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믿는 사람이니까 기도를 안 했겠어요? 어쨌든 옳은 신앙의 사상만 가지면 그 사람은 사상화 된 그 정신 그 뭉테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속에는 기도도 들어있는 거지요. 그러면 기도는 왜 합니까? 진리로 사상화 되려고 기도하는 거지. 사상화 됐으면 하나님이 같이 하는 거지. ‘이 길 가다가 죽으면 죽는 거고’ 하고 가는 것뿐이다. 318명을 데리고 가다가 ‘아이고, 이 4대 연합군을 어떻게 당하느냐?’ 한다면 이건 벌써 지고 들어가는 거지요.
그 전쟁은 하나님이 청부를 맡은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뒤를 살살살살 따라 가십니다. 4대 연합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부어라 마셔라. 우리가 5대 연합군을 쳐부숴서 이겼으니 누가 우리를 당하겠느냐’ 하고 진탕 먹고 잠을 자다가 습격을 당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3대로 나누어가지고 돌격전을 펼친 거지요.
그 때 그 군대의 무리들이 술을 먹고 잠을 자다가 갑자기 습격을 당하니까 정신이 없어서 네 편, 내 편이 없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겠기에 칼을 마구 휘두릅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 싸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가 원수들을 쳐서 없애나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보는 아브라함의 군대들은 적군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거든. 결국 이 싸움은 하나님이 하신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영웅 되게 만들어 주려고 소돔성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여러분들도 진리이치를 깨달았으면 빨리 써먹고, 선을 하되 대선을 하고, 남에게 미루지 말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대선이다’ 하고 그 길로 나가는 것. 얼마나 멋있는 신앙이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들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진리이치를 구원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도 우리의 생활에서 아브라함처럼 소선이 아닌 대선을 가지고 구원목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소선보다 대선을 향해서 남에게 시키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것. 하나님 앞에 사랑을 독차지하고 갈 수 있는 귀한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대선을 행하고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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