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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에배소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828 추천 수 0 2013.03.13 13:32:49성경본문 : | 엡5: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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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4월 3일 설교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에베소서 5:8-14
1.
지난 주간에 있었던 부흥회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강사 한 사람에 대한 회중 다수의 반응과 평가는 같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참석했던 분들이 받은 영적 충격은 매우 강했고 또한 깊었습니다. 순수하고 뜨거웠던 1세대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마치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어느 교우께서 다른 교우들에게 보낸 글의 일부를 전해 드립니다.
이번 부흥회 기간, 쇠망치로 한대 맞은 기분입니다. 선배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들으면서 대한민국 출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였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저의 믿음이 너무도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수저를 팔목에 동여매고 돌을 깨뜨려 교회를 지었던 소록도의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 교회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실로 우리 주님 보시기에 "참 보기 좋은"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에게 헌신하도록 허락하신 우리 교회, 이 교회가 우리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 넘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람들인 것을 세상이 알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어 봅니다.
이 글에 공감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믿음의 길을 걸었던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한국 교회 1세대 신앙인들의 투박하고 거친 믿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믿음이 얼마나 세련되고 사치스러워졌는지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세련되고 사치스러운 우리의 믿음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들의 성결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혼탁하고 부정한지를 확인했습니다. 민족을 품고 인류를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품었던 그분들의 삶을 보면서 나와 내 가족 혹은 내 교회만을 생각하고 사는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를 깨달았습니다.
수 년 전에 저는 신앙 선조들의 기도문을 수집하여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서양 기독교 역사가 배출한 위대한 신앙인들의 기도문을 찾아서 번역하기도 했지만, 한국 기독교 1세대 어른들의 글을 뒤져서 기도문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분들의 글을 직접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의 감회가 참으로 컸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보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한국 교회는 입만 열었다 하면 어거스틴이나 프랜시스 혹은 칼빈이나 존 웨슬리의 이름만을 거론해 왔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삶과 사상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국 교회가 배출해 낸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글을 읽는 것은 잘 발효된 치즈를 맛보는 것이라면, 이용도 목사님의 글을 읽는 것은 잘 숙성된 된장 맛을 보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2.
오늘 교회력에 따라 읽은 에베소서 5장 8절부터 14절도 역시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그 나팔 소리는 14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주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우리가 밤에 자는 잠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도 땅에 묻히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들이 추측하기는, 이것은 당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참된 생명으로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진짜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면 우리는 참된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이 없으면 ‘목숨’만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모조품입니다. C. S. Lewis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어떤 것의 모조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부모나 배우자를 통해서 경험하는 사랑은 그것보다 더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조품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나누는 우정은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하게 될 영원한 사귐의 모조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누는 성찬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잔치의 모조품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지도자들은 참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모조품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모조품을 가지고 놀면서 진품을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모조품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목숨만 붙들고 살면,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목숨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유하자면, 낚시꾼에게 잡혀 양동이 속에 누워 있는 물고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양동이에 가만히 누워 있는 물고기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 봅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물고기는 몸부림을 치며 물을 튀깁니다. 그러면 그 행인은 뒷걸음질 치며 말합니다. “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
맞는 말입니다만,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그 물고기는 지금 살아 있고 또 몇 시간 살 것입니다만, 바다에서 분리되는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면 우리는 바다에서 분리된 물고기처럼 목숨은 붙어 있으나 이미 죽은 셈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살면 참된 생명의 맛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의 맛을 보지 못하면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매일 죽음을 맛보며 사니,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그 맛을 여러 번 경험하여 아실 것입니다. 그 불길한 죽음의 맛 때문에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고 아침에 깨어나는 것도 두려운 경험을 거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그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계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생명의 맛이란 무엇입니까? 가슴 뿌듯이 느끼는 감격, 즉 ‘아,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 이게 사는 것이구나! 하나님, 이 생명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맛이 그것입니다. 문득, 내 삶이 너무나 소중해 보이고,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이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감사해지는 그런 경험을 가리킵니다. 하루살이의 생명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던 내 생명이 영원한 차원으로 들려 올려 진 것 같은 경험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의 맛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이 생명의 맛을 보기 위함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혹시나 그 맛을 볼까? 돈을 많이 벌면 혹시나 그 맛을 볼까?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자식들을 두면 혹시나 그 맛을 볼까? 건강하면 혹시나 그 맛을 볼까? 비싼 돈을 들여서 수퍼 볼 게임을 보면 그 맛을 볼까? 케네디 센터의 최고급 좌석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하면 그 맛을 볼까? 진탕 술에 취하면 그 맛을 느낄까? 마약에 취하면 그 맛을 느낄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유명해지면 그 맛을 볼까? 다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그 맛을 보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그 맛은 오직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은 잠시 잠깐 우리의 미각을 만족시켜 주지만, 우리는 금세 물리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7:6)
여러분은 가시나무를 태워 보셨습니까? 저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경험이 많습니다. 가시나무를 태우면 소리는 요란합니다만, 화력은 약하고 아주 빨리 사그라집니다. 지혜서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내면에 생긴 ‘생명에의 갈증’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손에 쥔 것으로 잠시 동안 즐거움을 맛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가시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소리만 요란할 뿐 금세 사라져 버리고 더 큰 욕구만을 남깁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참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큰 생명에 눈을 뜨는 것이며, 그 생명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목숨이 다했을 때, 참된 생명 안에서 새롭게 깨어날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목숨과 육신과 물질만으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참된 생명의 맛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매일 사귀며 살아갈 때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용한 비유를 조금 연장해 보겠습니다. 양동이에서 펄떡거리며 사라있음을 증명하던 물고기는 힘에 부쳤는지 다시 물속에 누워 아가미만 뻐끔거리며 가쁘게 숨을 쉽니다. 행인은 그 물고기가 불쌍해집니다. 잠시 동안 그 물고기를 보고 있던 행인은 두 손을 양동이에 넣더니 물고기를 들어 올려 바다로 던져 넣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놀란 물고기는 잠시 동안 물속에 떠 있다가 힘차게 몸짓을 하여 헤엄을 칩니다. 물고기는 몇 시간 만에 마음껏 호흡을 하며 생명의 맛을 즐깁니다.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니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회복된 사람은 마치 바다에 다시 던져진 물고기처럼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며, 또한 과거와는 다른 삶의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흔히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영생하라는 말에 혹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고 영생하십시오.”라는 말이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생한다’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전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목숨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 ‘영생하는 것’입니다. 목숨은 끊어질 날이 있지만, 생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생명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면 그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고, 그 생명에 연결되면 나의 존재는 영원해집니다.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면 나도 그 차원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참된 생명의 맛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참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될 때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결과입니다.
다시 부두로 돌아가 봅시다. 낚시꾼은 갑작스러운 일에 황당해 하며 또한 분노합니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면서 겨우 하나 잡은 대어입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매운탕을 끓어 먹을 생각에 마음이 설레던 참입니다. 그런데 웬 일이랍니까? 낚시꾼은 행인의 멱살을 붙들고 따집니다. 뭐냐고, 왜 그랬느냐고. 하지만 행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낚시꾼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깁니다. 피멍이 들도록 맞았지만 행인은 행복합니다.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다시 찾은 생명의 맛을 누릴 그 물고기 생각 때문입니다.
그 낚시꾼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죽음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에 다시 던져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목숨이 전부라고 알고 사는 사람들을 참 생명의 맛에 깨어나게 해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이 땅의 나라가 전부라고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실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던져 주심으로 세상의 비난과 미움과 박해를 대면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 때 이득을 볼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분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극대치의 고난을 받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깨어날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이 부름이 여러분을 향한 부름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생명의 바다에 던져짐을 당했습니까? 혹시,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한데 매일 죽음의 쓴맛을 씹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는 다니는데, 마치 파도에 밀려 나와 물기어린 모래밭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분들에게 성령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고! 깨어나라고! 죽음의 땅에서 일어나 생명의 땅으로 들어오라고!
4.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어 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의 맛을 누리며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나 혼자 생명의 맛을 누리며 나 혼자 행복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참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의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8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참된 빛 되신 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세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라고, 미래에 대해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세상의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이 얼마나 밝으냐, 그 광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기 불처럼 방 안을 환히 비추는 빛이고, 어떤 사람은 호롱불처럼 가까운 주변이나 겨우 비추는 빛이고, 어떤 사람은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스러져가는 빛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미’ 빛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빛이 된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주실 것이다.
누가 잠자는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으면서도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빛이 어떠한지 돌아보지 않고 그 빛이 스러져 가도록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잠자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믿고 세례 받았으니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천국 시민처럼 살아가는 일에 등한히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자위하며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잠자는 사람입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눈 뜨지 못하고 이 세상에만 집착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고 육신과 물질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누가 잠자는 사람입니까? 내가 받은 축복, 내가 받을 축복만을 셈하고, 내가 드려야 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맛을 누리는 일에만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향해 오늘의 말씀은 외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입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잠은 죽음에 이르는 잠입니다. 영적으로 죽으면 결국 전 존재가 죽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가를 보면 될까요? 믿음이 좋은 사람이 기도를 오래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은 누구나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도의 분량이 그 사람의 욕심의 분량과 비례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헌금하는지를 보면 될까요?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인색함이 없지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나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혹은 더 많은 축복을 받겠다는 계산으로 많은 돈을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를 보면 될까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축복이 항상 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번영이 항상 믿음의 분량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을 측정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세 가지의, 매우 믿을만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9절)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게 살고 있는가, 얼마나 의롭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선과 의와 진리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한 일어나야만 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욱 선하게 살게 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옳은 것을 택하게 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욱 진실하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믿을만한 판단 기준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어느 정도 선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의로울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수양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선과 의와 진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속속들이 타락해 있기 때문에 참된 선을 알기 어렵고,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없으며, 진실함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치료받을 때 비로소 선하고 의롭고 진실해지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한 번에 완전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성장에 따라 자라가야 합니다.
영적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의와 진실이 내 안으로 넘쳐 흘러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빛이 내 안에서 더 환하게 발산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빛에 우리 자신을 활짝 열 때, 그 빛은 우리 안을 환히 비출 것이며, 우리를 통해서 바깥으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이번에 구입한 책 중에 <소록도>라는 작은 소책자가 있습니다. 그 안에 한센씨 환자인 윤일심이라는 분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글이 몇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이 글을 쓸 때는 기독교인이 된 지 약 6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반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분은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한 뙈기 밭이다. 그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만이 우거진 메마른 묵정밭(오래 내버려둬 거칠어진 밭).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이 나의 밭에도 내렸고, 봄날 따뜻한 해님이 나의 밭에도 쪼였건만, 꽃도 열매도 맺어본 일 없고 아무 소용없는, 세상이 버린 묵정밭. 아, 나의 밭, 이 밭의 농부는 나이다. 이 밭의 거름 줄 자도 나이요, 지심 맬(김 맬) 자도 나이다. 나 이외에 이 밭을 가꿀 자 없고, 나 밖에 이 밭을 귀중히 여길 자 없다. 버려둔 묵정밭에 씨 한 톨을 던진 지도 벌써 6년이 되었건만 느자구 없이(싹수 없이) 노란색 엉겅퀴에 시달려 잡초만 우거지니, 아, 게으른 농부야! 언제 이 밭에 풀 한 포기 뽑아주고 거름 한 줌 주었던가. 오, 지주님, 용서합소서. 게으른 농부 이제 확실히 깨었소이다. 그렇소이다. 나의 할 일은 이 밭을 가꾸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줄 이제 겨우 알았소이다. 지금 나의 밭에 잡초를 다 뽑아 버리고 거름을 주겠사오니 은혜의 비 지금 흡족히 내리셔 백배 천배 결실케 하옵소서. 낫을 들고 거두실 날 멀지 않았사오매. (80-81쪽)
6.
이번 집회는 잠에서 깨워 일으키는 나팔 소리와 같았습니다. 사흘 동안 우리가 들은 그 많은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깨어나라! 일어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깨어나라는,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믿음으로 일어나라는, 그리고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믿음으로 깨어나라는 나팔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도 동일한 나팔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문화적인 교인으로 혹은 습관적인 교인으로 만족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맡겨 하나님의 드넓은 바다에 던져짐을 당할 수 있기 바랍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몸부림을 쳐서 자신의 열망을 전하는 물고기처럼, 여러분도 깨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순절 영적 여정이 그 같은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 더욱 분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더 깊은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빛이 더욱 밝아지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빛의 열매가 더욱 풍성히 맺혀지게 하기 위해서, 더욱 선하고, 더욱 의로우며, 더욱 진실하기 위해 깨어 일어나십시다. 더욱 깨어 영적으로 자라 가십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모든 선과 의와 진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를 주님 안에 붙들어 매시어
저희에게서
선과 의와 진실의 열매가 맺히게 하소서.
영적인 잠에서 저희를 깨워 주시며
빛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1년 4월 3일 <사순절 넷째 주일 설교>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17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에베소서 5:8-14을 다시 읽습니다. 이 본문에 나와 있는 권면을 당신의 말로 정리해 보십시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의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내가 진짜 살아있구나! 살아있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구나!’라고 느낀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 보십시오.
4) 빛의 열매 세 가지, 즉 선함,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가장 잘 익은 열매는 무엇이고, 가장 부실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5. 중보기도
1) 아직도 죽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어 놓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2) 빛의 열매가 더욱 실하게 맺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07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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