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에스겔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50 추천 수 0 2013.03.13 13:32:49성경본문 : | 겔37:1-10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에스겔 37:1-10
1.
살다 보면, 도대체 희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런 때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지난 봄철 부흥집회에서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에 대해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에 도대체 국가적인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그분들은 어떻게 그 희망을 부여잡고 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현실에 의해 압도당하기 때문에, 모두들 희망을 놓고 있을 때 끝내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약 2천 오백년 전 유대민족은 그 같이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에스겔이라는 예언자는 그 가운데서 희망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오랜 후 그리고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한 얼마 후부터 활동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영적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람입니다. 민족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박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그가 본 환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언 운동과 묵시 운동의 중간에 에스겔이 서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본문은 에스겔이 보았던 여러 가지의 환상 중 하나입니다. 1절은 이것이 환상이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 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사람들은 보통 ‘환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심리적인 질환을 가진 분들이 겪는 것과 같은 것을 먼저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환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입니다. 심리적인 질환으로 생기는 환상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눈멀게 함으로써 그의 삶을 파괴시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고 그의 삶과 그의 주변에 선한 영향을 끼칩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과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입니다. 그 환상을 통해 에스겔은 현실을 새롭게 보고 그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 환상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록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백 번, 천 번 말로 하는 것보다는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들은 말은 쉽게 잊힐지라도 눈으로 본 것은 잘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에스겔은 “주님께서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 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본 것입니다. 에스겔의 몸은 기도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뼈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뼈들이 널려 있는 광경을 자세히 보게 하십니다. 2절을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에게 이끌려 해골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살펴보던 에스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백주년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님은 어디를 여행하든 그곳의 공동묘지를 꼭 찾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만, 그런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는 묘지를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시신을 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른 뼈를 보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면,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왜 하나님은 나를 이런 곳으로 끌고 오셨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문이 마음에 차오를 즈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3절)
이게 말이나 되는 질문입니까? 방금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질문이라 해도 말이 안 되는데,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증발되어 이제 부식 과정이 시작된 뼈들을 두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대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에스겔에게 그 환상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가 본 해골 골짜기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이스라엘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에스겔은 조국의 운명을 두고 많은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애끓는 심정으로 조국의 해방과 회복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에게 있어서 해골 골짜기는 바로 희망을 볼 수 없는 조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사람아, 이스라엘이, 유다가 회복될 수 있겠느냐?
3.
이 지점에서 잠시 머물러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해골 골짜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던지셨던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자주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나의 해골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크게 보자면, 미국의 경제 문제는 우리가 당한 해골 골짜기입니다. 미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요즈음 자주 듣고 있습니다만,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마른 뼈와 같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분들은 지난 3년 중에서 지금이 제일 힘들다고 토로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 전체의 상황으로 인해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해골 골짜기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보아도 때로 해골 골짜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미국의 교회들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교파에 관계없이 현저하게 교세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Bible Belt 안에서 특혜를 누리던 남 침례교단조차도 작년부터 감소 추세로 돌아섰습니다. 특별히, 18세부터 35세까지의 젊은 층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요즘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 The Secular Student Alliance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세속적인 학생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을 믿고 무신론을 전파하는 새로운 종교 단체입니다. 지금 교회를 지키고 있는, 평균 70세의 교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20년 후면, 미국 전역에 있는 교회의 상당수가 빈무덤이 될 전망입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는 상태가 더 심각합니다. 저는 지난 2월에 한국을 잠시 방문하는 중에 한국 교회의 문제를 체감하고 왔습니다. 이민 교회라고 해서 나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제가 말하는 것보다 한국에 사시는 분이 제게 보낸 메일의 일부를 읽어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계신데, 당신의 교회 안에서 모범적인 신자로 인정받고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은 과연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적어 보내셨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의 가장 큰 오류는 십자가가 실종되었다는 점이며, 성령은 강조되고 있으나 예수와 하나님은 잘 보이지 않으며, 복음의 능력은 방언과 신유와 성공 체험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맘몬을 믿는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믿음의 본질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부자 되고 출세하며 건강해지고 풍요롭게 살 수만 있게 해 준다면 막대기라도 열광적으로 믿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날로 더 심해지고 노골화되어지고 만연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 대신 성공하고 돈 많이 버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학원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대세입니다. 죽지 않고 부활하는 비법을 전파하고 있으며,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든 남에게 지우려는 지독한 이기심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하루 온종일 TV를 통하여 방영되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해도 해도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목과 본문만 성경에서 가져왔지 내용은 하나같이 돈 잘 벌고 건강히 제 식구와 오순도순 살면서 오직 주일 출석과 헌금만 잘하면 하나님의 복 받은 신자라니, 참으로 듣기가 민망할 정도가 아니라 분노를 느낄 때도 허다합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2-3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노골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엉터리 간증과 거짓 체험을 글로 적은 책들이 성경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착실하고 진지한 성경공부 대신 이름도 이상한 전도훈련, 성령체험 등등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방언도 연습시키고, 은사 받는 비법도 훈련시키니, 자기들이 완전히 하나님이고 성령님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지금 해골 골짜기를 대면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도대체 변화되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로 인해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분들.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혹은 점점 비뚤어지기만 하는 자녀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하는 분들. 아무리 노력해도 통제되지 않는 질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분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아무 도리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기로에 선 분들. 꼬이고 꼬인 가정 문제를 어디서 풀어야 할지,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보는 것 같은 분들. 될 듯 될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신분 문제로 인해 포기할 지경에 이른 분들.
이것이 모두 오늘 우리가 대면하는 해골 골짜기입니다. 그런 문제에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4.
이 질문에 대해 에스겔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될 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어찌 보면 아주 요령 있는 대답입니다. 하나님 앞이니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피해가는 답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회피성의 대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이 구절을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Lord God, only you can answer that.
주 하나님, 주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이 대답 안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요소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지금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건조 과정이 다 끝나고 부식 과정을 시작하고 있는 뼈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자신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십니다. 그분이 원하기만 하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전능자에게 무슨 일이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에스겔은 “안 될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존경과 신뢰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 무엇이든 해 달라고 졸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스겔은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그분의 선택을 신뢰한 것입니다.
3절의 대화에서 주목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는 말과 에스겔이 하나님을 부르는 말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람아!”하고 부르십니다. “너는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발간된 새 번역 성경(NRSV)은 하나님의 질문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Mortal, can these bones live?
덧없는 인생아, 이 뼈들이 살겠느냐?
좀처럼 의역을 하지 않는 새 번역 성경이 이 부분에서는 의역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른 말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너의 눈에 이 뼈들이 살 것 같아 보이느냐는 겁니다.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는 너의 눈에 이 뼈들이 살 것 같으냐는 겁니다. 얼마 후면 골짜기에 널부러져 있는 뼈들과 같이 될 너의 눈에 이 뼈들이 살 것 같으냐는 겁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덧없는 인생의 눈에는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예,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덧없는 인생이 감히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결정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뼈들이 살아날 것이고 원하지 않으시면 그 뼈들은 먼지로 변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크게 혹은 작게 해골 골짜기를 대면하고 계십니까? 도저히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기에 절망하고 낙담하고 계십니까? 혹은, 내 힘이면 너끈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여러분은 다만 인간일 따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피조물로서 덧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보이는 모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 있어 보이든, 희망이 없어 보이든,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마음의 눈을 뜨셔서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면 마른 뼈들이라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느끼는 자신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만을 보지 마시고, 그분의 주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이 “주님, 주님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으니, 이 뼈들이 살아나리라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믿음의 만용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그 일이 일어날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같은 믿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신앙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 믿음이 부족한 ‘불신’도 문제이지만, 믿음이 넘치는 것 즉 ‘과신’도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넘치는 것’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에는 넘침이 없습니다. 아무리 쌓고 쌓아도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미씨미다!”를 연발하는 것이 넘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요 그분이 창조주인데, 마치 자신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 피조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 말씀 즉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옛날 번역으로 읽어야 제 맛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행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할 때 ‘모든 것’은 가난에 처해도 짓눌리지 않고 부해져도 부패하지 않는 영적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 처해도 그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난해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해질 수 있고, 부해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믿음이 넘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 무조건 믿고 구했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었으며 이렇게 성공하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모두 에스겔보다 믿음이 좋아 보이고, 바울보다 더 강한 믿음의 소유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만용입니다. 과신입니다. 주제넘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을 부리려는 태도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십시다. 저와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덧없는 존재입니다. 때로,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기도 하지만, 실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해골 골짜기를 만나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골 골짜기를 만나 우리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처분에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대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은 살아날 수도 있고 그냥 먼지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가 때로 짙은 안개 속을 더듬어 걷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넘치는 분들은 너무도 자주,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본인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그렇게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얻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응답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소개했던 스탠리 하우어워즈 박사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은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해답 없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매일 그분에게 자신을 의뢰하고 그분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하나님의 길을 걸어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서 움직이려는 태도가 아니라, 매 순간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과 함께 선택하며 걸어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저에게도 해골 골짜기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덧없는 인생인 저에게 한국 교회는 해골 골짜기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분에게 메일을 쓰면서 그 같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희망을 둘 것은 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면 더 처참하게 추락할 수도 있고, 그분이 원하시면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분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 가면 됩니다. 그 같은 태도로써 저는 제가 당한 모든 해골 골짜기들을 걸어 나갈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대하든지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러면 상황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희망이 생깁니다. 바울 사도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병이 들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분을 하나님답게 믿고 의지하고 섬기고 살아갈 때, 그 무엇도 우리의 마음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만이 하십니다.
저희로
주님을 주님답게 믿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기를 위한 노력이
되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1년 4월 10일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42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에스겔서 37:1-14을 읽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당신이 당한 해골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4)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과신 중에서 당신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5. 중보기도
1) 바른 믿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해골 골짜기를 만난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41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