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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고린도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182 추천 수 0 2013.03.13 13:32:49
.........
성경본문 : 고전15:12-1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4월 24일 부활주일 설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고린도전서 15:12-19

1.

Happy Easter!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Happy Easter!”라는 인사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기쁘게 Happy Easter!라고 화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아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 부활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나누는 부활절 인사는 하나의 형식일 따름입니다. 빈 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지요.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으며 영생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목회 초년기에 자주 실망을 하곤 했습니다. 장례식을 집전하다 보면,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는 자녀들이 조사를 하면서 눈물로 말합니다. “엄마,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곧 따라가겠어요.” 그 조사를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아, 이제야 저 딸이 정신을 차리는구나. 이제 이 장례식이 끝나면 교회에 나오겠구나.’ 하지만 그 기대감은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조사에게 그 사람이 한 말이 빈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합니다. 그렇게 여러 번 겪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헛된 기대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빈말이 머지않아 참말이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부활절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Happy Easter!라고 인사하면서 속으로는 ‘부활은 무슨 부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그래? 어떻게 그런 것을 믿을 수가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인사말은 빈말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과학 지식으로 철저히 무장된 사람들에게만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명석하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에게만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혹시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것을 두고, ‘아, 나는 참 똑똑한가 봐!’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고 과학 지식도 전혀 없으며 그리 명석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부활이 믿기 어렵습니다.

부활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는 과학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있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거나, 부활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은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죽기 이전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로부터 뚫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죽어서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난 다음에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사실, 믿기 어렵기를 따지자면 예수님의 부활보다 나사로의 소생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과거의 생명으로 되돌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필름을 rewind시킨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과 다릅니다. 필름을 rewind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필름이 stop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경우, 그 필름이 계속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아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 느끼는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을 믿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세상이 있고 그 같은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지 않으면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은 우리가 아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있고 우리가 아는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이 있음을 즉시로 알게 됩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세계관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자연히 그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법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초대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도 손에 만져지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들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에게 걸었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때문에 자신들도 끝장날까 두려워 예루살렘의 어두운 뒷골목 골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자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그리고 영생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땅의 나라가 전부고 육신의 생명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위협도 해 보았고 투옥시켜 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만 하지 않으면 살려준다고 해도, 그들은 그 말을 계속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말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다 희생한다 해도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세계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대답이 없습니다. 목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생명이 있다고 믿었고, 이 땅의 나라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이 땅의 나라를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재산을 다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해 확신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그들에게 그 같은 말씀을 거듭 거듭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에게 붙은 불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나 않을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토록 이해력이 없고 믿음이 없고 겁이 많던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보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으로 필름이 끝난 줄 알았는데, 예수님에게서 필름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에게는 과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이해 못 할 말씀들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게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 죽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영원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세계관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는 방법도 뒤집어졌습니다.

3.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전 15:19)

만일 부활이 거짓이라면, 바울 사도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세계관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인간적인 조건은 대단했습니다. 그의 이력서는 화려했습니다. 혈통에 있어서나, 가문에 있어서나, 출신 지역에 있어서나, 교육 정도에 있어서나, 경력에 있어서나, 성품에 있어서나, 당시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일평생 호의호식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다음, 그는 그 전까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 화려한 이력서를 구겨버렸습니다. 이 땅의 나라가 전부라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대단해 보였는데,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땅의 나라가 전부라고 여겼을 때 그에게 이롭게 보이던 것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모두 해롭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3:8)

세상이 뒤집혀도 사정없이 뒤집힌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해서 그 어떤 희생도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한 번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를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수고도 [유명하다는 사도들보다]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고후 11:23-28)

바울 사도는 이렇게 살다가 결국 네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 참수되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해와 고생과 모욕과 박해를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영생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믿었기에 그는 그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견지에서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불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본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지만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나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 왔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희생하면서 부활의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면, 자신이 부활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부활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살겠습니까?”

저는 이 대목을 두고 묵상하면서 저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너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이 질문을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부활을 믿기에 네가 희생한 것은 무엇인가? 부활을 믿기에 너의 세상은 얼마나 뒤집어졌고, 너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제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이 별로 없다면, 저의 세계관은 아직 덜 뒤집어진 것이고, 그렇다면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실로 믿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4.

얼마 전, 세례 준비를 위해 어느 교우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 남편 되시는 분이 7년간의 장고 끝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한 끝에 결정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서 교회를 멀리하다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우연치 않게 교회에 나갔고, 그 교회에서 손봉호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철학교수로서 교회에서 말씀 사역을 활발히 하시는 분입니다. 현재 한국 교계에서 바른 소리로써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아, 내가 기독교에 대해 잘 못 생각했구나. 뭔가 연구할만한 진리가 기독교에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 때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세례 받는 것을 두고 저울질을 했습니다.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확신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이 7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일에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결혼 상대를 두고 7년 동안 결심하지 못하고 망설였다면 받아 줄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년이 아니라 17년이라도, 아니 70년이라도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모두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7년 동안의 장고 끝에 내린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 결론은 이렇습니다. ‘만일 믿지 않고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드러나면 별로 잃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분은 수줍게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시로서는 머리만 사용했기 때문에 그 같은 유치한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같은 계산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동안의 체험과 깨달음을 통하여 마음으로 믿으신다고 고백하십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전도를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 절박함을 알기는 알겠는데, 이렇게 전도하는 것도 옳지 않고, 이렇게 믿는 것도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도 별로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면, 믿음 때문에 잃어버릴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뭔가를 희생하는 믿음이 아니라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믿는다고 하면서 내 시간의 적은 부분, 일주일에 한 두 시간, 혹은 한 달에 한 두 시간만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별로 잃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내 시간의 가장 귀중한 부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과의 사귐에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때 잃을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물질의 적은 부분, 있으나 없으나 별로 차이 없는 정도의 물질만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았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판명 날 때 별로 잃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수입에서 가장 먼저 십일조를 구별해 바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내 것을 드리기에 아낌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판명 날 때 잃을 것이 꽤 많을 것입니다. 그 물질로 다른 것을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위해 살았다면,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분투했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잃을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오더라도 자신이 얻을 것만을 찾았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도 잃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기에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그분 앞에 내려놓고 그분을 위해 산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때 잃는 것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위해 살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 나는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면, 진짜 믿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손해 볼 것이 있다 싶으면, 그 믿음에 조금이라도 진실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보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삶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10%나 20%가 아니라 100%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는다면, 아무리 바치고 드리고 나누어도 그것으로 자만할 수 없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에 위안이나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문화생활의 일부도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관이 뒤집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삶의 태도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손해 보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넓고 편한 길을 택할 때, 믿는 사람들은 좁고 험한 길을 택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손해도 당하고 모욕도 당하고 박해도 당할 것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 같은 믿음에는 이 세상에서 치르는 대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 높은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손해와 육신적인 고통에 비할 수 없는 값진 대가가 따릅니다. 험한 산을 등산하는 데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만, 그 대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등산가들은 등산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하게 부활을 믿는 것은 많은 대가를 치르도록 하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대가는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눈을 뜨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기쁨입니다.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누림으로 얻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육신적인 안락에서 얻는 기쁨과도 다릅니다. 성공하고 번영하여 얻는 기쁨과도 다릅니다.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 세상을 보는 기쁨입니다. 내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기쁨입니다. 내 생명이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기쁨입니다. 내가 진짜 살아있으며 또한 살 이유가 있다는 뿌듯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또 다른 대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안깁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땅의 나라보다 더 분명한 실체라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았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치룬 모든 대가가 기억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마태 5:11-12)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부활을 믿기에 어려움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부활은 누구에게나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소식에 대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상식과 이성과 과학 지식을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여러분의 상식과 이성과 과학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한 때, 인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을 절대적으로 믿던 사람들은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둥근 것이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밝혀졌습니다.

그 한계를 인정한다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까? 혹시, 인간이 가서 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닐까? 마치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다가 변모하여 나비가 되듯, 우리도 그렇게 죽음을 거쳐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닐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지금도 활동하시며 그를 찾는 이들을 만나 주신다는 성경의 이야기가 진짜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질문들을 가지고 스스로 깊이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직접 경험해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세상은 실제 세상보다 너무나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사실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얼마나 진짜인지를 따져 보셔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내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기 위해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나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나는 얼마나 큰 손해를 볼 것인가?”

만일 우리가 믿는 믿음 때문에 기꺼이 담당한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우리는 마치 장례식장에서 천국과 영생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입에 발린 말로 부활을 말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것이고, 세계관이 달라지면 우리의 사는 것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부디, 참된 부활의 신앙에 이르기를, 말입니다. 부활을 입으로만 증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이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설교가 아니라 부활을 믿는 사람다운 삶을 보고 싶어 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 같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
저희로 부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새 세상을 보게 하시고
그 새 세상을 위해 살게 하소서.
그 세상을 위해
이 세상에서 기꺼이 희생하며 살게 하소서.
물질적인 대가를 치르는 신앙으로써
영원한 대가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1년 4월 27일 <부활 주일 설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151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고린도전서 15:12-19을 읽습니다. 부활에 대해 바울 사도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부활이 거짓이라면 당신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죽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당신은 얼마나 손해를 보겠습니까?
3) 예수를 믿고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에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나라를 위해 당신이 감당한 혹은 감당하고 있는 희생은 무엇입니까?
4) 희생을 통해 기쁨을 경험해 본 일이 있습니까? 간단히 말해 보십시오.

5. 중보기도
1)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손에 만져지는 세상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10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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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3 요한복음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요13:1  류공석 목사  2013-03-15 2223
8622 마태복음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16:13-20  류공석 목사  2013-03-15 2244
8621 마태복음 너는 반석이라 마16:13-20  류공석 목사  2013-03-15 2291
8620 전도서 오직 너는 전5:1-7  류공석 목사  2013-03-15 2089
8619 사도행전 부활후 사십일 동안 행1:1-11  류공석 목사  2013-03-14 3339
8618 빌립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빌3:10-14  류공석 목사  2013-03-14 2213
8617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29  류공석 목사  2013-03-14 2682
8616 창세기 하늘나라 퍼즐 맞추기(Puzzle Game of Heaven) 창3:20-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542
8615 요한계시 천국의 은유(Metaphors of Heaven) 계1:9-2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82
8614 요한복음 태초에 천국이 있었다(In the Beginning Was Heaven) 요18:36-37  김영봉 목사  2013-03-13 2064
8613 마태복음 감추어진 보물(A Hidden Treasure) 마13:44-46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2
8612 요한복음 예배가 정의에 앞선다(Worship Precedes Justice) 요4: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346
8611 로마서 마음의 문제다(It Is the Matter of Heart)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896
8610 빌립보서 성품이 길이다(Character Will Lead You) 빌1:9-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0
8609 로마서 사람이 문제다(We Are the Problem)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393
8608 로마서 세상에 긴장하라(Beware of the World)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1
8607 요한일서 사랑의 진실(Truth About Love) 요일4:7-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261
» 고린도전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고전15:12-19  김영봉 목사  2013-03-13 2182
8605 에스겔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겔37:1-1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50
8604 에배소서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엡5:8-14  김영봉 목사  2013-03-13 2828
8603 시편 재난 중에 부르는 노래(A Song In the Midst of Disaster) 시121:1-8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9
8602 마태복음 사순절의 부름(Calling at Lent) 마4:1-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946
8601 베드로전 아름다운 신앙생활 벧전5:1-14  최장환 목사  2013-03-13 4132
8600 데살로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후2:1-17  최장환 목사  2013-03-13 3987
8599 창세기 대내전에서 이겨야 대외전에 승리할 수 있다. 창14:12-24  김경형 목사  2013-03-13 1947
8598 로마서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롬5:14  민병석 목사  2013-03-12 2670
8597 로마서 죄와 율법 롬5:13  민병석 목사  2013-03-12 2097
8596 로마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롬5:12  민병석 목사  2013-03-12 2088
8595 로마서 구원받은 자의 생활 롬5:9-1  민병석 목사  2013-03-12 1990
8594 로마서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롬5:5-8  민병석 목사  2013-03-12 2258
8593 로마서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롬5:3-4  민병석 목사  2013-03-12 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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