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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퍼즐 맞추기(Puzzle Game of Heaven)

창세기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542 추천 수 0 2013.03.13 13:32:49
.........
성경본문 : 창3:20-24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7월 24일 주일 설교 <왕국절을 위한 연속설교: 알 수 없는 나라 4>

 

“하늘나라 퍼즐 맞추기”(Puzzle Game of Heaven)

--창세기 3:20-24

 


1.

퍼즐 맞추기 놀이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입니다.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여 요즈음에는 노인들도 많이 합니다. 하나의 그림을 100조각 혹은 500조각으로 잘라놓고, 그 조각들을 맞추어 그림을 만들어 가는 놀이입니다. 퍼즐을 잘 맞추려면 두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첫째, 조각 하나 하나의 특징을 파악하여 그 자리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조각이 모두 맞추어진 상태의 그림을 상상하면서 각 조각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것일까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체 그림을 생각하지 않고 조각만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마치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취하는 행동 하나 하나는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집에서 행동하는 것, 직장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모두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그 모든 퍼즐 조각이 서로 잘 맞을 때 의미가 통하는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는 퍼즐 조각과 같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그 모든 퍼즐 조각이 서로 맞아서 하나의 그림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퍼즐 조각들이 합하여 이루어야 할 그림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 해도 내 삶의 모든 요소들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퍼즐 조각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는 일들은 아무렇게나 맞추어 놓은 퍼즐 판처럼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할 큰 그림입니다. 천국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선교를 해 나가면서 매일매일 기억하고 있어야 할 큰 그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갑니다. 삶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1-35)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일이요 그 나라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에 대해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그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경험하고 배워갈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연결될 때, 우리의 모든 행동이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봉사만이 아니라, 일하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모두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와 사랑의 수고까지도 모두 의미를 잃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고 그 나라를 사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2.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 어떤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 큰 흐름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관계하여 어떻게 살아갈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의 창조에 대해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1:1-2)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하듯,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문법적으로 모호하여 정확한 번역이 어렵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In the beginning when God began to create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왜 이 번역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보아도 이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탄생되면서 하나님도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우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가 사는 우주를 창조할 마음을 먹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서 지어졌습니다.

 

지금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느라고 여러 가지의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일직선의 시간관념은 우주가 창조되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라거나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우주를 창조할 작정을 하셨다’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C. S. Lewis는 하나님의 시간이 원(circle)과 같을 것이라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은유인데, 알 듯 하기도 하고 말 듯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어떤 것일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시간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이 창세기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시간관념은 태양빛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태양빛은 네 번째 날에 지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태양빛이 없었고, 따라서 일직선의 시간관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이 생겨라.”(1:3)고 말씀하셔서 태양빛과 다른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아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생겨났을 터인데, 그 시간이 어떤 것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시간은 어떤 것일지, 어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로서는 우리가 아는 시간관념에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다.”거나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 천지창조를 결심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의 암시대로 하나님은 천지창조 이전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때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분의 관심사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이 우주와 같은 것을 여러 개 만드셨을 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이 오직 우리 지구에만 관심하시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만, 우주의 실상을 안 다음에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좁다란 상상력 안에 가두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크기로 축소시킨 것이니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우주와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그리고 이 지구에 사는 인류와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걸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말하듯,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하에 있던, 하나님 나라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에는 완전한 사랑과 평화와 안식과 정의와 기쁨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과거입니다.

 

 3.

 

문제는, 주어진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꿈 꾼 천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께 반기를 든 천사의 우두머리를 ‘루시퍼’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반기를 든 영적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악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사탄’(Satan)이라고 부르고, ‘악마’ 혹은 ‘마귀’(devi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탄을 추종하는 하급 영적 세력들을 ‘악령’(evil spirit) 혹은 ‘귀신’(demon)이라고 부릅니다.

 

현대인들은 악한 영적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우선, 현대인들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믿는 과학과 이성이 이 같은 영적 세력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악령’, ‘귀신’, ‘악마’, ‘마귀’라는 단어들을 어릴 적부터 동화, 전설, 괴담 등을 통해 접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전에 귀신이나 악마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을 읽다가 이 단어를 보면, 자신이 알고 있던 바로 그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릴 때 들은 귀신 이야기를 생각하거나, 삼지창을 가진 뿔 달린 검은 귀신을 상상합니다. 그러니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탄과 악령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전설이나 동화나 괴담에서 들어 습득한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운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철저히 영적인 세력입니다. 뿔 달린 검은 귀신이 아닙니다. 타락한 영들은 인간을 속여 자신의 왕국의 노예로 만들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나라를 세워서 왕 노릇 해 보고 싶은 욕심을 불어 넣었습니다.

 

천사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 우주에 완전하게 임해 있던 하나님의 통치가 깨어졌습니다. 창세기 3장 이하를 읽어보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상태가 깨어져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벗어나자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하나 됨이 깨졌습니다. 하와를 맨 처음 본 순간, 아담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창 2:23)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은 하와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는 듯했습니다. 몸은 둘이었지만 둘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상태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살이 아프면 내 살도 아프고, 아내의 뼈가 아프면 내 뼈도 아프다고 느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의 고백을 나누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사실을 하나님께 들키자, 아담이 뭐라고 변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3:12)

 

하와가 사탄에게 유혹 받는 현장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담이었습니다. 아내가 선악과를 하나 따서 주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받아먹었던 아담이었습니다. 이것을 법적 언어로 ‘암묵적 동조’(silent accomplice)라고 부릅니다. 그래 놓고서 책임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아담이 하와를 가리키며 “그 여자”랍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떠넘기려 합니다. 그가 한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다 이 여자 때문입니다. 제가 언제 이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쓸 데 없는 것을 괜히 만들어 가지고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참, 졸렬해 보입니다. 아담이 남자 망신 다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직한 남성들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 안에 아담 있다.’

 

그 이후로, 이 세상에는 온갖 비극이 차례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땀을 흘려 노력해야만 자연을 길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를 읽어가면서 우리는 점점 깊어져만 가는 인간의 타락상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하게 임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평화, 사랑, 안식, 기쁨, 조화, 정의, 아름다움 등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지어졌던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함으로써 이 같은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독립을 꾀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깨지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서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아시고 나서 하나님은 하와와 아담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 형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너희의 인생이 고해(troubled sea)가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부과한 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자초한 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3:23) 이것도 역시 은유입니다. 어떤 장소로부터 추방되었다는 뜻이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상실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여기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어떤 동물을 희생시켜야 했으니, 그것이 장차 올 희생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리 내다 보게 한다는 해석이 가장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보아도 반역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배려를 이 행동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살려면 나뭇잎으로 만든 옷 가지고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에 살았습니다. 인간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는 깨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었고, 깨어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도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들이 서로 경쟁하며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부여해두신 질서를 벗어나 제멋대로 폭행을 부렸습니다. 사탄과 악령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림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현재입니다. 사탄과 악령의 유혹과 속임수가 여전히 살아 있는 곳,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에덴의 동쪽”(창 3:24)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두 가지 정반대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탄의 왕국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이미 그 나라에 속한 사람처럼 살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사탄의 왕국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가죽옷’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5.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잃어버렸던 에덴이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하늘과 옛 땅을 대치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본 환상 중에 그 날에 있을 일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 21:1-2)

 

재림의 교리를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물리적인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마치 우주 한 편에 있던 어떤 공간이 이 세상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것처럼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동안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3차원의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영역입니다. 성경에 그런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은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완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 나라는 우리 중에 있으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중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그 날이 오면”, 영적으로만 느끼던 예수님의 현존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가 환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낮에 우리는 하늘에서 태양과 구름밖에 보지 못합니다. 구름이 없는 날 하늘을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빈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밤이 오면 보이지 않던 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요즈음 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제 어렸을 적에 고향집에서 보던 은하수가 생각납니다. 요즈음 같은 여름철에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옛날 얘기를 들으며 옥수수를 먹다가 멍석에 드러누우면, 하늘에 가득히 들어찬 별들로 인해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땅은 없고 그 은하수가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며 그 많던 별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그 나라는 물질만을 보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 나라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직 영으로만 활동하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분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모든 것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도 회복될 것이며, 자연도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운행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에덴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안식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미래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잠시 동안’ 지금과 같은 상태에 있도록 놓아두십니다. 마침내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시금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아래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 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날을 보고 싶은 마음에 그 날을 계산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 “아들도 모른다!”(막 13:32)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행 1:7) 하지만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이며, 그 날이 오면, 마치 어둠이 내리면서 보이지 않던 은하수가 환히 드러나듯,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인류가 얼마나 장구한 역사를 거쳐 왔는데, 잠시 동안이라고 말합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 날이 오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신약성경이 쓰이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묻던 질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시간에 대해 잠시 나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의 시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시 90:4)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는 날이 곧 올 것 같이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2천년이 지나도록 왜 아무 소식이 없느냐는 질문은 순전히 우리의 시각에서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한 없이’ 이렇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잠시 동안’ 이렇게 살도록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분명 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에덴이 회복되는 그 날,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회복되는 날,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진 것 하나 없이 드러나는 날, 그 날이 올 것입니다.

 

6.

 

지난 주, 저는 또 한 분의 교우님을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임종을 준비해야 하겠으니 목사를 부르면 좋겠다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서둘러 옷을 차려 입고 병원으로 가는데, 저의 마음은 다른 때와 달랐습니다. 요즈음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문제에 깊이 빠져 있다 보니, 하늘나라에 대한 저의 믿음도 더 든든해진 것입니다. 너무도 이른 나이에 이생을 마친다는 것이 안타깝고, 변변한 치료 한 번 못해 보고 떠난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지만, 최악의 경우가 믿는 이들이게는 전혀 최악이 아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몇 시간 동안 땀 흘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나서, 환자는 의식을 잃은 채 기계에 의존하여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정말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병원을 떠나고 나서도 계속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제발, 이번만은 돌이켜 주셔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기도는 간절했지만, ‘기도가 안 들어지면 어쩌나!’라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최악의 경우가 아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한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

 

사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가 지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그 나라, 믿음을 통해 경험하고 맛보는 그 나라,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에게 환히 드러날 그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퍼즐 조각만 들고 보면, 아무 쓸 모 없는 종이쪽이지만, 큰 그림 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으면 아름다운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안에서 나를 찾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최악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 위에 서십시다. 이 땅에 흩어져 굴러다니는 퍼즐 조각만 보지 마시고, 큰 그림을 보시다. 저와 여러분은 그 큰 그림,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그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믿고, 그 나라의 일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그 나라의 일부로서 완성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 같은 믿음 안에서 바울 사도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 살아가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도 유익하다는 사람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이 놀라운 믿음의 은혜와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숨어계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 보게 하소서.

주님 나라, 보게 하소서.

주님 나라 안에서

저희 자신, 보게 하소서.

영원한 그 나라 품고

이 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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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2 마태복음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16:13-20  류공석 목사  2013-03-15 2244
8621 마태복음 너는 반석이라 마16:13-20  류공석 목사  2013-03-15 2291
8620 전도서 오직 너는 전5:1-7  류공석 목사  2013-03-15 2089
8619 사도행전 부활후 사십일 동안 행1:1-11  류공석 목사  2013-03-14 3339
8618 빌립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빌3:10-14  류공석 목사  2013-03-14 2213
8617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29  류공석 목사  2013-03-14 2682
» 창세기 하늘나라 퍼즐 맞추기(Puzzle Game of Heaven) 창3:20-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542
8615 요한계시 천국의 은유(Metaphors of Heaven) 계1:9-2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82
8614 요한복음 태초에 천국이 있었다(In the Beginning Was Heaven) 요18:36-37  김영봉 목사  2013-03-13 2064
8613 마태복음 감추어진 보물(A Hidden Treasure) 마13:44-46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2
8612 요한복음 예배가 정의에 앞선다(Worship Precedes Justice) 요4: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346
8611 로마서 마음의 문제다(It Is the Matter of Heart)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896
8610 빌립보서 성품이 길이다(Character Will Lead You) 빌1:9-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0
8609 로마서 사람이 문제다(We Are the Problem)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393
8608 로마서 세상에 긴장하라(Beware of the World)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1
8607 요한일서 사랑의 진실(Truth About Love) 요일4:7-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261
8606 고린도전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고전15:12-19  김영봉 목사  2013-03-13 2182
8605 에스겔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겔37:1-1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50
8604 에배소서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엡5:8-14  김영봉 목사  2013-03-13 2828
8603 시편 재난 중에 부르는 노래(A Song In the Midst of Disaster) 시121:1-8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9
8602 마태복음 사순절의 부름(Calling at Lent) 마4:1-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946
8601 베드로전 아름다운 신앙생활 벧전5:1-14  최장환 목사  2013-03-13 4132
8600 데살로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후2:1-17  최장환 목사  2013-03-13 3987
8599 창세기 대내전에서 이겨야 대외전에 승리할 수 있다. 창14:12-24  김경형 목사  2013-03-13 1947
8598 로마서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롬5:14  민병석 목사  2013-03-12 2670
8597 로마서 죄와 율법 롬5:13  민병석 목사  2013-03-12 2097
8596 로마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롬5:12  민병석 목사  2013-03-12 2088
8595 로마서 구원받은 자의 생활 롬5:9-1  민병석 목사  2013-03-12 1990
8594 로마서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롬5:5-8  민병석 목사  2013-03-12 2258
8593 로마서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롬5:3-4  민병석 목사  2013-03-12 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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