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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은...

빌립보서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213 추천 수 0 2013.03.14 21:56:04
.........
성경본문 : 빌3:10-1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내가 원하는 것은..."

빌립보서 3:10-14

2007년 4월 7일(토, 부활절) 텔아비브교회

 

제가 아는 유대인 친구가 이스라엘엔 봄이 없다고 하더군요. 춥다가 따뜻해지다가 춥다가 따뜻해지다가 갑자기 더워지는 여름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날씨를 보면 그 친구 말이 맞는 것도 같은데, 잘 보면 이스라엘에도 봄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집 앞에 나무들이 있는데, 그 나무들을 보면 언제가 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제요? 겨우내 잎들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 위에 어느새 파란 잎사귀가 솟아나는 그 때, 그때가 바로 봄입니다. 요즘이 그 때지요. 

 

봄과 함께 부활절이 찾아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계절 자체가 부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책에만 부활의 약속을 쓰신 것이 아니라 봄철 모든 잎사귀에도 쓰쎴다."라고 표현을 했지요.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렇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부활절을 맞이하는데, 지금 세상에서는 다큐멘타리 영화 한편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예수의 잃어버린 무덤"이란 다큐멘터리입니다. 고난주간이었던 지난 4일부터 디스커버리 채널을 비롯한 세계 주요 방송이 이 다큐멘터리를 일제히 방영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소재는 1980년 예루살렘의 탈피욧 지역에서 발견된 동굴 무덤입니다. 2000년된 이 동굴 안에서 10개의 관이 나왔는데 이 중 6개에 '요셉의 아들 예수’‘마리아’‘예수의 아들 유다’ 등의 비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은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키며, 유다는 말 그대로 예수의 아들을 가리킨다”면서 예수의 결혼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라면, 예수는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으며 부활하거나 승천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리로, 2004년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논란의 책 '다빈치코드' 논리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덤을 발견하고 연구해온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다큐멘터리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아모스 클로너 교수는 “이 관이 예수의 관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요셉이나 마리아, 예수라는 이름들은 기원 전과 기원 후 1세기 무렵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서 900여기의 동물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71개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 승천이 없다면 기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 바울은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3∼14)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왜 하필 사순절 기간에 이 문제가 부각됐을까하는 겁니다. 그것은 제작진의 의도가 명성과 인기, 흥행과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캔들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돈을 벌려고 하는 무책임한 상업주의의 발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빈치 코드와 이 영화 등을 보면서 사탄이 참 교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스컴을 통해 교묘하게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00%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냐고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오백명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에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대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지 못해서 나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았다고 합니다.
  보통 법정에서 어떤 사건이 사실로 증명이 되려면 증인이 몇이나 있으면 됩니까? 구약성경에는 두 세사람이면 되고, 오늘날 법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 한 사람의 증인으로 인해서 그 사건이 사실로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그 증인이 오백명이 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오백명이 한꺼번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헛것을 봤다고 하는데 오백명이 한꺼번에 헛것을 봤겠습니까? 한 두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수가 오백명이 넘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무서워서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무슨 유익이 있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부활하셨다고 일제히 말을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 핍박받고 순교까지 합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진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겁니다. 그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한결같이 부활의 증인이 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지금 여기에도 있습니다. 뭡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변화가 그 증거입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변화된 것입니다. 무슨 도를 닥아서 된 것도 아니고, 머리로 이해되서 믿어진 것도 아니예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분이 나의 죄를 씻어주셨고, 나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변화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우리들이 그랬습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뀝니다.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영생과 부활의 소망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의 변화가 생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가치관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고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베냐민 지파였고 순수한 혈통과 전통을 가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당시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해서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잘못된 열심이었지만 교회를 핍박하는 데 열심이었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게다가 다른 곳에 보면 그는 헬라어에도 능통했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퍼팩트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자랑할 만하고 소중하게 여길 만하고 유익하게 여길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이러한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무익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8절에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들보다 더 큰 가치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뭡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그 가치가 어찌나 크고 어찌나 귀한지 그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고 유익하다고 여겼고 내심 자랑했던 그 모든 것들이 쓰레기처럼 배설물처럼 여겨질 정도라는 겁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빛이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올바른 관점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게 해 준 것입니다. 그 가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두 번 만났습니다. 사람이 못되서 한번 가지고는 안되셨나 봅니다. 중 1 때 여름수련회에서 주님을 영접함으로 만났고, 21살 때 주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던 저를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 감정상태를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 거예요.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이고요. 그러면서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서울 공기가 왜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는지. 햇살이 나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고요. 자꾸만 내 입에서 찬양이 끊이질 않는 거예요.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정말 세상이 천국같은 거예요. 딱 이대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사실 달라진 것 하나도 없어요. 달라졌다면 내가 달라진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니까, 세상보다 훨씬 크신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니까 세상이 달라져 보였던 것예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예수님이 나의 가장 큰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아는 것,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귀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가장 소중하고 귀한 가치라는 고백, 이 고백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후로 그에게 가장 귀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을 풀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기 원합니다. 또한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기 원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알기를 원합니다. 무엇을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는 겁니다. 또한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 원한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 모릅니까? 그분의 부활을 능력을 모릅니까?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까? 압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간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기를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다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삶 속에 지향하고 있는 궁긍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말로만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귀하기에 더욱 더 알기를 원하다는 것이지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면 서로를 더욱 더 알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에 무관심한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그것이 히브리어든 헬라어든 그 의미는 상당히 깊습니다. 그저 피상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과 친교에서 오는 지식을 말하고 심지어는 부부간의 성적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깊은 지식을 말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처럼 깊은 이해, 체험적으로 알고,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통해 알고,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깊은 지식은 단순한 지식으로 끝나질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지식은 받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분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생각과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살아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변화를 가장 가까운 데서 봅니다. 바로 아내에게서입니다. 다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작년에 인간관계에서 참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고 큰 상처를 받았지요. 그러던 중에 정독에 가까운 성경일독을 했고, 중보기도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욱 더 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상처도 치유되고, 영성도 회복되고 평안도 되찾고 기쁨을 누리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픈 곳을 말씀하시면 아프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하고 싶고 힘들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에 결국은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그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전 존경합니다. 이건 팔불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고 그 앎이 변화로 이어지길 소원하는 아내라면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정말 팔불출이 될 것 같아 여기서 끝내고, 결국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능력으로 내가 더욱 더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사도 바울이 알고자 하는 두번째,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연결이 됩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만 아는 차원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항상 살아있는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살아계셔서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여 죽음에서 부활로 이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영성을 소생시켜 주시고, 나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그런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때로는 도덕적으로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거나 상처받아 아파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셔서 그 부활의 능력으로 나의 병든 도덕성과 바닥으로 떨어진 영성을 회복시켜 주시는데 그러한 능력을 항상 체험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입니다.

  제가 원래 전공은 경제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돈버는 데는 관심이 없었어요. 경제학은 내 은사가 아니다 판단하고 군제대 후에 복학했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새로 시험을 봤었지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일이었는데, 책을 정리하다 보니까 전에 다니던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두 권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반납일이 이미 일년이 지났어요. 그리고 반납일이 지나면 하루에 벌금이 50원씩이었습니다. 두권이니까 하루에 100원, 일년이니까 36,500원이었습니다. 그때가 90년이었으니까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전 같았으면 그냥 슬쩍 눈 감았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도서관 근처에 가서 슬쩍 놓고 오던가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까 마음이 편칠 않은 거예요. 자꾸 속에서 누군가 찌르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책 두권을 반납하면서 벌금을 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할인 받았어요. 도서관 직원이 하는 말이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반납일이 일년이 지났는데 책과 벌금을 가지고 온 학생이 처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할인 받고 오천원만 내고 왔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저의 도덕성을 일깨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닫았다면 한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또 그랬을 겁니다. 그러면서 더욱 무뎌지겠고 타협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그 때 저의 도덕성을 일깨워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덮어두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속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 우리만이라도 도덕적으로 산다면, 우리 사회의 4분의 1은 도덕성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서 우리의 무뎌진 도덕성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회복시켜 주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스라엘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어딘지 아세요?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있는 베드로 수위권 교회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일단 호수 옆이라 좋지요. 그것보다는 그곳이 요한복음 21장이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와 제자들, 그 죄책감과 상처를 안고 영적으로 완전 바닥으로 떨어진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다시금 사명을 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영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소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도덕적인 갈등도 있었을 것이고 사역의 어려움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오는 영적 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힘 주셨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더불어 앞로의 삶 가운데서도 그러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뎌지기 쉬운 도덕성을 회복시켜 주시고, 상처받아 침체되기 쉬운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를 원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절이 바로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즉 내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분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이전에는 나 중심적이었고 이기적인 소망에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모습을 다 버리고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받는 고난, 그러다가 받는 희생 역시 기쁨으로 받게 해달라는 소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처럼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는 겁니다. 참 멋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고,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라면 그것은 예수를 자기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아가 살아있습니다. 여전히 나 중심적인 생각이 있고 이기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과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만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렵다고요? 어렵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역시 어렵더라도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소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바울의 유일하고 가장 간절한 소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를 영원히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을 12절에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가 영원히 붙잡으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생기게 하고 이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 준 원동력이 누구였냐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기를 붙잡고 계시고 그 길로 이끌고 계시기에 나 역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원히 붙잡기 위해, 더욱 알기 위해 앞으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죄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가장 가치있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자 힘써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 그분의 말씀가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아 우리의 무뎌진 도덕성과 영성이 회복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우리가 있는 곳이 좀 더 정직해지고 좀더 깨끗해지고 좀 더 성령충만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아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성숙한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마음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사도 바울을 붙잡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끄신 것처럼 우리도 붙잡고 계시고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자 하는 그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원히 붙잡는 복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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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1 마태복음 너는 반석이라 마16:13-20  류공석 목사  2013-03-15 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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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9 사도행전 부활후 사십일 동안 행1:1-11  류공석 목사  2013-03-14 3339
» 빌립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빌3:10-14  류공석 목사  2013-03-14 2213
8617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29  류공석 목사  2013-03-14 2682
8616 창세기 하늘나라 퍼즐 맞추기(Puzzle Game of Heaven) 창3:20-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542
8615 요한계시 천국의 은유(Metaphors of Heaven) 계1:9-2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82
8614 요한복음 태초에 천국이 있었다(In the Beginning Was Heaven) 요18:36-37  김영봉 목사  2013-03-13 2064
8613 마태복음 감추어진 보물(A Hidden Treasure) 마13:44-46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2
8612 요한복음 예배가 정의에 앞선다(Worship Precedes Justice) 요4:24  김영봉 목사  2013-03-13 2346
8611 로마서 마음의 문제다(It Is the Matter of Heart)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896
8610 빌립보서 성품이 길이다(Character Will Lead You) 빌1:9-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720
8609 로마서 사람이 문제다(We Are the Problem)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393
8608 로마서 세상에 긴장하라(Beware of the World) 롬12: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1
8607 요한일서 사랑의 진실(Truth About Love) 요일4:7-12  김영봉 목사  2013-03-13 2261
8606 고린도전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Those Who Live In a Different World) 고전15:12-19  김영봉 목사  2013-03-13 2182
8605 에스겔 불신과 과신 사이(Neither Under-Belief, Nor Over-Belief) 겔37:1-10  김영봉 목사  2013-03-13 2250
8604 에배소서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A Wake-up Call from Death) 엡5:8-14  김영봉 목사  2013-03-13 2828
8603 시편 재난 중에 부르는 노래(A Song In the Midst of Disaster) 시121:1-8  김영봉 목사  2013-03-13 2429
8602 마태복음 사순절의 부름(Calling at Lent) 마4:1-11  김영봉 목사  2013-03-13 2946
8601 베드로전 아름다운 신앙생활 벧전5:1-14  최장환 목사  2013-03-13 4132
8600 데살로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후2:1-17  최장환 목사  2013-03-13 3987
8599 창세기 대내전에서 이겨야 대외전에 승리할 수 있다. 창14:12-24  김경형 목사  2013-03-13 1947
8598 로마서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롬5:14  민병석 목사  2013-03-12 2670
8597 로마서 죄와 율법 롬5:13  민병석 목사  2013-03-12 2097
8596 로마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롬5:12  민병석 목사  2013-03-12 2088
8595 로마서 구원받은 자의 생활 롬5:9-1  민병석 목사  2013-03-12 1990
8594 로마서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롬5:5-8  민병석 목사  2013-03-12 2258
8593 로마서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롬5:3-4  민병석 목사  2013-03-12 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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