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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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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부활후 사십일 동안"
사도행전 1:1-11
2007. 4. 14.(토) 텔아비브교회
우리 기독교에는 절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절기가 있는데 그 중심에 해당되는 것은 역시 부활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자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절 후에는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부활절 후 50일 후에 오는 절기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이때쯤 되어서 밀을 추수하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과 오순절, 이 두 절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의 그 50일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좁혀서 질문하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후 10일 동안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질문은 40일간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것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실의에 빠져있었던 베드로를 만나셨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셨고, 마지막으로는 의심 많은 도마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왠지 복음서의 설명으로는 조금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래도 40일간 주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의 주 관심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부족한 설명에 대한 보충적 해답이 바로 본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첫째는 뭐니뭐니해도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여기서 ‘확실한 많은 증거’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원어의 뜻이 ‘확고불변한 표적’을 말합니다. 즉, 결코 의심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불변한 표적으로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우리는 확고불변한 표적으로 여깁니까?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던 것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봐야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체험적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눈으로 부활하심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볼뿐만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한번 이상은 그들과 함께 먹기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40-41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음식을 더불어 드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유령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진 분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오감(五感)을 통해 부활하심이 확인될 수 있도록 그들의 눈과 귀와 손에 몸소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거나,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강한 믿음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 앞에는 모진 핍박과 고난, 순교의 잔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 주저앉지 않고 담대히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40일간의 부활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와 손, 오감을 통해 확인된, 그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불변한 부활의 표적이 있었기에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이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져버리거나 흔들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이자 중심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 두번째는, 40일 동안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3절 끝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하나님 나라,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메시지의 요지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할꼬...”, “천국은 이러하니라”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병자를 고쳐주시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이나 효과적인 훈련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몰랐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체험한 후에는 훨씬 명확하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전에 뿌였게 보였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 확실하게 보였고, 그전에는 어렵게만 들렸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손에 잡히는 현실로 느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럴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 가득한 이른바 천국비유장이라고 불립니다. 13:31-32절에 보면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을까요? 아닐꺼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거나, 알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니까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오기 전까지는 겨자를 나무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성지순례를 오신 분들이 사가지고 간 겨자씨는 그것을 심으면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교회 마당에 심어놓고는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보며 은혜를 받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에 와서 알아보니까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이전에 사갔던 그 겨자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씨라는 겁니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결과 예수님 당시에 비유로 사용하셨던 겨자는 다년생 풀에 해당된답니다. 꽃모양을 보면 유채와 비슷히게 생겼어요. 저는 제주도에서 3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유채와 겨자를 구별할 줄 나는데 유채는 꽃 아래에 씨낭이 있고 겨자는 그렇질 않습니다. 겨자는 좀 더 줄기가 얇고, 대신 무리를 지어 자랍니다. 크기는 크게 자라면 약 2미터 가까이 큽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겨자가 자라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갈릴리에 가면 이맘 때 겨자꽃이 많이 피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것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겨자꽃이 피는 이맘 때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들 알고 있고 바로 앞에 눈에 보이는 겨자를 비유로 드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씨가 자라 다른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될리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시는 겁니다. 모두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된다고? 겨자는 잘 자라봐야 2미터인데, 어떻게 나무로 자란다는 것이야?'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무나 익히 아시는 겨자인데 왜 이렇게 비유를 하셨을까요? 무언가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겨자는 그 크기가 다 자라도 이미터밖에 되지 않는 다년생 풀입니다. 대개 무리져서 피가 때문에 그 안에 새들이 깃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겨자 위에 새들이 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을 깨드린 것입니다. 즉, 이런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겨자는 자라야 이미터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단다. 그래서 너희는 겨자를 보며 기껏 자라봐야 이미터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상식을 뛰어넘어 큰 나무가 된단다. 마치 겨자의 상식이 이미터라면 그 상식을 뛰어넘어 나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들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 비유의 참 의미를 알았냐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이상한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때서야 제자들은 무릎을 쳤을 겁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식을 깨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모진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자라나 사람의 예상과 상식을 깨고 큰 나무가 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와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소수의 무리들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15억이 넘는 사람들로 확장이 된 것입니다. 겨자씨 하나에 큰 나무의 비전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력, 부활의 소망이 겨자씨를 나무로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이후 이러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행여 핍박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미약하나 후에 큰 나무가 될 겨자씨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어떤 면에서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었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오실 주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 소망, 그 비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스라엘 땅 텔아비브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소망이요 비전입니다. 지금은 겨자씨 한알처럼 미약하지만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이고,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지난 주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 13명, 어린이 12명, 모두 25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격려와 힘을 주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단순히 모인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또 그분들을 통해 새로운 식구가 한 분 오셨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일하시는 그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그 선하시고 능하신 손길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비전이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비전, 멋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청년들을 지도했었는데, 그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비전이었습니다. 단순히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잘 벌고 결혼하는 그런 것이 비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셨던 그 꿈을 갖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청년들이 알기를 원했고, 청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의 드릴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랬을 때 청년들이 일어서는 것을 봤어요. 청년들이 비전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청년들이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비전을 놓고 기도합니다. 헌신하겠다고 기도합니다. 해외단기선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고 어떤 친구들은 월세방 보증금을 뻬서 내기도 합니다. 그 돈 제가 받았을까요? 받았어요. 그리고 단기선교가 끝난 후에 남은 예산으로 다시 돌려줬어요. 그 청년이 안받으려해요. 그래서 그랬죠. "하나님께서 네 마음 다 받으셨다. 그 마음 가지고 살아."
비전이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비전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시작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꽉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을 드렸고, 물질을 드렸고, 시간을 드렸고, 생명을 드렸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핍박, 그리고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확장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 없는 비전은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는 비전은 허망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꿈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 비전이 있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지고,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있는 꿈의 사람들, 대가를 치르는 꿈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되어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그리고 세번째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4-5절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성령에 대해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셨고, 16절과 17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승천을 앞두고 슬퍼하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이 말씀을 주시며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곁을 떠나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나는 성령을 통해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라는 위로와 확신의 말씀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 후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강림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 결과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이 세 가지가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의 주님의 행적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훈련시키시고,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40일간의 주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입니까?
8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사역의 목적은 ‘증인됨’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훈련된 이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주님의 목적은 ‘증인됨’이었습니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목표는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3:14-15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매우 확신있는 선포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선포한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 그리고 이름없는 성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죽음 앞에서까지 증인됨의 사명을 담대히 감당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직접 세상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이것에 성도들과 교회는 일차적인 우선순위를 두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요 모체가 되는 교회를 든든히 세워 나가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맡겨진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증인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40일 동안의 주님의 사역에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부활에 대한 확고불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활에 대한 신앙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훈련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말씀의 훈련, 기도의 훈련, 삶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군인들도 훈련 잘 받은 사람이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고, 승리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철저한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감당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에서 승리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증인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고, 훈련받았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사람들, 부활의 증인들로 가득 차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새로운 부흥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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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11
2007. 4. 14.(토) 텔아비브교회
우리 기독교에는 절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절기가 있는데 그 중심에 해당되는 것은 역시 부활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자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절 후에는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부활절 후 50일 후에 오는 절기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이때쯤 되어서 밀을 추수하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과 오순절, 이 두 절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의 그 50일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좁혀서 질문하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후 10일 동안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질문은 40일간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것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실의에 빠져있었던 베드로를 만나셨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셨고, 마지막으로는 의심 많은 도마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왠지 복음서의 설명으로는 조금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래도 40일간 주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의 주 관심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부족한 설명에 대한 보충적 해답이 바로 본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첫째는 뭐니뭐니해도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여기서 ‘확실한 많은 증거’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원어의 뜻이 ‘확고불변한 표적’을 말합니다. 즉, 결코 의심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불변한 표적으로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우리는 확고불변한 표적으로 여깁니까?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던 것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봐야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체험적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눈으로 부활하심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볼뿐만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한번 이상은 그들과 함께 먹기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40-41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음식을 더불어 드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유령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진 분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오감(五感)을 통해 부활하심이 확인될 수 있도록 그들의 눈과 귀와 손에 몸소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거나,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강한 믿음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 앞에는 모진 핍박과 고난, 순교의 잔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 주저앉지 않고 담대히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40일간의 부활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와 손, 오감을 통해 확인된, 그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불변한 부활의 표적이 있었기에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이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져버리거나 흔들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이자 중심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 두번째는, 40일 동안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3절 끝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하나님 나라,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메시지의 요지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할꼬...”, “천국은 이러하니라”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병자를 고쳐주시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이나 효과적인 훈련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몰랐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체험한 후에는 훨씬 명확하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전에 뿌였게 보였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 확실하게 보였고, 그전에는 어렵게만 들렸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손에 잡히는 현실로 느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럴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 가득한 이른바 천국비유장이라고 불립니다. 13:31-32절에 보면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을까요? 아닐꺼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거나, 알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니까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오기 전까지는 겨자를 나무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성지순례를 오신 분들이 사가지고 간 겨자씨는 그것을 심으면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교회 마당에 심어놓고는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보며 은혜를 받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에 와서 알아보니까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이전에 사갔던 그 겨자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씨라는 겁니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결과 예수님 당시에 비유로 사용하셨던 겨자는 다년생 풀에 해당된답니다. 꽃모양을 보면 유채와 비슷히게 생겼어요. 저는 제주도에서 3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유채와 겨자를 구별할 줄 나는데 유채는 꽃 아래에 씨낭이 있고 겨자는 그렇질 않습니다. 겨자는 좀 더 줄기가 얇고, 대신 무리를 지어 자랍니다. 크기는 크게 자라면 약 2미터 가까이 큽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겨자가 자라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갈릴리에 가면 이맘 때 겨자꽃이 많이 피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것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겨자꽃이 피는 이맘 때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들 알고 있고 바로 앞에 눈에 보이는 겨자를 비유로 드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씨가 자라 다른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될리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시는 겁니다. 모두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된다고? 겨자는 잘 자라봐야 2미터인데, 어떻게 나무로 자란다는 것이야?'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무나 익히 아시는 겨자인데 왜 이렇게 비유를 하셨을까요? 무언가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겨자는 그 크기가 다 자라도 이미터밖에 되지 않는 다년생 풀입니다. 대개 무리져서 피가 때문에 그 안에 새들이 깃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겨자 위에 새들이 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을 깨드린 것입니다. 즉, 이런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겨자는 자라야 이미터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단다. 그래서 너희는 겨자를 보며 기껏 자라봐야 이미터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상식을 뛰어넘어 큰 나무가 된단다. 마치 겨자의 상식이 이미터라면 그 상식을 뛰어넘어 나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들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 비유의 참 의미를 알았냐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이상한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때서야 제자들은 무릎을 쳤을 겁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식을 깨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모진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자라나 사람의 예상과 상식을 깨고 큰 나무가 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와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소수의 무리들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15억이 넘는 사람들로 확장이 된 것입니다. 겨자씨 하나에 큰 나무의 비전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력, 부활의 소망이 겨자씨를 나무로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이후 이러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행여 핍박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미약하나 후에 큰 나무가 될 겨자씨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어떤 면에서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었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오실 주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 소망, 그 비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스라엘 땅 텔아비브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소망이요 비전입니다. 지금은 겨자씨 한알처럼 미약하지만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이고,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지난 주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 13명, 어린이 12명, 모두 25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격려와 힘을 주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단순히 모인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또 그분들을 통해 새로운 식구가 한 분 오셨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일하시는 그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그 선하시고 능하신 손길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비전이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비전, 멋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청년들을 지도했었는데, 그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비전이었습니다. 단순히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잘 벌고 결혼하는 그런 것이 비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셨던 그 꿈을 갖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청년들이 알기를 원했고, 청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의 드릴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랬을 때 청년들이 일어서는 것을 봤어요. 청년들이 비전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청년들이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비전을 놓고 기도합니다. 헌신하겠다고 기도합니다. 해외단기선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고 어떤 친구들은 월세방 보증금을 뻬서 내기도 합니다. 그 돈 제가 받았을까요? 받았어요. 그리고 단기선교가 끝난 후에 남은 예산으로 다시 돌려줬어요. 그 청년이 안받으려해요. 그래서 그랬죠. "하나님께서 네 마음 다 받으셨다. 그 마음 가지고 살아."
비전이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비전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시작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꽉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을 드렸고, 물질을 드렸고, 시간을 드렸고, 생명을 드렸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핍박, 그리고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확장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 없는 비전은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는 비전은 허망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꿈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 비전이 있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지고,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있는 꿈의 사람들, 대가를 치르는 꿈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되어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그리고 세번째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4-5절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성령에 대해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셨고, 16절과 17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승천을 앞두고 슬퍼하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이 말씀을 주시며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곁을 떠나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나는 성령을 통해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라는 위로와 확신의 말씀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 후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강림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 결과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이 세 가지가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의 주님의 행적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훈련시키시고,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40일간의 주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입니까?
8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사역의 목적은 ‘증인됨’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훈련된 이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주님의 목적은 ‘증인됨’이었습니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목표는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3:14-15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매우 확신있는 선포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선포한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 그리고 이름없는 성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죽음 앞에서까지 증인됨의 사명을 담대히 감당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직접 세상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이것에 성도들과 교회는 일차적인 우선순위를 두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요 모체가 되는 교회를 든든히 세워 나가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맡겨진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증인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40일 동안의 주님의 사역에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부활에 대한 확고불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활에 대한 신앙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훈련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말씀의 훈련, 기도의 훈련, 삶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군인들도 훈련 잘 받은 사람이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고, 승리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철저한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감당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에서 승리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증인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고, 훈련받았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사람들, 부활의 증인들로 가득 차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새로운 부흥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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