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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전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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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전도서 5:1-7
2007. 4. 21.(토) 텔아비브교회
어느 노모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아들과 할머니 간에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들은 교회에 가기 싫다는 것이고 노모는 가야된다는 것이지요. "왜 교회 가기 싫다는 것이니?" "예배도 밋밋하고 장로들도 못되고 교인들도 사랑이 없고... 그래서 싫어요." 그러자 노모가 대답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되지 않니? 교회는 사람을 보고 다니면 안되요.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에 가야하는 이유는 네가 목사이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서는 참 고약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목사가 교회에 가기 싫을 때가 있을까요? 저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목회 경험을 해보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떤 때요? 어떤 일이나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래도 가야죠. 목사인데.
교인들이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맡겨진 일에 대한 부담감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중압감이 그 이유일 겁니다. 또 하나 있지요.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교회에 나가기 싫은 이유가 될 때는 교회의 예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예배에서 문제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이 참된 예배자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로 준비되어 있으면 왠만한 예배는 은혜가 됩니다. 반면 우리 자신이 예배자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 아름다운 성가가 있다할지라도 은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말씀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은 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지만 사모함도 없이 그저 말 꼬투리를 잡으려고 들은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논쟁거리가 되고 고발거리가 되고 걸림돌이 되어 급기야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는 악한 마음으로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들도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야 하겠고, 성가대나 기도자나 헌금위원 등 모든 예배담당자들도 기도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지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고자 사모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나가기 싫은 교회가 되질 않길 바랍니다. 가고 싶은 교회, 교회에 너무나 가고 싶고, 예배가 너무나 드리고 싶고, 또 우리 서로가 너무나 보고 싶은 교회, 그래서 일주일이 칠년처럼 느껴지는 그런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으신가요? 사실 설교를 준비하는 것 자체는 참 힘들 때가 많아요. 그냥 설교가 턱하고 주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씨름하고...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그렇지만 나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면 그 힘든 수고가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가 기다려집니다. 저 역시 이스라엘에 3년여 살면서 한국보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느꼈기에 예배가 참 그리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그리워집니다. 보고 싶어요. 이건 진짜입니다. 담임목사가 성도들 예배에 나오게 하려고 하는 말 아닙니다. 정말 보고 싶어요. 여러분들도 그러신지 모르겠네요.
예배 드리는 것이 사모되어지는 교회, 서로를 보고 싶고 섬기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교회, 그래서 교회 가는 것이 기다려지고 사모되어지는 그런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예배 드림에 있어 어떤 자세로 해야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너의 발을 삼가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갈 때 먼저 자신이 예배 드리기에 준비되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되어서 예배 드리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예배를 위한 준비는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오펠가든이라고도 하고 'Jerusalem Archiological Park', 예루살렘 고고학 공원이라고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통곡의 벽 옆인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예수님 당시에 성전으로 올라갈 때 이용되었던 계단이 있습니다. 그곳엘 가면 계단 폭이 하나 간격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단 하나는 폭이 넓고 하나는 좁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왤까요?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설계하고 만든 겁니다. 그 이유는 예배 드리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준비 안된 모습으로, 혹은 늦었다고 허겁지겁 가지 말라는 겁니다. 계단 폭이 다르니까 빨리 뛰어가기 어렵고, 주의해서 걸어야 하니까 저절로 자신을 돌아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마음 자세를 다잡고 성전에 올라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계단 아래쪽에 '미크베'(מקווה)라고 하는 정결의식 때 쓰는 욕조가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전에 몸을 씼는데 보통 하루에 두번 정도 씻어다고 합니다. 그런 정결의식용 욕조가 계단 아래에 있습니다. 즉 예배 드리러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올라간다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교회 입구 계단 폭을 다르게 만들고 한편에 미크베를 만들고 싶지만, 무엇보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는 계단과 미크베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기 전에 일주일 간에 삶을 돌아보고 합당치 못한 부분들이 있거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위한 기도를 드림으로 예배를 준비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미크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주일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미크베가 우리 모두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1절 상반절이 예배 드리기 전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면, 하반절에서는 예배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매한 자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왜 하나님을 찾는가,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배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이 말씀은 사무엘 상 15:22-23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고 예배의 이유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지치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당연히 찾아야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찾을 때 우리를 받아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찾아야죠.
그러나 단순히 우리의 그러한 삶의 문제만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가끔 어떤 이들은 자신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부와 출세, 명성과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요즘으로 하면 헌금을 드립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사람들을 예배자라고 부르지 않고 우매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빌고 복채를 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예배, 자신의 욕심과 이익만을 구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점치는 것가 같고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분명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우상숭배의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물질적인 욕심을 이루어주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할 때, 또한 "주의 말씀이오니 제가 따르겠나이다."라는 자세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예배자의 복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예배자의 복과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 한가운데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Knowing God",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자의 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들도 풀리게 되는 축복이 덤으로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잖아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 가까이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고,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덤으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로 설 때 우리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시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복과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로 흘러들어가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다시 1절 하반절로 돌아가서 보면 "우매한 자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왤까요?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의 유익이요 탐욕을 이루는 겁니다. 예배가 그러한데 세상에서의 삶도 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합니다.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은 관심없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덥썩 집어먹습니다.
결국 예배와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면 삶도 잘 못됩니다. 예배가 죄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예배가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죄가 되면 우리의 삶 역시 죄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바로 되면 우리의 삶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의 삶은 분명 다릅니다.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져요. 그러면 삶 자체가 예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예배가 참 예배가 되어지고,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되어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된다면 우리의 직장도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캠퍼스도 그렇게 될 수 있고,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예배에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타협을 이기게 해주는 능력이 예배에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바로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뜻입니다.
더불어서 본문은 우리에게 한가지 주의 사항을 권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인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키지도 못할 말 함부로 하지 말고 더불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으며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두 가지, 첫째는 말 함부로 하지 말고, 함부로 서원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또 신앙생활하면서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의미있고 덕이 되는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말도 많이 합니다. 말을 안하고 살 수는 없지만 말이 많으면 3절처럼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납니다. 우매한 자의 소리가 무엇일까요? 지키지도 못할 말, 남을 욕하고 험담하는 말, 스스로 교만한 말들일 겁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하고, 허풍이나 과장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또한 말이 많으면 남을 험담하기도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도 하게 됩니다. 말이 많으면 스스로 우쭐해져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가르켜 성경은 우매한 자,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 하지 말라고요? 말을 적게 하라고요? 말해야죠. 또 말로 푸는 것도 있잖아요. 이 말씀은요, 우리의 언어생활이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거듭나야 하듯 우리의 언어생활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덕이 되는 말, 남을 세워주는 말, 지킬 수 있는 말, 믿음이 가는 말, 정직한 말, 겸손한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6절에 보면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의 말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입으로 짓는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조심하라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말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교인들 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 역시 말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다.
며칠전 버지나아 텍에서 두 자루의 권총으로 33명을 살해한 조승희 씨의 경우도 보면, 학생시절 같은 반 학우들에게 따돌림과 상처를 많이 받았답니다. 누구도 격려해주거나 가까이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은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완전해 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기도합시다. 그리고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 입술이 거듭나게 하옵소서. 내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정결케 해주시옵소서. 나의 말이 그리스도 우리 주님처럼 남을 살리는 말, 남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말을 통해 상처받은 이들이 회복되고, 나의 말을 통해 낙심한 자들이 힘을 얻고, 나의 말을 통해 절망한 자들이 꿈을 꾸게 하옵소서. 나의 말이 오직 주님을 높이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말이 되길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합시다. 그리고 노력합시다. 그러다가 혹 실수하거든 좌절하지 마세요. 실망하지 마세요. 더 엎드리세요. 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말을 많이 하지요. 기도와 관련해서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도 없는 내용의 기도, 전혀 마음에도 없는 약속, 찬양, 마치 주문 외우는 것처럼 마음에는 없고 그저 입으로만 흘러나오는 그런 기도를 말합니다. 제일 중언부언이 되기 쉬운 기도가 무엇인지 아세요. 식사기도. 어쩔 때는 좀 전에 기도했는데 또 기도해요. 중언부언이지요. 우리의 한 마디 한 마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진실되고 의미있는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더불어서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지 말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데, 서원한 것이 있으면 갚기를 더디하지 말고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서원이라는 것도 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몇 가지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가 기억에 나는데, 하나는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는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부를 다닐 때 중 3 때 학생회 부흥회가 있었는데, 그때 부흥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드릴 사람들 일어나라는 겁니다. 몇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양이 안차셨는지 학생회 임원들 다 일어서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학생회 총무였거든요. 일어났지요. 그랬더니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서 기도하랍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받아주시옵소서." 서원을 하고 만 겁니다. 그리고 그 서원이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저의 어머니께서 서원하신 것도 있었고, 청년기에 주님을 새롭게 만나면서 주님께 쓰임받기를 사모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서원을 타인에 의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루어졌고요, 하나는 서원하고 이루지 못한 것인데, 제가 29살 때 예수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머물면서 기도를 하던 중에 독신으로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길 독신으로 살면서 헌신하겠다고 서원을 하고 만 것이지요. 그리곤 3년후인 32살 때 결혼을 하고 말았어요. 그 때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아무도 예수원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거긴 독신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 분위기에 휩싸인 듯 합니다. 어찌되었든 그것으로 인해 참 오랜 기간동안 회개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서원했거든요. 서원한 것을 갚지 못했으니 회개할 수밖에요.
제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혼 전에 그 응답을 받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함부로 서원하고 갚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함부로 서원하지 않고 있고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신중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할수는 있지만 함부로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분위기 때문에 하거나, 잠시 잠간의 감정 때문에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서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마음에 어떤 마음이 생기면 차라리 이렇게 기도하시길 권합니다. "하나님, 이러한 것을 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소원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분명하게 이끌어 주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면 우리가 서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 서원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왜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신중하게 하고, 서원한 것은 갚아야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말과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에 맹세한 것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어떤 약속이라는 것은 인격과 인격이 만나 이루어지는 계약입니다.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하거나 서원하는 것은 인격 대 인격으로 하는 것이기에, 서원함에 있어 신중해야 하고, 서원을 했다면, 그 서원은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겠지요.
2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고 언제 넘어질 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함부로 무엇을 서원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다시 예배로 돌아가게 됩니다. 7절입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어다."
전반절에 있는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꿈이 많으면 헛됨도 많고 말도 많아진다"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는 "꿈과 말이 많은 것은 헛되다"는 의미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뒤의 말씀입니다.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어다"
"많은 꿈과 많은 말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오직 너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히 꿈 자체가 무의미하고 꿈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가 없는 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이 꿈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고 헛된 것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꿈을 가지게 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표나 꿈, 비전을 가질 수 있고, 그 꿈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꿈이 크고 많다 한들, 아무리 훌륭하고 그럴듯하게 그 꿈에 대해 말을 한다한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멋진 계획과 약속을 한다 한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자세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꿈보다 중요하고 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 경외가 없이 꿈을 이야기 한다면 그 꿈은 그저 자신만의 야망이나 욕심일뿐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꿈에 대해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꿈을 위장한 욕심, 비전을 위장한 야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신의 소원과 꿈을 말하기 전에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아간다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나의 꿈과 비전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소원과 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되고 내 꿈이 하나님의 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꿈이 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꾸는 꿈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고, 그러므로 그 꿈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의미없는 계획이나 말을 삼가게 됩니다. 늘 기도하며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하기에 말도 신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갖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비전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꿈과 비전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알려주셔서 그것이 우리 교회의 꿈이 되고 비전이 되고 목표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꿈과 비전이 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의 꿈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예배자들이고,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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