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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3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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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천국을 사는 사람들
사도행전 2:37-47
2007. 5. 26.(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 성령강림주일(샤브옷)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절기는 유대교 절기인 샤부옷(שבועות)과 관련이 있고, 샤부옷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칠일 혹은 한주간을 뜻하는 단어인 שבוע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복수형태입니다. 유월절이 끝난 후 칠주 후에 오는 절기이기에 그렇게 불러졌고, 그래서 성경에서는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정확하게는 유월절이 끝난지 오십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절기에 대해서는 레위기 23장에 나오는데, 이 날에 두번째로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나옵니다. 유월절에 보통 보리를 수확하고, 샤부옷 때 밀을 수확하는데,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는 추수감사절기이고, 지금까지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샤부옷 때 키부츠에 가면 샤부옷 행사를 합니다. 커다란 농기계들의 퍼레이드도 있고, 추수감사를 표현하는 포퍼먼스나 춤들이 공연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레위기에서부터 전해져온 전통입니다. 그리고 룻기에 보면 룻이 베들레헴 지경의 보아스의 밭에서 알곡이 떨어진 것을 줍는 기사가 나오는데, 바로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샤부옷이 되면 유대교 회당에서는 룻기 2장을 읽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샤부옷은 율법 수여의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전승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 바로 이 날이라고 합니다. 유월절에 출애굽한지 오십일째 되는 바로 그날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요약하면 샤부옷은 추수감사절과 율법수여의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의미가 사도행전에 새로운 의미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샤부옷, 성경에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바로 이 날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바로 이어진 사건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2:14절부터 나오는데, 그때는 유대교의 절기이기에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집에서 백이십명의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2:1-4). 우리가 보통 말하는 방언입니다.
방언을 직역하면 각기 다른 언어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각기 다른 외국어가 터져나와 기도를 하는데, 마침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데, 이들이 들어보니까 자기들 고장의 언어라는 겁니다. 2:7절에 보면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말하기를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서로에게 말합니다.
이 말은 갈릴리 사람들은 외국어를 알거나 말할 줄 모르는 촌사람들인데 어찌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언어를 말하고 있냐는 겁니다. 놀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 그래서 술주정하는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가 모인 유대인들 앞에서 성령에 대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그저 성질만 급하고 좌충우돌하던 베드로가 성령충만함을 받으니까 말씀을 풀어서 가르칩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말씀들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이전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모세에게 주어진 토라가 이제 성령을 통해 새롭게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진리의 영입니다. 말씀의 영입니다. 토라의 영입니다. 에스겔 36:26-27절에 보면 성령강림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즉 오순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에서의 율법 수여의 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입니다.
구약의 샤부옷이 돌판에 기록된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신약의 샤부옷은 우리의 마음판에 새롭게 해석되고 실천되어지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나 매 한가지로 심성이 악하고 죄악을 행하기에 빠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가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무엇이 죄인지 깨닫고 회개하고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으켜세우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할수록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풍성해집니다. 성령충만할수록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할수록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입니다. 말씀충만이고 순종충만입니다. 예배 충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세요. 42절에 기록되기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즉, 사도들이 성령충만해지니까 예전에는 제대로 깨닫지 못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받기를 기뻐하고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6절에 보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뭐 했겠어요? 말씀듣고 기도하고 예배드렸다는 겁니다. 즉 성령충만이 말씀충만, 순종 충만, 기도 충만, 예배 충만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모습입니다.
가끔 성령받았다는 사람들 가운데 말씀을 소홀히 하고 그저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 연구하고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해요. 그저 기도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어느 목사님은 기도하면 성령님이 말씀을 주신데요. 그냥 눈감고 성령님과 디스커션한답니다. 그럼 말씀을 주신데요. 그래서 자기는 설교원고도 작성안하고 주시는대로 한답니다. 참 대단한 분이시죠. 처음에는 참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그 분 설교를 듣다가 견딜수 없어 딱 5분만에 자리에서 뛰쳐 나갔습니다. 자기 이야기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어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말씀의 영입니다. 성령충만을 이야기하면서 말씀 연구가 없고 진리를 사모하는 자세가 없으면 신비주의가 되기 쉬워요. 그래서 뜨겁기는 한데 가벼운 신앙이 되기 쉬워요. 누가 능력있다, 예언한다, 병 고친다 하면 혹 해서 거기로 우루루 달려가기 쉬워요.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울 때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말씀을 더 사모하게 되고, 더 깨닫게 되고, 더 순종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깨닫길 원하세요? 더 순종하길 원합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사모하세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믿습니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 간구하세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내게 충만히 임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순종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늘 구하고 뜨겁게 구하세요.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세요. 순종할수록 성령충만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오순절에 새로운 율법 수여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놀라운 추수가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놀랍게도 삼천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믿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성령강림전 120명의 성도의 수가 하루 아침에 3,120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영적 추수를 합니다. 이전에 오순절에는 농작물의 추수가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오순절에는 영적인 추수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역사는 천하보다도 소중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영적 추수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선교하는 영이고, 성령충만한 성도는 선교하는 사람이고, 성령충만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중세때 교회가 성령공동체가 아닌 사람들의 이권과 권력으로 가득찬 공동체가 되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지옥같은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다시금 성령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가 성령충만해지니까 세계 선교의 불이 붙었습니다. 교회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한 교회일수록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주인되는 교회일수록 선교는 형식적인 체면치레가 되고 소모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가 됩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어떤 교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쁘고, 어떤 교회는 뱃놀이 하느라 바쁘다.' 무슨 말인지 이해 됩니까? 단호하게 말하면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예요. 그것은 자기들의 친교 모임일뿐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혼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성령께서 왜 교회에 임하셨습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영혼구원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고,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인 영혼구원입니다. 선교입니다. 그 사명에 충실했던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고, 점차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선교에 힘쓴 것이지요.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사도행전 10장 이후에는 이방인에게까지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취약점이 선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민사회가 아닌 계속적인 한인들의 이동이 있는 조금은 불안정한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교회가 잠시 이스라엘에 머무는 동안 예배드리고 한인들과 교제하는 그런 곳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과 상관없이, 여건과 상관없이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창립예배 때 우리 모두가 고백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자 하는 선교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한인 선교입니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한인들 가운데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것이고, 둘째는 청년 선교입니다. 청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셋째는 유대인과 아랍인 선교입니다. 아직은 기도단계이고 연구단계이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 사역들을 주님께서 보여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왜요? 늘 영혼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고,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말씀과 선교 외에 더불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44-4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하는 것 외에 몇가지 특징적인 것들이 추가로 나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자기 물건을 가져다가 서로 같이 사용했다는 겁니다. 즉 내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한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사회주의의 원형으로 보는데, 사회주의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데에서는 같지만 강제된 것이고, 초대 교회가 보여준 이러한 교제는 자발적인 것이었고 그 동기가 사랑이었습니다. 즉, 성령충만하고나니까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우선이었어요. 나의 이익, 내 것이 우선이었어요. 남을 위한 희생은 내키지 않았어요. 내 유일한 꿈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어요. 남을 위해 무엇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좋았어요.
그런데 성령충만하고 나니까 다른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나의 형제 나의 자매로 보이는 겁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의 형제 자매로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몸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제 자매가 생활이 힘들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그래서 무엇을 해요? 당연히 내 재산을 팔아 내 형제 자매를 도와주는 것이에요. 그리고나서 "야, 그것 내 것인지 알지? 그것 내 돈으로 해 준 것이니까 나중에 갚아." 이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연히 할 일 한 것이고, 그리고 잊어버리는 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 보면 참 감사해요. 매주 금요일마다 청년들 섬기는 것 쉬운 것 아니거든요. 그런데 참 즐겁게 섬겨요. 청년들에게 뭐라도 먹이려고 애써요. 혹 허할까봐 삼겹살 사다가 먹이시죠, 어디 한 곳이라도 보여주려고 좀 쉬고 싶은데 청년들 태우고 다니셔요.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나 생각해요. 어떻게든 도와주었으면 해서 늘 기도해요.
그런데 아무도 나중에 청년들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하시는 분들이 없어요. 해주고 나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도 이렇게 해'라고 하시는 분들이 없어요. 한결같이 청년들이 사랑스러워서, 너무나 귀해서, 해주고 싶고 주고 싶고 섬기고 싶어서 하시는 겁니다. 정말 내 동생같고 조카같고 아들 딸 같아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청년 중에 한명은 우리 교회가 가족 분위기여서 너무 좋다고 해요.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와 같은 교제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거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아요. 내 것을 내 놓기를 기뻐해요. 왜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내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42절에 '교제하며'라는 단어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교제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깊이 있는 교제를 뜻합니다. 깊이 있는 교제란 자기의 소유로 서로를 섬기는 것 외에 서로 다름을 극복하고 하나로 만들어가는 교제를 말합니다. 즉, 교회 역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업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신앙스타일이나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참 힘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인간적인 갈등이나 분파가 생기기 쉬운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양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부부관계와 같아요. 부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여가 어느날 갑자기 같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것 같지만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상처도 받고 위기도 생깁니다. 부부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부가 되려면 서로 노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연애감정으로, 신혼의 달콤한 감정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해하려는 노력, 양보하고 배우자를 세워주려는 노력, 지금까지는 사랑해서 사랑했지만 이제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의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부부관계는 힘들어지고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냥 같이 사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다릅니다. 기질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것이 편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안된다면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충만할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지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게 됩니다.
가끔 성령께서 저를 괴롭히실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특히 상대방이 저에게 무례하게 하거나, 모함을 하거나 해를 끼칠 경우 그렇습니다. 예전 같으면 안보면 끝인데, 성령님께서 자꾸 저를 괴롭히십니다. 용서하라는 겁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먼저 이해하고 먼저 다가서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럴때면 정말 괴로워요. 그런데 그런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요. 이럴 때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덜 괴로운 쪽으로. 그런데 덜 괴로운 쪽을 택하면요 갑자기 마음이 편해져요. 이젠에 있던 미움, 아픔들이 사라져요. 평화가 와요. 신기하죠?
성령충만은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성령의 뜻은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다름을 뛰어넘어 한 몸처럼 사랑하며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요. 성령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우리 교회가 지금도 사랑이 넘치는 교회지만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더욱 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는 공동의 비전과 목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교제 안에 공동의 비전과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비전과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몇몇 사람들만의 비전과 목표가 아니라 전체가 같이 공유하고 같이 꿈꾸고 힘을 모아 같이 그 비전과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코이노니아라는 겁니다.
담임목사가 "여깁니다. 앞으로 갑시다!"하는데, 성도들은 "이 길이 아닌가베. 목사님이나 가세요." 이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비전과 목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비전과 목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목사와 성도들 모두가 동일한 비전과 목표를 품고 함께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 건강한 교회 아닙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있고, 비전과 목표를 함께 나누며 이루어가는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있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고,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에 성령충만한 성도, 성령충만한 교회는 말씀을 배우기에 힘쓰고 살아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선교의 영이시기에 성령충만한 성도, 성령충망한 교회는 영혼 구원에 힘을 씁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시기에 성령충만한 성도, 성령충만한 교회는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성령충만해서 세워지고 만들어진 교회가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이상하게 보였는데, 그 이상함이 거부감이 들고 역겨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고 부러울 정도여서 나도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뒤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됩니다. 그들 중에는 제사장도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에서 천국을 본 겁니다. 그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은 감동을 받은 겁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데 힘쓰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정말 친 형제 자매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더불어 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한 몸처럼 나아가는 그 모습이 마치 천국과도 같이 보였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천국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 역시 천국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겁니다.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저는 스물 한살에 천국을 경험했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그냥 하나님 예배하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고 섬기는 것이 좋았어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많아지면 그 공동체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면 우리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천국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맛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천국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47절처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교회가 맛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저는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성령충만해서 우리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주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해주는 은혜가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길 주님이 이름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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