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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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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원칙이 있는 삶 3
마태복음 6:31-34
2007. 6. 16.(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지난 두 주 동안 '원칙이 있는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기억해야 하고 지켜야할 삶의 원칙들이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이 바로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7장의 말씀이고, 그 산상수훈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6:33절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서 가르쳐 주신 것들이 결론적으로 6:33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외워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말씀으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할 삶의 원칙 중에 원칙입니다.
지난 주에 6:33을 중심으로 나누었는데, 지난 주중에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예배를 드리고나서 선교센터 입주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입주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인터넷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사무처장으로부터 온 메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2월 초에 예장 통합측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의 성지순례 안내를 한 적이 있었는데,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라 그분들을 섬기면서 제가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역시 저를 통해 은혜를 받으셨는지 저를 위해 꼭 기도하겠다고 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한 두번 정도 기도제목을 보내드렸던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교회 부임할 때, 교회를 맡게 되었으니 기도해 달라고 했었지요. 하지만 이에 대한 답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메일을 받게 된 것이지요. 메일의 내용은 여전도회 임원들이 이스라엘에서 저를 만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스라엘 선교 후원으로 저에게 후원을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총회가 9월초에 있는데 총회인준을 거친 후에 그리하겠답니다. 그런데 그 금액과 시기가 너무나 기가 막혀요. 사실 선교센타를 얻으면서, 또 앞으로 자매들 숙소도 얻어야 하는데, 그 지출이 교회로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지만, 우리 교회에 청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 믿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한 일이었는데, 입주예배를 드린 바로 그 날 후원을 하겠다는 메일을 받은 것이예요. 제가 그 메일을 받고 어떻게 했을까요? "아하! 그래, 바로 이거다!" 했어요. 말씀대로 했더니 이렇게 해주시는구나 했어요. 지난 주에 얻은 선교센터, 형제들 숙소와 자매들 숙소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금액이에요. 그리고 타이밍이 너무나 기가 막힌 것이에요.
우리가 정말 순수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 이루어주십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제 친구 목사에게 했어요.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후에 제대로 된 선교센타를 세우는 것이 우리 교회의 비전 중에 하나다 했어요. 그랬더니 제 친구 목사가 그러더군요. "기적을 만드는 교회가 되세요."
멋있지 않아요? 기적을 만드는 교회, 그래서 기적이 상식처럼 되버리는 교회,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에 근거한 삶의 원칙을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심과 불순종도 있고, 유혹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바로 염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염려, 내일에 대한 염려들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데 방해요소가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들을 무너지게 하고 원칙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염려’라는 말입니다.
'염려'는‘마음을 분열시키다’,‘어수선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를 안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을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 컵의 물이 600억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 컵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듭해서 염려를 버릴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에게 단호한 입장을 취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염려하지 말라”,“염려함으로 더하겠느냐”,“무엇 때문에 염려하느냐?”,“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그만큼 염려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염려는 안개와 같아서 염려에 사로 잡히면 아무 것도 보질 못하고 오직 염려에 사로 잡혀 그것에 눌려 살게 됩니다. 사실 염려는 문제해결에 도움도 되지 못하고 해결의 열쇠도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경우에 염려에서 자유롭질 못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염려는 대부분이 쓸데없는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S 존즈 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염려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염려의 비율은 이렇답니다.
보통 사람들이 40% 정도는 도무지 일어날듯 싶지도 않은 걱정을 하고 있고-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30%는 과거에 지나간 일에 대해서 불안 해하고 걱정을 하고 있고, 12%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평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고, 10%는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습니까? 92%가 쓸데없는 염려 걱정 근심이라는 것이지요. 정작 관심을 가지고 유의하고 걱정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8%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8%도 우리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
생각이 있으면 좀 생각 해보라는 겁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냐는 겁니다. 아니잖아요? 염려 걱정하고 있다고 해서 뭐 하나라도 나아지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염려 걱정에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보십시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을 염려하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일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내일 일은 오늘 하지 말고 내일 하라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서 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 등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정정해 놓았습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그대로 보면 "내일에 대한 것은 내일 그 자신이 염려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쉬운 듯 하면서 어려운 표현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일 일은 내가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일 자신이 걱정할 것이란 뜻인데, 쉽게 말하면 내일에 관한 것은 나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아직 오지 않은 일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지도 않은 일 가지고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오늘 최선을 다해 살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일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염려 걱정은 실제로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염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있죠? '걱정도 팔자다'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면 걱정을 하면서 땅이 꺼질 듯이 깊은 한숨을 쉬게 되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염려한다, 걱정한다’는 의미의 헬라어가‘메림나오’인데, 그 낱말이 '목을 조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 걱정이 뭐냐? 사람의 목을 조이는 것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근심 걱정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목이 조여서 숨을 못쉬다가 겨우 숨이 터져서 나올 때에 저절로 나오는 증상이‘어이~구’긴 한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숨을 쉴 때마다 수명이 팍팍 단축된다는 것 아시나요? 목을 조이니까 숨도 제대로 못쉬고 맨날 한숨만 쉬니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건강하게 장수하려면 뭘 떨쳐버려야 해요? 염려 걱정 다 떨처버려야 합니다. 92%의 쓸데없는 걱정은 당연히 떨쳐버려야 할 것이고, 나머니 8%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염려 걱정이니까 그것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고, 영적 건강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이런 의미에요. 예를 들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의 비율이 95 대 5 정도인데도, 5를 생각하는 데 95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 살면 당연히 늘 우울하고 슬프고 괴롭고 짜증이 나는 거지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5를 위해 95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의 백합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합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시지요? 보통 교회 강대상에 꽃꽃이용으로 쓰이는 백합이 아니라, 붉은 색이 주종을 이루는 칼라닛, 학명으로는 아네모네가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셨던 그 꽃입니다. 그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예수님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 본 뜻이‘철저하게 깊고 정확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뭘요? 공중의 새들과 들의 꽃들이 어떻게 먹고 자라는지를 철저하게 깊고 정확하게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에서 입히시고 먹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깨닫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요, 우리가 자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염려는 사라지게 됩니다.
어느 기독교 작가가 어린이를 위해서 쓴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는 동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날 물새가 참새에게 말했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 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참새는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물새야, 아마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동화지만, 실제로보면 참새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힘들 때, 염려 걱정이 찾아올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산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의 꽃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염려를 떨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결정타를 날리시죠?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하셨을 때는 상당한 강조가 들어있는 겁니다. 하늘의 새들와 들의 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인 너희들을 그냥 모른체 하시겠느냐는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실 때는 그것이 100% 확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내 말이 100% 옳으니까 제발 내 말을 믿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이름의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이 즐겨 사용했던 별명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티테디오스’입니다. 이것은‘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해방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티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도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를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편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지하 무덤인 카타곰에 숨어지내야만 했고, 순교까지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염려할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염려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가운데 말씀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말씀이 그들을 지배하고 말씀 중심의 삶을 사니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티테디오스 류" 우리 역시 염려로부터 자유하고 해방된 사람, 티테디오스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두번째 비결이 있는 겁니다. 첫번째는 자연에서 배우라는 것이고, 둘째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가운데 말씀으로 자신을 채웠고, 그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염려가 찾아오게 됩니다. 100% 그렇습니다. 반대로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 채워질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티테디오스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확신입니까 순종입니까? 보통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히 확신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다 믿어지고, 다 이해되고, 그래서 100% 확신이 들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아직 다 믿어지지는 않는데, 아직 다 이해되지는 않는데, 그래서 100%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살아보는 것, 그래도 순종해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 순종이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더 큰 이해와 확신을 줍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이 신앙이 쑥쑥 성장하는 겁니다. 순종을 통해 깨닫고, 그 깨달음이 더 큰 순종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교회 아무리 오래다니고 아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정작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그 사람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다는 것이,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는 것이 그 사람을 얽어매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확신이 있어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순종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니까 확신도 생기고 믿음의 성장하고, 그래서 더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역시 순종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지난 주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삶을 말씀의 실험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확신이 서질 않아도 일단 순종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종의 기쁨과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날마나 맞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질문을 해봤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정말 다 잘되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다 채워질까?’
물론 정답은 채워주신다는 것인데, 그 종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예를 바로 사도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사람입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무한히 신뢰했던 바울인데, 그의 삶을 보면 어려움과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굶주림을 자주 겪었고, 거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궁핍한 삶을 살았고, 질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오히려 있던 것까지도 포기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이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말씀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봐도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왠지 아세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궁핍과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고 그것 때문에 만족했고 감사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보다도 더욱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다보니까 자신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데, 하나님이 채워지니까 자신의 궁핍함, 고난과 핍박, 어려움 등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의 필요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으로 채워지니까 염려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 고백이 고린도후서 4:7-9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질그릇은 우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깨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고, 언제든지 염려에 사로잡히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뭐가 있어요? 보배가 있어요.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고, 세상 그 무엇보다 크시고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내가 가지고 나니까, 그분으로 채워지고 나니까, 사발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거꾸로 뜨림을 당하려도 망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속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보다 크십니다. 믿습니까?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고, 억만금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지만, 세상 보다 크시고 먹고 사는 문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만 내 마음과 영혼 가운데 채워지면 우리는 어떠한 가운데서도 자유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늘 백성들입니다. 하늘 백성은 하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삶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삶 가운데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복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며 살고, 더불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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