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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하는 이유

요한일서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493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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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4:7-12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내가 존재하는 이유
요한일서 4:7-12  
2007년 7월 21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 갈릴리 전교인 여름수련회 선상주일예배 

 

지금도 이런 말이 오가는 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철학과에서 수업을 하면 이런 질문이 교수 학생 사이에 오갔답니다.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는 존재하는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어요? 철학의 특징이 무엇이죠? 쉬운 말 어렵게 하기. 이 말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예요. 쉽게 말하면 이런 뜻이죠. 세상에 모든 존재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는 존재하는가 하는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습니다. 답은 신은 존재한다 입니다. 기독교를 믿던 안믿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존재의 오리진, 근원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에 의해 아무리 따져 봐도 존재의 근원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코아세르베이트라고 하는 물질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 생명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연을 수만번 거듭하다가 사람까지 되었다는 겁니다.
  참 대단한 믿음이죠? 저는 진화론자들을 볼 때마다 정말 믿음 좋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믿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을 믿고 있어요. 정말 대단한 믿음이예요.
  그건 그렇다 치고 코아세르베이트를 이루는 그 물질들은 어디에서 기원합니까? 그리고 지구는 어디에서 기원했습니까? 그리고 우주는 어디에서 기원했습니까? 우주의 기원을 빅뱅이라는 우주의 대폭발설로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맞다면 그럼 그 빅뱅은 어떻게 기원했습니까? 설명할 수 없어요. 우주를 이루는 삼대 요소라고 하는 공간과 물질과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진화론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진화론자들의 상당수가 결국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가능케 한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도 자신은 무신론자이지만 그의 책인 ‘시간의 역사’에서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신적인 존재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고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만 우리는 존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기간 동안만 우리는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붙들어 주시고 우주 만물의 질서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세상은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이 일차적인 존재 이유, 생명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차적인 존재 이유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고 우리의 사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분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충성되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2:20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삼으신 주님과 함께 자신이 죽었고, 그러므로 이제 자신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자신도 산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시므로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이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나의 존재가 확인되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주님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분이 주님이시고, 또한 자신은 주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찬양 아십니까? (1절은 가사만 읽음)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2절>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는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죠? 나는 없어도 주님이 곁에 있으면 나는 있고, 나는 있어도 주님이 곁에 없으면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나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저는 이 고백이 단지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한다고 믿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저를 있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제는 주님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주님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 각자의 존재의 이유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나의 존재이유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정도까지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낌없이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존재 이유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먼저 나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셨고, 내가 그분의 존재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야.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해. 그래서 나 자신과 다름없는 독생자를 너에게 주었어. 너는 나의 존재 이유야. 그만큼 너를 사랑해.”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13-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친구야.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야. 나는 사랑하는 너를 위해 죽을만큼 너를 사랑해. 친구야, 너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야.”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대 우주를 만드신 그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니, 내가 주님의 존재 이유라니.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래서 쉽게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주님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또한 주님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너무나 황홀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은혜입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기가 막힌 은혜를 깨닫고 이 은혜 가운데 거하길 바랍니다. 그 아름다운 고백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또 다른 존재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입니다. 우리 서로가 존재 이유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즉,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에서 청년들을 지도할 때 수련회를 했었습니다. 수련회 때 성찬식 후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못된 친구들이 저를 울렸습니다. 청년들이 어느샌가 저를 둘러싸더니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에게 둘려 싸여 기도하면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저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그때 목사인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첫째는 주님 때문이고, 둘째는 내게 맡겨주신 양들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없다면 제가 없는 것처럼, 양들이  없다면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들 앞에서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텔아비브 욥바 교회에 왔습니다. 여러분들 섬기라고 주님께서 저를 이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있게 해준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비록 작은 가슴이지만 여러분들 모두를 제 가슴에 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목사는 양들 때문에 존재합니다.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존재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자녀들은 부모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모 없이는 아이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녀들을 키워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한 순간이라도 부모 없이는 아이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곧 아이들의 생명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들 때문에 존재합니다. 자녀 없이 부모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키울 자녀가 있을 때 비로소 부모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제 아이들 잠자리에 들 때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준 다음에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아이들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렇게 귀하고 사랑스런 아이들을 주셔서 감사하고, 그래서 저를 아버지로 삼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나의 아들들로 태어나주어서 고맙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은 아버지로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 너희들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사랑한다. 아들들아.”

  우리 인간은 모두가 서로에게 존재이유가 됩니다. 사람 人 자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관계를 맺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분이 이것을 고슴도치에다 비유를 했어요.
  고슴도치들이 추운 겨울날에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지 위해서지요. 그런데 가까이 가면 서로의 가시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파한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지도 못하고 멀리 하지도 못한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이 바로 고슴도치들의 관계인데, 바로 우리 인간들이 고슴도치와 같답니다.
  어떻습니까? 맞는 말 같습니까? 정말 딱 맞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고슴도치같아요. 가까이 다가서고 의지하고 사랑받고 싶은데, 우리 자신에게 있는 가시에 찔려서 서로 상처를 받아요. 그래서 더 가까이 다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이 가시를 제거할 수 있는 특효약이 하나 있어요. 뭘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특효약입니다. 이 약만 제대로 먹으면 우리에게 있는 가시가 제거될 수 있어요. 그럼 우린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려고 가까이 갔다가 상처만 받고, 그래서 그나마 사랑했던 것조차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이같이가 어떤 사랑을 말합니까? 10절에 있는 것처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거절 당해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먼저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용서하고, 하나님이 나를 인내하시고 기다려주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인내하고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찾아가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용납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사랑이 쉬운가요? 어렵죠.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랑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우리의 의지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채워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으면 그 사랑에 힘입어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지면 내 자존심, 내 성질, 내 스타일 그렇게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사랑하길 원하는 데 자꾸 자존심이 앞서는 사람 있습니까? 자꾸만 내 자아가 살아나고 내 의지가 살아납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더욱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더욱 사랑하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것은 실패해도 사랑에는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실패자가 되면 안되요. 사랑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하는데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7절). 자신이 아무리 신령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귀신 쫒아내는 은사,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사랑하는데 실패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거짓말과 같습니다. 그건 자기 자랑이고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울리는 꽹과리는 시끄럽기만 하지 그 속에 텅텅 비어 있습니다.

  여러분, 좀 부족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도 괜찮아요. 방언의 은사 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나 사랑의 은사는 꼭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 사랑의 은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사이고, 누구나 욕심내어야 할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합니다. 사랑에 실패자가 되지 마시고, 사랑의 성공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러면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야, 바로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구나’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그들이 성령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고 떡을 떼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믿지 않던 사람들이 그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바로 저런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겠구나.’생각을 했고, 그래서 하루에 수천명씩 예수를 믿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러한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때문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주님을 위해서 삽시다. 사도 바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하며 이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 당신입니다. 나의 존재가 다 하는 그날까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조지 휘필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녹슬어서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고 싶다.”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그렇게 닳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두 번째 이유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에 힘입어 서로를 사랑합시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그래서 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받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 맛을 찾고 위로받고 다시 일어서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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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4 요한복음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14323 역대하 새는 나뭇가지 하나에도 둥지를 틉니다. 대하34:1-7  김필곤 목사  2010-07-09 2494
» 요한일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 요일4:7-12  류공석 목사  2013-03-15 2493
14321 히브리서 믿음과 의심 히11:1∼6  한태완 목사  2011-02-05 2493
14320 시편 고난 중에 필요한 성도의 믿음 시3:1-8  한태완 목사  2011-01-17 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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