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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용서

요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933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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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8:1-11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목숨을 건 용서
요한복음 8:1-11
2007. 7. 21.(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전교인 여름수련회 아침 기도회

 

 예전에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TV 외화 중에 ‘형사 콜롬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엉성하게 생긴 사람이 기가 막힌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왜 처음부터 형사 콜롬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오늘 사건에 대해 형사와 같은 관찰력을 가지고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결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전에 이 사건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건에는 의심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조작된 사건이라는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전날 감람산으로 가셨던 예수님께서 아침에 다시 성전에 가셔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명하겠나이까”라고 묻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선 간음한 여인을 봅시다. 이 여자는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서 끌려왔다고 하는데, 여기서부터 좀 이상합니다. 남녀가 불륜을 저지를 때는 은밀한 곳에서 합니다. 남에게 발각될만한 곳에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러브 호텔을 가보십시오. 흔히 말하는 부적절한 관계의 남녀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러브 호텔을 드나드는지 모릅니다. TV에서 보니까 들어가고 나갈 때 따로 따로 나가고, 자동차도 넘버가 알려지면 안되니까 차 넘버를 가리개로 가립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잘못된 일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떳떳하다면야 뭐 숨길게 있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숨기고 은밀하게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방문 살짝 열어두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발각되지 않을 만한 곳에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그 현장에서 잡혔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몰래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좀 이상합니다. 어쩌다 발각될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뒤의 사정을 보면 이것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범죄인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정말 간음한 현장에서 잡혔다고 하면, 그럼 남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남녀가 같이 그 짓을 했을텐데, 그럼 남자도 같이 잡혀서 끌고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경우는 여자는 물론 남자도 돌로 치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습니다. 여기서도 단순하게 남자는 도망갔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자가 좀더 민첩할 수 있으니까 도망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도망을 갔다한들 못잡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은 작았습니다. 서울의 한 동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코딱지만한 곳에서 도망간 남자를 못잡겠습니까? 게다가 옷이나 제대로 입고 도망갔겠어요. 거의 알몸으로 도망갔을 것입니다. 알몸으로 도망간 사람을 왜 못잡습니까? 충분히 잡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잡혀서 왔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습니다. 남자를 의도적으로 도망가게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냐 하면, 6절의 기록 때문입니다. 뭐라고 써있습니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여자를 잡아와서 예수님께 끌고 온 목적이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여자를 벌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음해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를 매수해 자기편으로 만들어 여자와 간음하게 하고, 그 현장을 미리 알아놓았다가 현장을 덮쳤고, 계획대로 남자는 도망가게 놔두고 여자만 잡아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리한 추측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를 보면 절대 무리한 추측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현장에서 잡힌 여자이고 율법대로 처형을 하려면 자기들끼리 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시간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놓고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의도적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자는 그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남자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이 이 사건의 전모입니다. 물론 성경 기록에는 없기 때문에 추측일 수 있지만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종교지도자들의 사악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어라 묻습니까?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명하겠나이까”
  이 말에는 어떤 사악함이 담겨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처럼 “이 여자를 돌로 치시오.”라고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창기처럼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친구로 다가가셨고, 무지렁이 같은 가난한 서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시기에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만약 간음한 여인을 앞에 놓고 “이 여자는 간음죄를 저질렀으니 율법의 조항대로 돌로 치시오.”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릴 것입니다. “뭐, 당신이 죄인의 친구고 가난한 자들의 벗이라고? 그런 사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해? 그런 당신이 무슨 죄인과 가난한 자들의 친구야? 당신같은 사람을 우리는 메시아로 믿고 따를 수 없어!”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 뻔합니다.
  백성들의 인기를 잃은 예수님을 상대하기는 무척 쉬운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지도자들이 신경쓰는 것이 여론이나 대중적인 인기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안들어도 대중적인 인기가 있을 경우 함부로 못합니다. 과거 독재정권 때 김대중 대통령이나 함석헌 옹같은 분들을 함부로 못했던 것이 그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처형을 하고 싶은 데 그들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당장에라도 잡아서 처형하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 대중적인 지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고, 그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든 처형을 하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 있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지 마시오. 여자가 너무 불쌍하지 않소”라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을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예수님의 멱살을 잡았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거요. 율법에는 분명히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치지 말라고 하는 거요.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율법을 어기는거요.”하고는 당장 끌고 가서 얼마든지 그들의 법대로 예수님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 모략에는 너무나도 음흉하고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몸이 오싹할 정도로 사악한 의도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끌고온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은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후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언 듯 예수님께서 죄를 너무 가볍게 처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여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아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여자를 다루실 때 용서는 해 주시더라도 몇마디 따끔하게 말씀하셨어야 하는데, 그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만 하십니다.
  언 듯 보면 정말 예수님께서 죄를 가볍게 처리하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를 가지고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에 대해 관대히 대했고, 죄를 묻기 보다는 위로하고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본질은 죄의 책망이나 회개의 촉구가 아니라 용서라는 것입니다. 묻지도 말고 덮어두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꾸 죄를 들춰내거나, 회개하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기독교의 본질,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죄의 책망이나 회개보다는 무조건적인 용서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너그럽게 관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그리고 나의 죄에 대해서도 관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그것이 기독교적이고,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존 업다이크라는 언론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간음은 마치 입속에 있는 침처럼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는 욕망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사악하다거나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 방식은 현대인의 귀에는 너무나 생소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성적인 죄들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것 가지고 죄 운운하냐.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관용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타임’지 커버스토리에 “성적인 부정은 유전적인 것이다”라는 제목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든 행동으로든 간음을 범하는 것은 인간이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음을 범해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자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음을 저질러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라 내 안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고가 서구의 많은 지성인과 젊은이들 가운데 만연되어 있고, 우리 사회에도 그 풍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가 확산된 데에는 인간 본성의 부패에도 원인이 있지만 서구 교회에서 죄의 관용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죄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죄없는 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죄가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죄가 없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죄는 간음죄를 말합니다. 이 여자처럼 간음죄를 범한 일이 한번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한 두명은 “나요”하면서 나올 것 같은데,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조차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왤까요? 만약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야, 너희들도 똑같은 짓을 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너희들고 간음죄를 저질렀잖아. 죄 안지었으면 돌로 쳐봐.”라고 했다면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멱살잡히고, 대신 돌맞을 겁니다. “니가 언제 우리가 간음하는 것 봤어? 너는 얼마나 깨끗하기에 그래.”하면서 몰매맞을 겁니다. 대개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을 듣고 어떠했습니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왤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을 찌르는 예리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한 능력이 있는데, 하물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능력이 왜 없겠습니까? 강한 능력과 권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그 한마디 말씀이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깊이 찌르고 들어갔습니다. 모두 가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다 까발려진 듯한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나설 수 없었고 돌을 던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여자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결코 죄를 가볍게 다루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여자여, 네가 범한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너와 같은 죄를 범하는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돌을 맞으마. 내가 너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주마. 그러니 딸아 안심하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죄를 가볍게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받는 쪽에서는 “아, 이럴 수가”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용서하는 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한 용서입니다. 여자는 너무나 쉽게, 정말 희안한 방법으로 용서받았지만, 용서하시는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쉽게 용서하신 것이고 어떻게 죄를 가볍게 다루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기 전후에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고 합니다. 무어라 쓴 것인지는 모릅니다. 예전 교회에서 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어느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노예계약서를 쓰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일리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자칫 몰매를 맞을 수 있는 자세입니다. 여자는 분명히 땅바닥에 꿀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면 여자에게 던지는 돌은 동시에 예수님을 향해 던져진 돌이 됩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면 예수님도 같이 맞게 됩니다.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는 것은 이미 마음 속으로 이 여자를 위해 대신 돌을 맞을 각오를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설령 돌을 던졌더라도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여자를 덮고 대신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여자를 용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죄를 가볍게 다루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받은 용서가 바로 이러한 용서입니다. 우리편에서는 너무 쉽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죄 용서받기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회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편에서는 너무 쉽게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주신 용서입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 주신 용서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고 하신 용서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쉬운 용서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어떤 용서인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아셔야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값싼 은혜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받은 용서가 어떠한 용서인지를 깊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용서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용서가 주님의 목숨과 맞바꾼 용서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죄를 우습게 알고, 그렇게 쉽게 죄의 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어서 죄를 범할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용서의 은혜가 깊이 있다면 그렇게 쉽게 죄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내시기 전에 무어라 하십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가서 죄짓는 생활을 계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우리가 다시 죄짓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은 용서받았지만 또 죄를 범합니다. 우리의 뿌리깊은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또 다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쉽게 죄를 범하지 못합니다. 반면 쉽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그 죄로 돌아갑니다.

  죄를 용서받은 이 여자는 그 후에 어떠했을까요? 또 다시 죄를 범했을까요? 또 다시 간음죄를 저지르며 타락한 생활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뻔한 상황에서 용서받은 이 여자는 그 후로도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 가운데 죄를 범하고자 하는 유혹이 들 때에 여자는 목숨을 걸고 자기를 용서해주신 주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그 후로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현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여자는 예전에 자신을 용서해주시기 위해 목숨을 거셨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 역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데 어찌 똑같은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영혼을 사로잡으면 죄짓는 생활을 계속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그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면 더 이상 죄짓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마음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짓는 생활로 쉽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역시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지배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또다시 죄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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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목숨을 건 용서 요8:1-11  류공석 목사  2013-03-15 1933
8634 요한일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 요일4:7-12  류공석 목사  2013-03-15 2507
8633 요한복음 사랑은 사랑을 낳고 요21:15-17  류공석 목사  2013-03-15 2055
8632 요한복음 하나님의 일 요6:22-35  류공석 목사  2013-03-15 2361
8631 요한복음 목마름 요4:3-24  류공석 목사  2013-03-15 2300
8630 요한복음 이 성전을 헐라 요2:13-22  류공석 목사  2013-03-15 2074
8629 마태복음 원칙이 있는 삶 3 마6:31-34  류공석 목사  2013-03-15 1734
8628 마태복음 원칙이 있는 삶 2 마6:31-34  류공석 목사  2013-03-1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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