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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습3: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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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
스바냐 3:16-17
2007. 7. 28.(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어제는 제가 해서는 안될 일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수련회를 마치고 지난 주중에 계속해서 이삿짐을 쌌는데, 요즘 꽤 덥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이 37도까지 올라갔으니 꽤 더운 날씨입니다. 짐 싸느라 힘들고 날씨도 덥고... 그런 중에 아내가 오늘 무얼 먹을까 하는 것이예요. 이삿짐 싸는데 먹는 것까지 챙겨야하기에 저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양갈비 먹자고 했지요. 이삿짐에 더위에 몸도 허한 것 같고 하니 양갈비 먹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왔어요. 우리집 아이들이 양갈비 맛을 아는 아이들인지라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구워먹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가스오븐렌지에 구울까 밖에서 구울까 하는 것이었는데, 가스오븐렌지에 구으면 아내가 다시 청소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밖에서 먹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것이 다용도실에서 굽자는 것이었지요. 창문 열어놓고 선풍기 틀어놓고 하면 될 것 같았어요. 시작했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연기에, 숯가루에... 눈은 맵지요, 기침은 나오지요. 그렇다고 이미 일을 벌였으니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없지요. 끝까지 구웠어요. 선풍기로 연기를 밖으로 빼면서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이 불 났다고 신고하거나 우리집에 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하도 연기때문에 고생을 했더니 굽는 동안 양갈비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안들더군요. 물론 다 끝나고 맛있게는 먹었지만, 먹은 후에 뒷정리와 청소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요, 제가 양갈비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양갈비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이지요. 숯불에 구운 양갈비를 받아먹은 가족들은 기쁨이었지만, 연기와 숯가루를 뒤집어쓰고 고기를 구운 저에게는 고된 시간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한 예지만, 어떤 것들이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기쁨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이야기고, 만약 이것을 심판의 메시지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심판의 메시지가 주어질 때는 어떻까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선언으로 들릴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심판의 선언이 오히려 구원의 선언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분명히 심판의 예언입니다. 심판과 멸망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재림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됩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사람에 따라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스바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바냐서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온갖 죄악과 타락과 우상숭배 등으로 자신을 더럽힌 유다 백성들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거역한 이방민족의 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바로 스바냐서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로 들리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함께 12-1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에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두리니’라고 되어 있고,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는 자들'이며, 13절을 보면 이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이해할 때 알아야 할 단어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영적으로 타락하여 악한 시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배교를 하거나 혼합종교로 가는데, 소수의 사람들만이 야웨 하나님께 대한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외로운 싸움을 합니다. 아합 왕 때 엘리야가 그런 사람이었고, 사무엘, 다윗,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남은 자들이었고, 그 외에도 비록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순결한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혹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범죄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들어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사시대도 그렇고,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나 남 유다의 멸망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심판과 멸망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소수의 사람들은 이 심판을 면하게 되고,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들을 바로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남은 자’란 그 기준이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표준새번역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살아 남은 사람은 다시는 악한 짓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양처럼 잘 먹고 편히 누울 것이니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쉬운 성경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살아 남은 사람은 다시는 악한 짓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양처럼 잘 먹고 편히 누울 것이니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동사들이 미래형으로 되어 있지요? 영어성경도 대부분 미래형으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보면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서히브리어에는 과거와 미래 시제가 없고, 완료형과 미완료형만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상황에 따라, 혹은 동사의 특징에 따라 과거로도 번역될 수 있고 미래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히브리어로는 미완료형인데, 이 동사 형태가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 남은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살아갈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완료는 어떤 행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남은 자들은 13절에 나와 있는 그들의 삶이 예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미래형으로 번역을 하면 그들이 살아남은 후에 정신 차리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리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남은 자로 택하셨고, 그 남은 자들이 심판과 멸망 가운데 살아남은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결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남은 자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믿음과 삶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과 삶이 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고, 심판 후 펼쳐질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7절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바로 17절이 하나님의 사랑고백입니다.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의 고백을 함께 들어봅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라고 고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쁨이 뭔지 아십니까? 기쁨이란 몸 안에 있는 기(氣)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 기쁨이랍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이 기가 뿜어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기가 막히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 걱정, 근심, 불안, 죄책감, 상처 등등이 그 속에 있어서 기를 막고 있으니까 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지 못하고 기가 막히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막히지 않으면 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고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옵니다. 아니면 기가 막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기쁘잖아요? 왜 우리는 기쁩니까?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걱정, 근심, 불안 다 주님께 맡기기 때문에 기가 막힐 일이 없는 겁니다. 죄용서 받고 상처 치유 받으니까 기가 막힐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들 기쁘십니까?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인생이 아니라 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때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합니까? 내 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우러나올 때 그러할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느끼고 경험할 때 우리는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정말 내가 바라고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합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성장을 하고, 성공을 하고, 잘 되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합니다. 너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아시죠? 거기에 보면 집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로 인해서 그 아버지가 기쁨을 이기지 못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 마을 어귀에 나가서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게 했습니다. 집을 나간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아버지는 간절히 바랬고, 그 아들이 돌아오자 너무나 기뻐서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쁨, 너무나 기뻐서 기쁨을 이기지 못해하는 기쁨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 그 다음의 하나님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여러분, 가장 깊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T.V.를 보니까 어느 고등학생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 여자친구에게 T.V.상으로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영애야, 너를 만나게 되서 무척 기뻐.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둘이 언제 만났는지 아십니까? 일주일 전에. 만난지 일주일 됐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더군요.
여러분, 이게 사랑입니까? 연애를 시작한 젊은 연인들을 보면 아주 대단하죠? 길거리 가면서도 머리 쓰다듬고, 안고, 뭐 별짓을 다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랑을 깊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겉으로 표현은 제일 잘 하질 모르지만 깊은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을꺼예요. ‘너 없으면 난 죽어’ 하던 애들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하면서 휙 떠나지 않습니까? 이건 깊은 사랑이 아니죠.
남녀가 깊어지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결혼 후인 것 같습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까 어때요? 무너져요. 꿈이 무너지고, 기대도 무너지고, 보이는 것은 단점 투성이고 실망하게 되고...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깊어지는 사랑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전에는 그저 감정으로만 사랑을 했지만, 이젠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니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게 된 겁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단점도 보고, 나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실망스럽고 ‘내가 미쳤지. 왜 저 사람 하고 결혼했을까’ 후회도 해봅니다.
그런데 점점 바뀌게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난 점, 못난 점, 장점, 단점,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곤 그 상태 그대로 사랑을 하게 되요. 좋은 점은 여전히 예전의 좋은 감정으로 사랑하고, 나쁜 점은 의지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금슬좋은 노년의 부부의 모습을 보십시오. 열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오래된 친구같은 깊은 사랑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잠잠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뜨뜻미지근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부의 사랑이 깊어지는 사랑이 하지만 여전히 상황에 따라 그 사랑의 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바로 그런 의미 아닙니까? 이러한 사랑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이 바로 잠잠히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 할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설령 실수하고 못난 짓하고 실패해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도 사랑하셨을뿐 아니라, “내가 예수를 모른다”라고 세 번 부인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잠잠히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베드로를 사랑하셨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했음에도 다시 회복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며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잠잠히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의 고백은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는 겁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명절이라고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며 나로 인하여 노래를 부르시면서 더덩실 춤을 추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죠? 제가 지금까지 시를 써 본 것은 초등학교 때 빼놓고는 세 번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연애 때입니다. 그 시 중에 일부를 지난 수련회 저녁집회 때 소개를 했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니까 막 시상이 떠오르는 겁니다. 저절로 시가 흘러나와요. 그 시를 적어 아내에게 주었을 때 아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됩니다. 절로 시가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춤이 추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는데, 그 자녀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좋아서 저절로 노래를 부르시고 더덩실 춤을 추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하나님께서 너무나 좋아서 노래 부르시면서 더덩실 춤을 추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기가 막히지 않아요? 너무 멋있어요. 저도 같이 춤추고 싶어요.
.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노래 부르시고 춤을 추시면서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보면 한결 같은 대상이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너를”, “너로 말미암아”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신 것이 바로 나 때문이라니! 언 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를 보면 여전히 부족하고 허물과 못난 것 투성이고, 실수하고 실패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고, 충성한다고 하는데 여전히 부족한 것뿐입니다. 도무지 그러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는데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기뻐하시고 노래를 부르시고 춤을 추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외모와 행위를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를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그저 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이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설령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여러분,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남은 자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남은 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믿음과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천만의 기독교인입니까? 다는 아닐 겁니다. 오늘날 남은 자는 그 속에 예수가 있고, 예수 믿는 삶,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헌신의 삶이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봐도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주의 일에 헌신하고,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시대에 남은 자입니다.
지난 주는 참 마음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분당 샘물교회 청년부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봉사활동을 갔다가 탈레반 반군에게 피랍을 당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님께서 순교를 당하셨고, 남은 22명의 청년들이 아직도 억류된채 있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기독교에 맹목적인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광신적인 행위다, 왜 위험한 지역이어서 여행을 자제하라고 했는데 일부로 들어가서 그런 일을 당했느냐? 자초한 일이니 그냥 죽게 나둬라, 왜 개신교만 그렇게 선교를 하냐?" 이런 류의 비판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갔을까요? 정말 그들이 광신자들이어서입니까? 아니면 위험을 즐기는 사람들이어서입니까?
그들 중에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소녀의 잃어버린 팔에 의수를 달아준 자매도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가니스탄과 제 3세계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봉사하고 사랑을 전하는 이들의 95%가 크리스찬들인 것 아십니까? 이들이 다 광신자입니까? 다 쇄뇌당한 사람들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까?
이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가니스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이에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 안에 들어오길 원하시는 마음이예요. 그들을 구원하길 원하세요.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에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어요. 그 마음을 알기에 그들은 그곳에 간 것이에요.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대한민국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가 있었는지? 백안의 선교사들이 뭐하러 그 먼 조선까지 왔습니까? 노다지 캐러요? 정신 나가서요? 광신자라서요? 아니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조선 땅에 온 것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은 조선의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왔고, 그 하나님의 마음 전하다가 죽은 것이예요.
저는 믿습니까? 배형규 목사님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가족들의 마음이 아프고, 우리 역시 마음이 아프지만 배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남은 자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떠나고 편하게 신앙생활하려 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믿고 헌신도 없고 순종도 없고 희생도 없지만, 남은 자들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순종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희망을 두십시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청년들 역시 그 삶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청년의 때, 젊고 의욕있고 꿈과 도전이 있는 시기이지만, 사실은 힘든 때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하기에 더 힘듭니다. 순수한 만큼이나 유혹도 많고 상처도 많고, 많이 실패하고 낙심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청년의 때의 순수한 믿음과 양심을 버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고, 사랑이고 노래이고 자랑입니다. 그러기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넘어져도, 울더라고 예수 믿는 자, 하나님의 희망으로서의 남은 자의 삶을 사십시오. 삶이 힘들다 할지라도 믿음의 끈, 양심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헌신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뭐하는 짓인가? 남들은 다들 제 실속 차리는데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그래도, 상처가 있어도 그래도, 실수하고 실패해도 그래도, 손해봐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드리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시고 사랑하십시다.
17절의 앞부분을 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남은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헌신하는 남은 자들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너에게 나의 구원을 베풀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도우리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남은 자요 하나님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여러분들을 바라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희망으로, 하나님의 남은 자로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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