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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요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29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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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8:21-31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요한복음 8:21-31  
2007. 8. 18.(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중세 유럽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강도짓을 밥먹듯이 하던 두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어느 수도사의 전도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도사에게 자신들이 지은 죄를 털어놓고서 어떻게 해야 배상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떠나도록 권했습니다. 두 사람은 즉시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서 길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대단했지만 그 정도를 감당하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두 사람은 어깨가 붓고 저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궁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마을의 목공소를 찾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 쪽을 잘라 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훨씬 짧아졌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십자가 아닌가?”
  나머지 한 사람은 십자가 두께를 반으로 쪼개어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더니 그 중에 하나를 바닥에 버렸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훨씬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십자가지.”
  두 사람은 이제 훨씬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조차 없는 사막에 들어서자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맸습니다. 나흘 째 되던 날, 두 사람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도시를 발견하고서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깊이 패인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다리는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로 다리를 삼으세!”
  그러나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는 적당했으나 두께가 너무 얇아서 다리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거워 한 사람은 긴 쪽을 짤라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를 반으로 쪼개었다는 이 이야기,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 골짜기를 건너지 못해 죽고 말았다는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순된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있지만, 실제의 삶 가운데서는 잠시 묻어두고,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종교 잡지에 이런 기도문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그렇지만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말하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장사할 때는 별도로 해주십시오.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교회만큼은 매주일 가라고 하시지 마십시오.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체면 유지 정도로 헌금액을 조정해 주십시오.  
  주님이 지라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짐꾼을 사서 대신 지게 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는 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당장 하라고는 하지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이 기도 같지 않은 기도문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며 쓴 글이라고 생각되지만, 이것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그렇지만 주님’, ‘그렇지만 주님’하면서 자꾸만 따라갈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혹시 이러한 이유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이건 좀 봐주십시오. 그렇지만 주님, 이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이건 주님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 그건 나중에 하겠습니다.” 혹시 이러한 모습은 없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9절)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요, 원칙이요,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내가 가리니’, 이 말씀은 ‘내가 곧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까? 기쁨의 길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이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나중에 받을 영광이 있기 때문이지 사실은 고통의 길이요, 수치의 길이요, 처절한 외로움의 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만 하는 희생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길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 구속이었지만, 예수님 역시 그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고 싶었던, 회피하고 싶었던 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36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게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주님의 심정이 이러했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비록 십자가를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알기에 그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지금 그 마음이 심히 괴롭고 고민에 쌓여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로웠든지 심히 고민하여 죽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어찌보면 우리와 같은 모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십자가를,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비록 그 길이 두렵고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산산이 부셔져 내 모든 피를 쏟고 죽을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순종의 기도입니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이 말씀은 십자가의 길에까지 그대로 적용된 주님의 원칙이었습니다.
  
  몇년전 방영된 사극으로 시청율 1위를 차지했던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리마가 있었습니다. 요즘도 사극이 인기지만, 이 사극은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던 드라마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극을 기독교적 메시지가 있는 드라마다라고 평합니다. 무슨 드라마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허준’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은혜를 받았는데, TV보면서, 그것도 드라마를 보면서 은혜받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늘 느끼던 것은, 이것은 ‘목회 드라마’다, ‘크리스찬 드라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을 받는 것도 많았고,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드라마 하나를 가지고 너무 과장되게 평가하는 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중에 크게 감동을 받은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허준이 혜민서 의원으로 일하게 되지요. 혜민서 의원으로 일하던 초기에 허준은 자기 집에서 병자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 병자들은 혜민서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허준의 집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내의원은 개인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허준은 이를 알면서도 찾아온 병자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치료를 해줍니다. 그런데 허준을 모함하는 이들에 의해 이 사실이 어의영감에게 알려지게 되고, 이로 인해 국법을 어긴 죄로 내의원 현판과 현판 사이 길을 오가면서 현판의 글을 읽는 것을 천 번 반복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 벌은 무척 힘든 것이어서 보통 3백 번 정도 왕복하면 쓰러지고, 5백 번까지 하고 죽은 사람도 있는 벌이었습니다.
  그런데 허준은 천 번을 다해내었습니다. 코피를 쏟으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걸을 수 없어 기어가면서 기어코 천 번을 다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몇일 후 회복이 된 후 왜 천 번을 다했는지, 중간에 그만두고 쓰러져 안 일어나도 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천 번을 다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허준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나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소.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것이 스승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리한 것이오.”
    
  어찌보면 융통성 없어 보이고, 미련스럽기까지 보이지만, 스승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스승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기어서라도 그 길을 갔다는 허준의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승의 뜻이기에 저렇게 하는데, 우리는 주님의 뜻에 얼마나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저 고통의 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인간 스승에게도 저렇듯 순종하는데, 우리는 과연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갈 수 있습니까?

  31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교회 다닌지 오래된 사람입니까? 주일 성수도 잘하고, 봉사도 적당히 하고, 헌금도 성실히 하는 그런 사람입니까? 아니면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보통의 신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아멘하며 철저하게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즉, 말씀을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는데 제자됨의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2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승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미움을 받고, 손해를 보고,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고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스승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스승이 기뻐하는 뜻이기 때문에 고통을 무릅쓰고 그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둔 제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순종의 삶, 헌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인간을 스승으로 둔 사람도 이와 같이 행하는데, 예수님을 스승으로 둔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순종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렇지만 주님, 하지만 주님’하면서 제자로서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를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는 그 스승을 닮는 사람입니다. 그저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보통의 신자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라면 스승되신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기준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은혜받을 때만, 물질이 있을 때만, 여건이 좋을 때만, 그 길이 힘들지 않을 때만. 고통스럽지 않을 때만, 기분이 내킬 때만, 믿음이 좋을 때만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입니다. 힘들 때에도, 여건이 좋지 않을 때에도, 내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내 마음에 심한 갈등이 들 때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이것이 예수님의 기준이요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이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원칙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자기의 십자가를 짤라내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는 이 예수님의 원칙과 기준이 우리의 원칙이요 기준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에서 교회를 섬겼을 때 제가 맡은 교구를 심방을 했었습니다. 저는 심방을 할 때 기도제목을 묻습니다. 그럼 여러 가지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대개가 자녀, 가족, 사업, 건강 등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가끔 몇몇 분들은 이런 기도제목을 내놓습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순종하길 원합니다.”, “보다 더 헌신하고 충성하며 섬기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제목을 받을 때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정말이지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이 이러한 마음의 소원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는 결국 우리 마음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결국 기도를 통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제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바라는 것, 추구하는 것, 기도의 제목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핵심적인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말씀, 마태복음 6:33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이 성경구절은 아마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3주에 걸쳐 '원칙 있는 삶'이란 제목으로 마태복음 6:33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다시 반복해서 정리를 하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으로 그 생각이 꽉 차있습니다. 그것이 생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우리의 현실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이 아무리 중요해도, 현실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빵의 문제, 현실의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에 끌려 다니며 정작 추구해야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추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핵심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핵심을 잡으면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딸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 핵심을 잡으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보너스로 주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핵심은 간단한 것입니다. 자주 주변의 것들을 보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핵심을 놓치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복잡할수록, 앞이 막힐수록 핵심을 잡으십시오. 더욱 헌신하고 더욱 충성하고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나 현실도피적이거나 무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삶이 무엇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실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우선순위였고, 기준이었고,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역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것이 우리의 우선순위, 기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복들을 보너스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 29절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순종이 하나님과의 동행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내게 믿음 주시고, 은혜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사명 주시고, 능력주시고, 복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승리하게 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내 비전과, 나의 가정과 생업 위에 함께 하시길 원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함의 전제 조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입니다.  

  1절,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2절,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여러분, 주님의 기쁨이 되길 원하십니까? 정말 내가 원하는 한가지 소원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십시오.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시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힘쓰시고,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 길이 아무리 고난의 길이요, 손해보는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십시오.

  많은 분들이 스바냐 3:17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신답니다. 무엇 때문에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지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시고 그리도 기뻐하신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노래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그래서 함께 하시고 복 주실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나의 기쁨이 되고, 또한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노래가 되는 이 축복이 예수님처럼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로” 작정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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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0 요한복음 계속 열매 맺기 위하여 요15:1-11  류공석 목사  2013-03-15 2243
8639 요한복음 선한 목자 요10:1-18  류공석 목사  2013-03-15 2999
» 요한복음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요8:21-31  류공석 목사  2013-03-15 2129
8637 요한복음 은혜를 아는 사람 요12:1-8  류공석 목사  2013-03-15 2421
8636 스바냐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 습3:16-17  류공석 목사  2013-03-15 2269
8635 요한복음 목숨을 건 용서 요8:1-11  류공석 목사  2013-03-15 1933
8634 요한일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 요일4:7-12  류공석 목사  2013-03-15 2507
8633 요한복음 사랑은 사랑을 낳고 요21:15-17  류공석 목사  2013-03-15 2055
8632 요한복음 하나님의 일 요6:22-35  류공석 목사  2013-03-15 2361
8631 요한복음 목마름 요4:3-24  류공석 목사  2013-03-15 2300
8630 요한복음 이 성전을 헐라 요2:13-22  류공석 목사  2013-03-15 2074
8629 마태복음 원칙이 있는 삶 3 마6:31-34  류공석 목사  2013-03-15 1734
8628 마태복음 원칙이 있는 삶 2 마6:31-34  류공석 목사  2013-03-1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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