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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요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991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
성경본문 : 요10:1-1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8 

2007. 8. 25.(토)                               


*음성(MP3): "여기를 클릭하시면 설교 MP3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 사람의 이름에는 어떤 이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누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 이름을 들으면 어떤 것들이 떠올려집니까?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은 제 이름을 듣고 이런 이미지를 떠올렸답니다.
  “류목사님? 누구시지? 아! 그 뚱뚱하신 분!”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10kg쯤 체중이 더 나갈 때입니다. 결혼 후에 갑자기 살이 졌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저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충격이었어요.

  이것은 한 예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아,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참 매너있고 센스있는 사람이야. 그 사람?! 글쎄... 괜찮은 것 같아. 게?! 참 웃기는 애야. 엽기적이지’하는 식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알게 된 정보들이 하나의 상으로 인식이 되어서 ‘아무개=이러 이러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한가지 예를 더 들면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대에 알렉산더 대왕과 이름이 같은 병사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의 귀에 이 병사에 대한 나쁜 소문이 들렸습니다. 이 병사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웃긴 꼴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사는 겁이 많고 게으르고,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군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병사가 잘못할 때마다 다른 병사들은 “야! 알렉산더, 자네는 졸장부 같네”하면서 나무라기도 하고, 장난삼아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먹칠을 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러한 사실을 듣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어느 날 이 병사의 막사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에도 아니나 다를까 이 병사는 술에 취해 바닥에 뻗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대왕이 오셨다는 소리에 그 병사는 놀란 토끼처럼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습니다. 그런 졸개 병사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병사 이름이 알렉산더인가? 나와 이름이 똑같군. 병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 자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네의 인생을 바꾸라.”


  알렉산더라는 이름에는 용기, 위대함, 영웅, 그런 이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사는 이름만 같았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에는 어떤 이미지가 담겨져 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 것 같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그 이름과 연결되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수님하면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랑의 주님, 좋으신 분, 십자가 등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을 때 선한 목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림에도 보면 예수님을 양을 치는 목자로써 표현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자상한 목자의 그림도 있고, 시편 23편처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그림도 있고, 낭떠러지에서 길을 잃은 양을 구해내는 목자의 그림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그러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10-11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켜주고, 양을 위해서 심지어는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예를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사울왕에게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

  다윗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목자의 임무 중에 하나가 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을 노리는 짐승들이 많은데,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잡아 채가면 다윗은 따라가서 사자나 곰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구해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몸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양이 자신의 양이고, 자기 양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호하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선한 목자의 이미지가 별로 없습니다. 가축들을 소중히 여기지만 목숨을 걸고 그 가축의 생명을 보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 중동지방의 유목민들의 문화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유목 문화에서 양이나 염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특히 유목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명예입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 중동지방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이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을 때 살인할 수 있습니다. 그 형량이 불과 한달 남짓입니다. 뿌리 깊은 관습법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목 문화에서 명예는 목숨보다 귀한 것이었다는 의미합니다.

  이것은 목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유목민, 즉 목자에게 있어 자신의 양들이 사자나 이리의 밥이 되거나 혹은 하나라도 없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큰 불명예입니다.

목자로서의 명예는 자기 양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돌보는 것이고, 나날이 살지고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지금과 같은 건기 때도 양들을 뜯어먹을 수 있는 풀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곳, 곧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이고, 사자나 들짐슴이 양들을 공격할 때 몸을 던져 막아내는 목자이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우리에 있는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놔두고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찾아가는 사람이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곳 중동지방의 유목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선한 목자입니다.

  다윗이 목자로서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목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서 비유하셨는데, 이 역시 유목 문화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무엇이 선한 목자의 모습인지를 알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했을 때는 이처럼 양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10절에 있는 말씀처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을 때는 주님은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던지셨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대단한 중요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떤 감동이 옵니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내가 받은 구원, 내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것이 나의 구원입니다.

사실 양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동물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미련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왜? 자기의 양이기 때문에,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다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 앞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고집만 센 그런 사람들입니다. 양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에 빠지고, 죄의 수렁에 빠지고,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마귀에게 잡혀 있었던 존재들입니다. 정말이지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한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적도 없고 사랑해 본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보면 사랑할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자기 양이기 때문에, 자기의 양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찮은 양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내가 얻은 구원, 내가 받을 영생이 바로 이러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말씀을 여러분들의 마음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더욱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14-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양은 비슷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요르단 계곡 길을 타고 가다보면 양 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르게 보이던가요? 그 놈이 그 놈 같습니다. 다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목자는 자기의 양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한데 섞어놓아도 금방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할 때는 목자들이 자기의 양을 아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할 때 쓰여지는 히브리 단어는 “야다”(ידע)입니다. 이것은 본래 부부관계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부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입니다. 하다 못해 어디에 점이 있는지까지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나에 대해 잘 알까요? 그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겠느냐”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요? 나를 만드시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고, 태초 이전부터 나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다는 말은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모르면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내 사정도 모르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잘 알고 계시다는 말은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

왜입니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알기에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실직했습니다. 취직해야 하는데요?” “안다.”,  “주님, 저 좀 도와주세요.” “안다, 도와줄게”, “주님, 시집가야 하는데요.” “안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의 형편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코 무관심하거나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잘 알고 계시기에 나를 능히 도우실 수 있고, 또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을 때 다른 곳에 가지 마세요.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은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 안주시면 안됩니다. 꼭 주십시오. 안 주시면 하나님 안계시는 겁니다.”하는 식의 거의 협박에 가까운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나에 대해 잘 아시고, 나의 인생의 전부를 아시는 분께 다 맡기십시오. 그분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십시오.

처음에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앞이 안보이는 것 같고 막힌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때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계신 그 때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굳게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그럴 때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에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시편 139:17의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는데, 어느 형제가 말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수'를 천에 그림을 놓는 수로 표현하더군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한 올 한 올 수를 놓는데 그 수가 어찌나 그리 많은지 너무나 아름답고 풍성하게 내 인생을 만들어 가신다는 의미로 말하더군요. 근사하죠?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봤어요. 바둑에서 수가 높다는 말이 있지요? 흔히 말하는 고수 말입니다.

무엇이 고수입니까? 바둑 한 알을 놓을 때 훨씬 앞을 내다보면서 놓는 사람입니다. 반면 하수는 어떤 사람이예요. 바로 앞에 있는 것 외에는 보질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수는 하수의 집을 키워서 먹죠. 하수는 고수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하수가 돌을 9개를 깔아도 고수를 이기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바로 그런 의미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수가 높아요. 높아도 훨씬 높은 고수입니다. 내 인생의 길을 훨씬 멀리 내다보시며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그 길로 나를 이끌어주십니다.

하수인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고수이신 하나님 못 따라가요. 하수가 제일 안전한 것을 고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예요. 그것이 성공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많은 선택의 상황에서, 그리고 문제들 앞에서,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선한 목자되시고 고수이신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더욱 풍성한 삶의 길이 열리는 형통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그리고 한가지 더 볼 것은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은 어떤 관계입니까? 14절에서 본 것처럼 서로가 잘 아는 관계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압니다. 양은 누가 자기의 목자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듣고 목자의 인도에 따릅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이요 행동입니다. 알기 때문에 보호해주고 알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은 무엇보다도 시력이 나쁜 동물입니다. 시력이 마이너스 10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미터나 2미터 앞의 사물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양은 매우 심한 약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동물입니다.

양은 시력이 약한 반면 귀가 굉장히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도 뛰어서 도망치는 것이 양의 습성입니다.

또한 양들이 무리지어 갈 때 ‘메~’하면서 가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메~’하는 소리는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합니다. 양들은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바짝 붙어서 다닙니다.

앞에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들이 뒤에 있는 양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랍니다. 눈으로는 보지 못하니까 소리로 듣고 따라가는 것이 바로 양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이 움직일 때는 눈을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들에게 듣는다는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양으로 비유되는 데, 우리가 양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일도 잘 몰라요. 당장 1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지혜도 부족하고 미련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도 양처럼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고,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간다고 했는데,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과의 과거의 교제를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양이 지금 목자를 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양이 목자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험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가게 되었다는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갔더니만 무서운 짐승으로부터 보호받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에 양은 목자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험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따랐더니 정말 응답되어지더라, 하나님 믿고 따랐더니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더라는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양인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목자가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를 믿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는 것,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요 양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말씀과 세상의 경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우리 경험은 어떻습니까?

6일 동안 일하는 것보다 7일 동안 일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법니다. 6일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7일 동안 공부하는 것이 더 많은 학습이 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어라고 합니까?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째는 안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르침 혹은 충고 사이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주장을 해야 되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자신이 높아진다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들은 섬겨야 한다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충고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또 말씀과 유혹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최대한 즐겨라. 쾌락을 즐겨라.”

이전에 가정주부들이 윤락행위를 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또 한사람은 자기 아들 딸 학원 과외비를 벌기 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주부들뿐입니까? 여학생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원조교제에 나서고, 유흥비를 벌기 위해 10대 청소년들이 돈을 강탈하고 심지어 사람 죽이는 일조차도 태연하게 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의 윤리와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는 한가지입니다. “즐겨라. 최대한 즐겨라. 순결 그런 것 왜 지키냐. 그건 조선 시대 때에나 지키는 것이지 지금은 즐겨라. 즐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최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유혹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우리가 들어야할 음성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주님의 양된 성도들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주님 자신도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가 주님의 선한 양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에게 염려를 주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양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고 불순종하면서 그릇된 길로 가서는 안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전적으로 목자를 믿고 따르는 선한 목자의 선한 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선한 양이 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과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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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8 사도행전 초대교회를 본받자 행2:43-47  한태완 목사  2011-06-04 2993
16407 시편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시50:22~23  조용기 목사  2009-06-01 2992
» 요한복음 선한 목자 요10:1-18  류공석 목사  2013-03-15 2991
16405 예레미야 기도응답에 필요한 4가지 렘14:19-22  이한규 목사  2012-07-14 2991
16404 갈라디아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 file 갈5:16-18  강종수 목사  2006-01-02 2991
16403 누가복음 기다리는 성탄절 눅2:25-35  이상호 목사  2011-11-02 2990
16402 고린도후 보배를 품은 질그릇 고후4:7-15  김필곤 목사  2011-05-20 2990
16401 잠언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22:6  조용기 목사  2009-12-14 2990
16400 잠언 가정 행복의 조건 잠15:15-17  김필곤 목사  2009-11-01 2990
16399 열왕기상 솔로몬이 고상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다 왕상 3:4-15  박신 목사  2011-10-02 2989
16398 요한복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요5:1-16  이정수 목사  2010-04-04 2989
16397 히브리서 보혈의 능력 히9:11-14  조용기 목사  2008-08-19 2989
16396 사도행전 아름다운 인생 결산 행20:17-38  김필곤 목사  2008-02-06 2989
16395 고린도후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진 삶 고후4:7-9  조용기 목사  2012-09-04 2988
16394 누가복음 희망1- 그래도 희망은 있다 눅12:13-21  김영봉 목사  2011-04-30 2988
16393 마가복음 인생 변화의 3단계 막1:14-20  김필곤 목사  2010-08-21 2988
16392 고린도전 지금은 결산을 생각할 때입니다 고전4:1-5  이동원 목사  2009-12-07 2988
16391 갈라디아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사람 갈3:3  조용기 목사  2009-06-15 2988
16390 열왕기상 실패에서 배우기2 -이스라엘의 2대왕 나답 왕상15:25-32  김필곤 목사  2012-02-20 2987
16389 출애굽기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출1:1-14  이세령 목사  2012-12-01 2985
16388 느헤미야 변화 선언문 느10:28-39  김필곤 목사  2010-07-25 2985
16387 요한복음 부활을 믿는 믿음은 최대의 복입니다 요20:24-31  김필곤 목사  2009-11-07 2985
16386 베드로전 십자가 은혜의 회복 벧전2:24-25  김남준 목사  2012-12-14 2984
16385 신명기 불평에서 감사로 신16:9-12  김필곤 목사  2011-07-28 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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