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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 아래 있다고 느낄 때

열왕기상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566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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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상19:1-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로뎀 아래 있다고 느낄 때

열왕기상 19:1-8
2007년 11월 10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우리가 성지순례를 할 때 인상깊게 다가오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현장예배를 드렸던 감람산 눈물교회도 그런 곳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갈멜산도 그러한 곳일 것입니다.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이파라는 도시가 있고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갈멜산 역시 인상깊은 장소입니다.

  갈멜산하면 누가 생각나고 어떤 사건이 떠오릅니까? 엘리야, 그리고 갈멜산 전투일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이 바로 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통치 기간입니다.

아합은 그 자체가 악한데다가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했는데, 이세벨은 결혼하면서 자기 나라에 있던 가나안 종교의 사제들을 대거 데리고 들어와 가뜩이나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북왕국을 우상숭배와 온갖 타락과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부부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을 죄악의 길로 이끌고맙니다.

  이러한 아합과 이세벨과 힘겨운 대결을 벌였던 이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갈멜산 전투입니다. 갈멜산에 가면 무흐라카라고 하는 장소에 세워진 수도원이 있는데, 바로 그 장소로 여겨집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바알 선지자들도 제단을 쌓고 엘리야도 제단을 쌓되 불을 붙이지 말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게 됩니다. 누구의 제단에 응답했는지는 잘 알 것입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이즈르엘 평야에 있는 기손 시내로 끌고가서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이 오랜 가뭄을 끝내는 비를 오게 한 기도였습니다. 17장 1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 땅에 수년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아시겠지만 우기에 내리는 비로 일년을 살아가는 것이 이 땅이고 건기에는 이슬이 식물의 생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년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가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가뭄을 끝내는 기도를 합니다. 언제요? 갈멜산 전투 직후에. 왤까요? 왜 이 사건 직후일까요? 가뭄이라는 징계가 내린 이유가 우상숭배입니다. 그 우상숭배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제거한 사건이 바로 갈멜산 전투였습니다. 후에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긴 하지만 적어도 갈멜산에서의 승리 직후에는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던 우상들을 제거한 후에 응답되어진 사건이 바로 가뭄 해결이었습니다.

  이 역시 갈멜산에서 이루어집니다.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다고 하니까 아마도 지금의 하이파 대학교 근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곳에서 얼굴을 다리 사이에 대는 기도를 합니다. 해보시면 알겠지만 일분을 버티기가 힘든 기도이고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이 따르는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일곱번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오랜 가뭄을 끝내는 비가 오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갖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홀로 싸우는 영적인 영웅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비를 내릴 수 있게 하는 능력의 기도를 드리는 영적 거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음 장인 19장에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앞장인 18장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소 실망스러움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은 이러면 안되거든요.

  그러나 엘리야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결점과 한계를 가졌고, 연약함과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실패와 좌절, 범죄와 한계, 갈등과 모순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고,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왜요? 그들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넘어지고 실수하고 범죄하고 한계를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어떻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받았는지를 보면서 우리의 문제의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18장의 영웅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19장에서의 극심한 탈진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을 통해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19장을 봅니다. 1절에 보면 아합왕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인 승리를 거둔 후, 그리고 오랜 가뭄을 끝나게 한 후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온 백성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고 바로 서게 만들어야 하는데, 정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자기 부인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가 450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고합니다. 이에 분노한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 이맘 때에 너를 죽일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떻게 반응합니까?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세벨의 말만 듣고 겁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 유다 왕국에 있는 브엘세바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5절에 보면 기진맥진하여 잠드는 처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실망도 됩니다. 어제의 영웅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어이가 없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변화가 이해되는 분은 없으신지요? 그 뜨거운 믿음과 열정으로 헌신적인 사역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러운 탈진과 침체에 빠졌던 것인 엘리야인데,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엘리야와 같은 경험이 있으시거나 혹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경우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한 인물의 삶이 짧은 순간에 이렇게 극과 극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도 가끔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목회자의 경우, 저도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일주일 내내 설교를 준비하여 주일날 최선을 다해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공허감이 있습니다. 어떤 집회를 인도한 다음에 느끼는 이상한 허탈감이나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짓누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한 교회에서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도록 노력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헛수고로 느껴질 때의 허탈감도 있습니다.

영혼 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성도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에만 서 있는 경우에 느끼는 영적인 외로움도 있습니다.

  다른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사역합니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열정과 성심으로 사역하며 섬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역때문에 몸이 상해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교사들이 하루 아침에 탈진과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정과 성심으로 최선을 다한 후에 오는 공허감일 수도 있고, 홀로 사역하는데서 오는 부담감과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가 선교사같은 사역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던 분들이 갑작스런 탈진과 침체에 빠집니다. 사회에서 성실하고 성공적으로 일하던 분들이 갑작스런 탈진과 침체에 빠집니다.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 없이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갑작스런 탈진과 우울증을 보이게 됩니다.

  엘리야의 증상은 사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증상이고, 우리 역시 그 크기와 정도는 다를 지 모르지만 겪고 있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엘리야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탈진과 침체, 그리고 우울증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찾고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에 이른 엘리야는 홀로 하룻길을 걸어 네게브 광야로 들어갑니다. 네게브 광야에 가면 나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야 당연히 나무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네게브 광야에서는 나무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곳에서 드문 드문 눈에 띄는 나무가 바로 로뎀나무입니다.

로뎀 나무는 그 크기가 1미터 50센티미터 정도이고 나무 형태가 개나리처럼 가는 줄기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형태입니다. 잎도 그리 많지 않고 넓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로뎀나무가 제공해주는 그늘은 그렇게 크고 시원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광야길에 지친 나그네에게 훌륭한 쉼을 제공해주는 그런 그늘은 아닙니다.

  그러한 그늘에서 지쳐 앉아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이미 영적인 탈진과 침체가 있었고, 그 힘든 광야를 하루 동안 걸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매우 지친 탈진한 상태입니다. 이젠 한걸음 내딛을 만한 힘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엘리야가 입을 열어 절규합니다.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아니하나이다"

  이건 기도가 아닙니다. 탄식이고 절망이고 절규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과 같다고 합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홀로 있기를 원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피합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처지와 자기의 처지를 비교하여 자신이 열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어서 극단적인 우울증에 빠지면 자살 충동에 사로 잡혀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야는 영적 탈진과 침체를 넘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담대하게 전하고 그들을 칼로 진멸하던 영적인 영웅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극한 우울증에 허덕일 수 있을까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증세에 대해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우울증(post-aderenalin depression)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요, 사람이 어떤 일에 오래 동안 몰두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면 우리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많이 소모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온 몸과 마음이 쉽게 탈진하고 공허감을 느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울증은 어떤 전문직에 종사하며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이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를 위해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한 사람이 그 이후에 느끼게 되는 공허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이 커다란 공연을 끝내고 나면 찾아오는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이나 마약에 빠지려는 유혹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와 연관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 사역자나 교회의 헌신적인 봉사자들도 이러한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헌신적인 가정 주부 역시 날마다 반복되는 가사일과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4절에서의 엘리야의 절규를 보면 자신이 이때까지 했던 사역과 조상들의 사역들과 비교하는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사실 엘리야는 자기보다 앞서 있었던 선지자들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뀐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승리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바뀌었을까요? 정말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까요?

18:21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보십시오. 엘리야가 신앙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양다리 걸리치 말고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어떠했다고요?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갈멜산에서의 승리를 보았다고 바뀌었을까요?

그 당시는 바뀌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붙잡아 죽이라고 했을 때 그 말에 따랐으니까요. 그러나 기적을 본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변화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뀐 것이 없어요.

  그리고 18장을 잘 보면 엘리야가 요구한 것은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2절과 25절, 40절을 보면 바알 선지자 450명만 갈멜산으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세라 선지자 400명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850대 1의 전투로 말하지만, 본문을 잘 보면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산으로 안 온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아합과 이세벨이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숨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라고 자신들의 선지자들이 패하고 엘리야가 이기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엘리야가 요구한 선지자들 중에 절반인 바알 선지자 450명만 보내고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보내지 않음으로 아세라 선지자들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세라는 바알의 부인신입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는 같은 부류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살아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이세벨이 내일 이맘 때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바뀐 것이 없었어요. 엘리야가 영적인 탈진과 침체에 빠진 것은 단순히 이세벨의 협박 때문이 아닙니다. 바뀐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혼신을 다해 사역했어요. 갈멜산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습니다. 이전의 선지자들보다 더 열심히, 더 파워풀하게 사역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없었고 변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기의 사역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홀로 외롭게 싸우는 그것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엘리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영웅에서 탈진과 침체에 빠진 실패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이러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없는지요? 나는 나름대로 성심껏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도 없고, 돌아보면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오히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공동체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거침돌만 된다는 생각...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엘리야는 지금 극심한 육체적인 탈진과 정신적인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그렇게 허덕이다가 지쳐서 로뎀 나무 아래서 잠을 자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경험들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극심한 탈진과 침체에 빠져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면 한동안은 잠을 못이루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만 자려하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엘리야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극한 탈진과 침체와 우울증을 보이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실패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사기를 잃고 잠만 자고 있는 엘리야는 그냥 버려두시나요? 그런 엘리야를 책망하시면서 더 이상 내 일꾼으로 쓰지 않겠다고 하시는가요?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자가 이것 밖에 안되냐고, 이러고도 네가 무슨 하나님의 사역자고 선지자라고 할 수 있으냐고 꾸짖으시던가요? 이제 네가 할 일 끝났으니 네 소원대로 네 생명을 거두겠다고 하시던가요?

엘리야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엘리야는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우울증이 극에 달했을 때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면상태를 이용하십니다.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의 결과로 나타난 수면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이용하셔서 엘리야를 치유하기 시작하십니다. 엘리야는 탈진과 우울증으로 인해 잠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쉴 수 있는 기회로 제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잠을 통한 휴식이 필요했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은 그를 자게 했다가, 깨워 먹이시고, 또 자게 만드시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극한 피로를 느끼고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참으로 귀한 처방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으면 가장 기본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충분히 자고 있는지 그리고 잘 먹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잠을 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그를 어루만지고 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먹게 하십니다. 5절에 보면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는 표현이 있는데, 히브리어 원어로는 효과를 느끼도록 두드리다, 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잠자고 있는 엘리야를 깨우기 위해 한 번 두드린 것이 아니라 그의 피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안마를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몸을 마사지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야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깨었을 때 먹게 만든 것도 떡과 생수입니다.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5절과 6절에서 잠을 통해, 안마를 통해, 그리고 떡과 생수를 통해 엘리야를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회복시키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 시내산으로 이끄십니다. 8절에 의하면 40일에 걸쳐 호렙산으로 이끄는데 사실 네게브 광야에서 호렙산은 40일이 걸릴만큼 먼 거리가 아닙니다. 열흘이나 길어도 이십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그러한 회복의 조치를 40일 동안 하셨는 것을 말합니다. 가다가 힘들면 잠을 자게 하시고, 안마해 주시고, 떡과 생수를 먹여주시면서 엘리야의 페이스에 맞추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은혜 아닙니까? 억지로 끌지 않으시고, 좀 더 빨리 가지고 재촉하지도 않으시고, 엘리야의 페이스에 맞추어 재우시고 먹이시고 회복시키신 하나님, 탈진한 엘리야를 서서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내가 침체되어 있을 때 안타까워 하지시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탈진하여 우울증의 증세를 보일 때도 불쌍히 여기시지 결코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엘리야를 대하셨던 것처럼 나를 어루만지시고, 쉬게 하시고, 다시금 회복시켜주십니다.

  이사야서 41:10과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아주 특이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는데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어디를 붙드신다고요? 나의 오른손을 붙들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손을 붙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떠한 자세로 잡고 계실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내 앞에 나를 마주보고 잡으신다면 어떠한 모습입니까? 좀 불편하지 않나요? 만일 옆에서 나를 잡으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역시 불편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 손을 잡을 수 있는 방법말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뒤에서! 뒤에서 나를 안으시는 모습으로 당신의 오른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붙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나의 오른손은 연약한 손입니다. 당신의 강한 오른손으로 나의 힘없어 떨리는 연약한 오른손을 잡아 주시는데 뒤에서 나를 안으시며 잡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요? 쓰러질 때 아주 쓰러지지 않도록, 절망하여 넘어질 때 아주 넘어지지 않도록, 실패하여 넘어질 때 아주 넘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뒤에서 나를 안으시는 자세로 나의 오른손을 잡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딸아, 두려워 하지 마라. 내가 있단다. 아프지? 내가 치료해줄께. 힘들지? 내가 힘을 주마. 괜찮아. 내가 있단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내가 지쳐 쓰러질 때, 내가 영적인 탈진과 침체에 빠져있을 때, 내가 엘리야와 같은 처지에 있을 때에도 나를 찾아오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회복시키는 주님의 사랑이 있음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깨닫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의 처지와 상황에 상관없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6-2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

  나는 지금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왜요? 침체에 빠져있고 탈진에 빠져있어요. 혹은 영적인 문제가 있어요. 죄 가운데 있어요. 그러나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나를 다시금 일으키시기 위해서. 나를 다시금 살리기 위해서. 나를 다시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늘 깨닫고 기억하시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가지는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셨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그는 호렙산으로 가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렙산은 어떤 곳입니까? 시내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고, 십계명을 받았던 하나님의 성산입니다. 그곳을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너무 힘들어 주저 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 극심한 영적 탈진과 침체, 외로운 실패감, 우울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가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원수에게 쫒겨 광야를 헤메다다는 신세였지만, 그 역시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루만지셨고, 일으켜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접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하나님의 호렙산의 가세요. 한걸음도 뗄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발걸음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세요. 그저 "하나님!" 한마디여도 좋아요. 그저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한마디여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름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갈멜산이 있고, 반면에 로뎀에서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가 있고 다시금 사명을 주시는 호렙산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다시금 소명을 받습니다. 다시금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동역자를 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나 홀로만 하나님의 선지자로 싸웠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두셨음을(18절) 알려주십니다. 홀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엘리사라는 동역자를 주십니다. 그래서 함께 사역하게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엘리야의 외로움을 달래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또 하나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동역자의 필요성입니다. 하나님은 복불장군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동역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아론과 미리암을 주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바나바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역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을 위해서만 동역자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기도하고 말씀만 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외로움은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로뎀나무 아래서 어루만지셨다는 것은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엘리야의 인간적인 외로움을 달래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역자로 엘리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역자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동역자라는 사실입니다. 동역자는 단순히 일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목사 홀로 하는 것도, 몇몇 사람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짐을 나누어지는 동역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마음을 나누는 동역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삶의 나누고 고민과 문제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서 만나고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귐이 있고 서로를 이해하고 기도하고 도움이 되려는 사랑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 중에 하나인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더욱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까?

저는 목사지만, 목사라는 신분을 떠나 여러분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냥 편하게 만나서 속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관계이길 원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홀로 있는 엘리야가 되지 마십시오. 이미 하나님께서는 칠천명을 남겨두셨다고 했고 엘리사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동역하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서로의 삶을 터 놓고 나눌 수 있고 그러면서 이해할 수 있고 기도해줄 수 있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엘리야의 비슷한 영적 탈진과 침체를 겪기도 하고 육체적인 탈진이나 정서적인 탈진이나 침체를 겪습니다. 그래서 우울증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먼저 육체적, 정신적인 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늘 나에게 향해 있음을 깨닫고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나의 호렙산을 향해야 합니다. 그곳이 교회 예배당일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 집에 있는 골방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원일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느끼고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힘과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동역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함께 짐을 지는 동역을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면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또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스트레스와 번뇌, 탈진과 우울감, 침체와 무기력을 이겨내고 이전보다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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