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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5: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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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5장 1절-14절.
1절-14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왜 내 마음대로 살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역사를 따라 하나님 마음대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구속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뜻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할 약점을 가진 존재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되고, 창조자의 주권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냐? 왜 우리는 그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그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을 입혀주기 위해서이다 그 말이요.
‘당신이 뭘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된다’ 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예수님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맞는 말이요, 틀린 말이요? 그렇게 되면 무엇이 없어지지요? 무엇이 빈약해지지요? ‘영원 전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돼서 우리에게 입히실 그 면이 없어지지요. 구원이 빈약해져 버리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이유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 동기 목적도 빈약해져 버리지요. 이유가 그러니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은 돌려서 말하면 만일 우리가 구원을 안 입었다면?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그 말이지. 애당초에 구속을 입는 건 인간창조의 궁극목적의 하나의 과정인데 당초에 구원이라고 하는 그것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인간창조의 근본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입을 구원인가, 아니면 누릴 구원인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어디에 가서 있는 거요? 누릴 구원. 그렇지요. 그 누릴 구원을 위한 과정인 입을 구원을 안 입으면 그 목적에 도달이 되지를 못하지요.
만물을 창조해놓고 인간을 그 가운데 거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성장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고 명령하고 지시하시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을 입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구원을 입히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순종할 적마다 나에게는 그만큼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져 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이 안 입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지옥 간다는 말보다도 누릴 구원의 세계에서, 천국에서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둔팅이다. 멍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면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진하게 맺혀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는 순종이 되고, 또 순종은 사랑으로 연결이 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랑은 일반세상에서 생각하는 도와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어주고 하는 그런 거와는 질적 차원적으로 다른 겁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들은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구원을 입는데 있어서 방편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다 보면 그런 면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안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오히려 가혹하게 할 때도 있고 그런 겁니다. 꼭 세상에서 말하는 쓰다듬어주고 업어주고 먹여주고 등 두들겨주고 해야 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구원을 입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명령이 오면 순종은 자원적 소원적으로 되어나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안 받고 저주를 받지 않으려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명령대로 행한다고 하면 이건 억지가 돼버리는 거지. 또 이건 사랑이 없는 데서 나오는 거고. 그러나 그게 아니라 자원적 순종, 자원적 신행, 자원적 믿음생활로 능동적으로 나간다면 이거 얼마나 좋습니까? 꼭 명령을 해야 듣고 한다면 그 어디 쓰겠어요? 자원적으로 순종을 하면 결국은 자기 천국이고, 순종을 안 하면 자기 천국은 다 절단이 나 버립니다.
세상의 법은 세상 질서유지와 인명보호를 위해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법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면 이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지고 써먹어야 되겠지요? 예를 들면 빵을 갖고만 있으면 안 되고 내가 먹어야 만이 내 것이 되는 거지요.
우리가 처음 배울 때는 남의 지식을 빌려가지고 배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써먹지를 않고 있으면 그거는 없어져 버리거나 말라붙어 버리지요. 그러니까 진리지식을 써먹으면 내 속에서 천국이 자꾸 커지고 안 써먹으면 말라붙어 버리는 겁니다, 세상 것은 줄수록 작아지고 천국의 것은 줄수록 커지고 많아지고. 사랑은 줄수록 커지고 미움은 줄수록 자기 고통이 되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그 말도 천국의 사랑부자로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는 누구든지 쉽지요. 그러나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참 어렵습니다. 가만히 이치를 깨닫고 보면 나를 사랑의 부자로 만들어 준 자는 누구냐? 나에게 미움을 준 자다 그렇게도 될 수 있다 그 말이요. ‘원수를 사랑하라’ 그랬으니까. 그렇게 되면 승리자가 누가 되겠느냐? 사랑한 자가 승리자가 되는 거지요. 전쟁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해서 아브라함을 영웅으로 드러내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12장에서는 자체구원을 생각할 수가 있고, 13장에서는 소유구원, 천국저축법, 14장에서는 소선보다 대선, 그리고 천국의 사용법, 15장에서는 ‘종과 횡으로’ 했으니까 종은 하나님 혹은 진리, 횡은 인간관계니까 ‘종과 횡으로 행하라’ 하는 것은 천국 점령법이지요? 이 세상에 여러 수많은 사건이 있는데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자기와 관련적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을 점령하라 그 말이지요.
‘종과 횡으로 행하라’: 종과 횡으로 점령하라 그 말이요. 뭘 가지고?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종과 횡으로 행하는 여기에는 생명적 점령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대선으로 나간 거지요.
세상에는 무력적 점령도 있지요? 이건 사망적인 점령이요, 잔인한 것이고 죄악적인 점령입니다. 또 경제점령이 있고 사상점령이 있습니다. 사상점령이 제일 무서운 점령이지요. 어쨌든 무력점령 경제점령 사상점령 이런 것은 사망적인 점령입니다.
종과 횡으로 행하라.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이것은 생명적 점령이 되겠어요. 바울은 진리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온 유구라파를 종과 횡으로 점령해 나가는 거지요. 이 생명적 점령, 종과 횡으로 나가는 이 점령은 죽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는 점령입니다.
옛날에 유명한 장군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나폴레옹은 사망적 점령을 한 겁니다. 그 점령에 당한 자는 죽는 거지요. 그러나 바울은 생명적 점령입니다. 이것에 점령을 당한 자는 사는 겁니다. 생명운동에 동참 협조하게 되면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자기 천국이 확장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수입을 얻었지요? 소돔전쟁에서 최고의 수입을 얻은 겁니다. 이걸 물질수입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만능자가 된 겁니다. 소돔성을 진리와 영감으로 점령을 한 겁니다. 소돔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다스려 달라.
그런데 그 때에 이 아브라함은 영광도 대가도 전혀 받지를 않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다 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느냐? 보통 보면 어려운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칭찬을 바라고 축복을 받고자 하는 어떤 대가적인 마음을 가지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아브라함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느냐? 아브라함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는데, 일을 위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물론 그 전쟁에 안 나갈 수도 있어요. 왜 그러냐? 그돌라오멜이 와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으로 정복을 하고 들어온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고 한 간접적인 관련성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주변에 사는,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건들을 자기와 직접 관련을 맺어가지고 종과 횡으로 행해나갈 때에 자기 것이 된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었던 그 이유는 사건적으로는 승리를 얻고 잘 되었지만 문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 자기가 한 일이 백점 만점이 됐느냐’ 하는 그 면에서 걱정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건완성과 미완성과 하나님의 기쁘심은 따로 있습니다. 사건완성이 됐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안 됐다고 해서 안 기뻐하고 하는 그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사건과 다르단 말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사건이 완성이 잘 됐어도 진리대로 안 했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본주의 정책을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던 말든 상관없이 인본주의 정책을 잘 쓰지요?
우리가 교회의 집회를 보면 양심에 허락지 않는 그런 집회도 있는데, 물론 진리적인 집회도 있어요. 문제는 집회를 하던 예배를 하던 오직 사람만 바로 만들어갈 것이다. 사람 바로 만드는 것. 사건완성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 하나 바로 만들어가는 것.
예수이름을 팔아서 사건을 완성시키려고 하는 그런 자는 명예도둑입니다. 성경에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지 일 완성이 아니지요. 우리가 죽도록 충성은 했지만 일은 안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맡긴 이유는 일 완성이 아니고 구원을 입혀주려고 일을 맡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이 성공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능동적 순종 자원적 순종으로만 해 나가는 그것이 충성이지요. 그러면 거기에는 구원이 입혀진다. 그렇게 해 나가는 거기에 뭐 ‘일이 잘 된다, 못 된다’ 그거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사람 보기에는 일이 완성이 되어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 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리대로 했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이 합격이 되어야 되는데, 아브라함의 경우 거기에 대해서 모르니까 두려워했다 그 말이요.
어떤 사람들은 4대 연합군들이 패배를 당했는데 도망간 이 자들이 다시 재무장을 해가지고 아브라함에게로 쳐들어올까 싶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앞뒤가 잘 맞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진리로 싸워서 이긴 겁니다. 따라서 2차 3차로 올라와도 두렵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하는 여기에는 구원이치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일을 잘 했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아브라함의 경우 마음속으로 기도가 나올 테지요. 이것을 본 하나님이 가만 계시겠느냐? 아무리 어려움 속에서도 변질이 되지를 말아야 하나님이 감동이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또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도 감동을 잘 받습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 ‘아브라함 네가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죽음을 무릎 쓰고 그 어려운 일을 했으니 네가 받는 화살을 내가 다 받겠다. 너에게 오는 피해를 내가 대신 맞아주마.’ 이게 방패란 말이요. 방패가 다 막지요. ‘네가 질 십자가를 내가 대신 져주마.’ 방패는 대신 막아주는 것입니다. 화살이 오면 방패가 가서 막지요?
상급이 뭐냐? 하나님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독차지한 겁니다. 생각을 해 봐요. 하나님을 독차지한 신앙의 사람들이 많지요? 다윗도 보면 그 시대에 하나님을 독차지 했지요? 하나님을 독차지한 사람을 보면 그 앞전에 죽음을 무릎 쓰고 말씀에 순종해서 나가는 어떤 큰 사건들이 있지요?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입니다. 그 때뿐만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상급이라’ 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값진 것을 주려고 해도 한에 차지를 않는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 자신을 너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생각을 해 봐요. 딴 것을 다 줘도 한에 차지를 않아서 당신 자신을 주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한 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몰라?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귀중한 것을 얻으려면 달라고 하면 될까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면서 살아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살려니까 힘들어요? 모두 자기 위주입니까?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해주심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이 점점 들어가서 자라나서 모든 면에서 믿음의 이치를 갖고 자원적 순종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 속에는 죄악성적인 요소가 있어서 늘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은 건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지나 않은 건지?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주님의 삶의 걸음걸이를 압니다. 우리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늘 감동시키면서 산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제 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저희들도 주님의 사상과 그 정신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말씀에 고분고분 자원적으로 순종하면서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가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나그네 생활하는 동안에 어찌하든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의사를 알고 자원적 순종으로 살고, 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는 복스러운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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