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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출8:2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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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양인순 목사 |
| 참고 : | 20050123 성지교회 http://sungjii.or.kr |
출8:25-31
가치관이 변해야 승리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차공간을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차 금지 구역에 차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메모 한 장을 차 위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 주변을 15분 동안 찾아 헤맸지만 주차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차를 세우지 못하면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 한 구절을 써 놓았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잠시 후에 돌아와 보니 차 위에는 주차위반 스티커가 발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장 쪽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구역을 15년 동안 돌고 있는 주차단속 책임자입니다. 제가 만약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으면 이번엔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 한 구절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상황에서는 누구의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를 말할 수 없습니다. 주차하는 입장에서는 직장을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차위반 단속원 입장에서는 위반을 눈감아 주면 자신의 직장을 잃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는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차를 세우는 자의 입장을 지지하면 동정론자가 됩니다. 단속원의 입장에서 보면 공정한 법의 집행자가 됩니다.
주기도문의 인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를 세우는 입장은 자기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스티커를 발부하는 입장에서는 공정한 법 집행의 차원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 가치판단이나 가치선택을 해야합니다. 그 때 일관되게 작용하는 가치기준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 혹은 신념의 체계적 형태를 가치관(價値觀, sense of value)이라고 합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인간관·사회(국가)관·역사관·예술관·교육관·직업관·종교관 등이 달라집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가치관의 혼란' 혹은 '가치관의 위기' 시대라고 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이 모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 친구가 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반에서 종종 돈이 없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훔친 학생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받을까봐 조용히 상담실로 불러서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한달 용돈을 몇 만원씩 쓰는 아이들 용돈 좀 가졌다고 그게 죄가 되나요? 좀 나누어 쓰면 안되나요?" 죄책감을 가지고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더랍니다. 그 상황에서 자기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전 같으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로 분명히 나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가운데는 그 자체를 죄악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재미 삼아, 심지어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백화점이나 편의점 등에서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갈등과 번민을 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도 따지고 보면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얼마 전 새만금 방조제 사업을 원점에서 재고하라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것 역시 환경보호라는 입장과 개발이라는 경제적 논리의 충돌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회 곳곳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가치관이 변해야 승리합니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천국이 바로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생에서 최고 최선의 가치관을 결정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고백이 불확실하면 우리의 인생은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가치관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 중심의 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종교적 허물이 벗겨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자기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적인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가치관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율법의 종교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복음의 가치관을 가질 때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처럼 복음 중심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좋겠는데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고 내가 살아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삶으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으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봉독한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 고 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피의 재앙이 임합니다. 개구리, 이, 파리의 재앙이 계속됩니다. 견디지 못한 바로가 모세에게 제안을 합니다.
25절입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너희는 이 땅에서 즉, 애굽 땅 안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지 말고 이 땅에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우상의 땅입니다. 죄악의 땅입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땅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되 너희 신분의 본질은 노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나가되 세상적인 가치관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작전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사탄의 첫 번째 작전입니다.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네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세상의 노예라는 가치관, 정신을 유지하라" 사탄은 오늘도 집요하게 그리스도인의 급소를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교묘한 사탄의 작전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세상중심입니다. 세상에 박힌 말뚝을 뽑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아갑니다. 이런 분은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비난하는데 앞장서기도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교회를 움직이려다가 교회를 갈등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애굽을 떠나지 못한 사람, 세상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 그는 종교인은 될 수 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종교적 형식은 있을 수 있고, 직분은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 살아도 찝찝합니다. 교회안에 찾아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당당하지 못합니다. 예배는 드리면서도 실상은 세상 애굽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지금도 사단은 아무런 부담 없이 종교인으로 지내다 보면 구원도 받고 그러다 죽으면 천국도 갈 거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이러한 바로 왕의 타협안에 대해 모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26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애굽 사람은 짐승을 섬기는 사람이요 우리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당신과 우리는 가치관이 다르고, 예배 드리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리함은 불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 제자리를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확실하게 나를 매어 놓은 세속의 말뚝을 뽑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묶어 놓고 있는 세속의 줄을 예수 이름으로 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타협안에 실패한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내어놓습니다. 2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정 그렇다면 가서 예배를 드리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되 너무 유별나게 믿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적당히 체면을 유지하며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무 열성분자처럼 티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루 아침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주일날 가계 문 닫고, 예배시간마다 은혜 받았다고 찔찔짜고, 저녁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까지 야단법석 떠는 것 그거 별로 안좋으니 적당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세상에서 우리를 교회로 풀어주는 듯한 유화정책을 쓰지만 자신이 붙들고 있는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단호해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적당히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처럼 목숨을 걸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뿌리는 농부처럼 땀흘려 수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처럼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사역하라고 권면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매일 붙잡고 기도하는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네 자신을 드리기를 힘쓰라." 힘쓰라는 말은 최선을 다하라, 헌신하라, 충성하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발목만 은혜의 강물에 담가놓고 찰싹거리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주제가가 있습니다. ♪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408장) 이런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무릎까지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응답도 곧잘 받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가슴까지 담그고 살아갑니다. 감동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온전히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온 몸을 담그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온전히 맡겨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마귀는 오늘도 협박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아라. 멀리가면 너 빠져 죽는다. 바로 왕은 속입니다. 내가 법 먹여주고, 집 주고, 옷 입혀 주었는 광야에 나가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유혹합니다. 그러니 잠깐 나가서 예배만 드리고 곧 애굽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배만 빨리 드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력한 집단이 되었습니까?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바로의 타협안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믿되 멀리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교회가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의 타협안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가라 하면 가야 합니다. 내가 비록 지금 애굽에서 고기국물을 먹고, 집에서 잠을 자지만, 광야로 가라하면 가야합니다. 비록 그곳에는 전갈이 있고, 무더위가 있지만 주님 말씀대로 순종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세상적인 가치관의 줄을 놓고, 주님의 손을 잡고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강퍅한 바로를 굴복시키려고 하나님은 악질과 독종과 우박과 메뚜기의 재앙을 내립니다. 그러자 바로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타협안을 가지고 나옵니다. 10장 10-11절입니다.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찌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온 가족과 우양 떼가 함께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바로는 가기는 가되 남자만 가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는 안되고 남자들만 가서 예배를 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 혼자만 열심히 하라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역이니 소그룹이니 하지 말고 자기만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가족입니다. 가족은 아무리 잘못해도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상호간의 돌봄과 책임이 중요합니다.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함께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김분연 집사님 딸 효림양이 교통사고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낮에는 하루종일 야쿠르트 배달을 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딸을 간병합니다. 제가 어느날 보니 같은 구역 식구들이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렇구나. 저것이 바로 소그룹, 구역이 중요한 것이구나를 깨달았습니다. 함께 아픔의 짐을 나누기 위해 자발적으로 야쿠르트를 배달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우리는 영적 가족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지 무슨 구역예배가 필요하냐고 유혹합니다. 나만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으면 되지 무슨 소그룹이 필요하냐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삶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기도함으로 신앙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2월 첫 주부터 시작되는 구역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목적이 이끄는 40일에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영적인 가족으로서의 교제입니다.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모든 성도님들이 소그룹 모임에 모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거절하는 바로에게 흑암의 재앙을 내립니다. 그러자 바로는 네 번째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이와 같이 집요합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양과 소는 두고 몸만 가라는 것입니다. 물질로까지 예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신처럼 섬기는 양과 소를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는 의도입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유혹입니다.
여기에 넘어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과 축복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8장 29-30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아멘!
이것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집을 버리거나 가정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먼저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세상적인 가치관에 붙잡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물질에 대한 집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자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내게 주신 생명도, 가정도, 일터도, 사업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십일조의 예물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창고에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겼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지교회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주님이 찾고 계신 바로 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가치관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속적인 가치관을 붙잡고 있는한 주님은 여전히 슬퍼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끊지 못하면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사탄에게 묶여있는 말뚝이 있다면 뽑아버립시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지 못하게 동여맨 줄이 있다면 끊어 버립시다.
소그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 있다면 뚫어버립시다.
물질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속임수를 성령의 능력으로 소멸시킵시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완전히 변화된 가치관을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빌3:7-8) 아멘!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왔던 헛된 가치관들, 썩어 없어질 것들, 허황된 것들,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결박하고 짤라 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라는 거룩한 영적 전쟁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영광스런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무장할 때에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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