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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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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비판을 주의하십시오 (마 7:1-6)
미국에 이혼을 강력히 반대하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는 곳마다 소리를 높여 이혼을 정죄했습니다. 특히 성도는 결코 이혼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혼은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차가운 목사님도 아닌데 이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섭게 정죄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이혼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의 아들이 오랜 결혼생활의 고통 끝에 이혼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며 키운 아들이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후 그는 이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공개적으로 교인들에게 이혼을 강하게 정죄한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자들을 품고 위로하는 따뜻한 설교를 시작했고 그들을 돕는 교회 프로그램도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이혼해도 좋다는 말이나 이혼을 편하게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혼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이혼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에 이혼을 쉽게 정죄하면 안 됩니다.
한 목사님은 몇몇 초대형 교회 목회자 자녀들의 탈선을 언급하며 초대형 교회 목회자들을 소리 높여서 맹비난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는 법입니다. 그 자녀들의 탈선행위를 보십시오. 그들의 모습이 그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어떻게 그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자신의 딸이 몸을 파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깊이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보면 비판이 체질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비판을 잘하고 글도 잘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판을 잘하는 것은 그가 아직 철이 덜 들고 인생을 잘 모른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비판 대상이 당하는 쓴 맛을 자기도 직접 겪고 나서야 비판 중독을 끊고 철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신을 신어보면 비판을 조심하게 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철든 인생이 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담배를 피우다 걸렸습니다. 사모님이 울면서 학교를 찾아가자 선생님은 “어머님! 제가 때리는 것을 용서하세요.”라고 한 후에 사모님이 보는 데서 매질을 했습니다. 사모님은 자기 자녀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매질 후에 사모님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래?” 그때 아들이 황당한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엄마! 짜장면 먹고 싶어요.” 그렇게 순진한 아이가 호기심에 그냥 담배를 한번 펴본 것입니다. 다행이 그 후로 아이가 더 이상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때부터 목사님 부부의 성도 사랑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모태 때부터 믿음과 기도로 키웠던 아들도 그렇게 탈선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성도들 중에 탈선하는 성도가 왜 없겠느냐고 하면서 성도들을 더욱 이해하고 품게 되었습니다. 인디언 속담처럼 친구의 신을 신고 오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를 쉽게 판단하면 안 됩니다.
< 비판과 관련해 필요한 교훈 >
본문은 산상수훈 말씀 중의 일부로서 비판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이 있는 본문입니다. 성도는 비판과 관련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비판을 주의하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씀은 비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건강한 비판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비판 자체가 영혼과 교회생활을 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게 판단하고 용기 있게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결국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은 비판을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비판은 자신과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경솔한 비판으로 피해를 입을 때도 있고 피해를 입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커질 때도 많기에 지혜롭게 비판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비판은 비난이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다릅니다. 바른 비판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비난은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비판을 상습적으로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비판 중독이 되어서 작은 꼬투리만 잡아도 집요하게 그의 허물을 캐내려고 합니다. 바른 비판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하면 마음 아파하지만 비판 중독자는 남의 허물을 찾으면 쾌재를 부릅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정보를 수집하면서 쾌락을 느끼고 상대의 장점은 감추고 단점만 들춰냅니다. 그처럼 비판하다 보면 비판 중독증에 걸리기 쉽기에 항상 비판을 주의해야 합니다.
2.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비판 중독자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면서 자기 눈에 있는 큰 들보를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둘러보며 비판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일부터 잘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 구절에서 “자기 일을 하라!”는 말을 어떤 영역본에서는 “Mind your own business!”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려면 한국말 표현이 어색해도 항상 먼저 직역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후에 자연스런 표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표현을 잊지도 않고 상황에 맞게 자신 있게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네트영어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
“Mind your own business!”란 표현을 직역하면 “네 자신의 일이나 마음 쓰라!”는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신경 꺼! 너나 잘해!”란 많이 쓰는 영어 회화 표현입니다. 듣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복된 삶과 복된 인간관계를 위해 그 표현처럼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표현은 없습니다. 결국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너나 잘하고 ‘몸’보다 ‘손’이 바쁘고 ‘입’보다 ‘일’이 바쁘기를 힘쓰라!”
어떤 사람은 너무 남의 일에 신경을 씁니다. 너무 시끄럽고 나쁜 말 전파에 너무 입이 바쁩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에게 권면합니다. “Mind your own business(너나 잘하라)!” 남의 일을 너무 간섭해서 모든 일을 다 자기 손에서 요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신경을 쓰는 것’보다 ‘신경을 끄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많습니다.
3. 외식하지 마십시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큰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고 작은 남의 허물만 크게 보는 자는 결국 외식하는 자란 뜻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비판과 정죄를 잘하는 외식적인 사람은 개돼지와 같다는 암시가 담긴 말씀입니다.
외식적인 비판 중독자는 누군가에게 아무리 좋은 장점이 있어도 그것들을 발로 밟고 심지어는 그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를 찢어 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를 깎아내려야 자신이 올라가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무자비한 비판자나 정죄자가 되지 않으려면 남을 칭찬해줄 줄 아는 성품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래야 성공적인 삶이 펼쳐지고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도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을 끌고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인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그녀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특이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즉 허리를 숙이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며 그들의 얘기를 무시했습니다. 어떤 주석은 그 부분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예수께서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 대해 비판하면 하나님은 그런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비판자의 비판’도 듣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비판자의 기도’도 듣지 않습니다. 그 말은 결국 비판이 기도응답을 막는 최대 장애물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응답을 원하면 비판을 힘써 참으십시오. 영원히 참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최대한 참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문제에 대해 말할 최적의 기회를 주시거나 아니면 잘못 나가는 그에게 환경의 채찍을 대심으로 그 고민하는 문제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 입술을 잘 조절하십시오 >
살면서 비판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비판하는 만큼 비판 받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에 대한 어떤 비방이 들리면 분별해서 듣고 냉철하게 잘 판단하십시오. 비방은 남에 대해 치명적인 나쁜 말을 퍼붓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어두운 단면을 슬쩍 보여주고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슬쩍 드리우는 것입니다. 그처럼 깊은 사연도 잘 모르면서 얕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어두운 단면을 슬쩍 보여주고 어두운 그림자를 슬쩍 드리워서 남을 욕 먹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그 말은 사실입니다.” 물론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쉽게 퍼뜨릴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 말을 쉽게 퍼뜨림으로 남을 욕 먹이면서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처럼 자신의 명예는 더럽히기 싫으니까 요새는 인터넷 공간 등에서 이름과 얼굴 없이 뒤에서 총질하는 야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야비한 본능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그 본능이 드러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비판을 절제하십시오.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얼마나 뜨끔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비판하는 것이 비판 받는 사람의 잘못된 행위보다 더 잘못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엄중한 충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삶을 원하면 잘못된 비판이 입술에서 쉽게 나오지 않도록 잘 조절하십시오. 입술만 잘 조절하면 인생도 잘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죄가 넘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 상대의 허물을 감춰주고 그 영혼 안에 있는 최상의 장점을 발견하고 최대한 그를 높여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최상의 순종으로 보시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높이 이끌어주시면서 그에게 최상의 축복과 행복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항상 비판적인 본능을 잘 억제하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말을 많이 해줌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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