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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501 추천 수 0 2013.04.10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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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12.14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눅18:1-8

우리 교회는 원창고개와 교도소 사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원창 고개의 북쪽이며 교도소의 남쪽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느 쪽에 있는 겁니까? 서쪽인가요? 아니면 동쪽인가요?

이렇게 아래쪽이니, 위쪽이니,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은 절대적 값어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단 말입니다. 기준을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서 동과서가, 위와 아래가 변하죠.

거꾸로 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본 세상이 바른 세상인가요, 바로 본 세상이 바른 세상인가요? 세상이 바로 서 있다면 바로 보는 세상이 바른 세상일 터이고 세상이 거꾸로 서 있다면 거꾸로 보는 세상이 바른 세상일 것입니다. 전체 세상이 바로 서 있는지 거꾸로 서 있는지를 판가름하려면 바름(正)과 거꾸로(倒)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하겠죠.

그런데 유한한 인간이 이러한 절대적 기준을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신구약 성서는 가르치기를 이 세상은 죄악 가운데 있으며 궁극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어떤 기본 입장에 서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기독자들 사이에서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視角)이 판이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죄’는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밑바탕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이 죄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은 죄의 문제를 구원론과 연계하여 논의합니다. 이 경우에 사죄 즉 죄의 용서가 모든 논의의 목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죠. 죄의 용서를 강조하는 자리에는 오로지 ‘죄인’의 운명만이 관심의 초점(焦點)이 됩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닙니다. 죄는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하여집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가 행해진 자리에는 죄를 범한 죄인과 그 죄의 피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죄인은 가해자입니다. 피해자를 시야(視野)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오로지 가해자인 죄인과 그의 죄 용서를 목표로 삼는 것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고립시키며 결국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전통적인 신학이 전개하는 죄론(罪論)은 일방적입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오로지 죄인의 입장에서 보았고, 죄와 부정(不正)의 희생자들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죄인과 관련된 신학 사상을 많이 개발했지만 죄의 희생자는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죄 문제의 주요한 한 측면을 간과한 것입니다. 교회는 죄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기독자는 관점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가해자(죄인)의 용서도 취급해야 하지만, 피해자(죄인에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자의 아픔도 들어보고 해결해 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해자/강자/승리자/억압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약자/패배자/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위하여 신학의 틀을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이런 관점 전환의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셋입니다.
과부, 재판관, 과부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죠.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전형입니다. 늘 피해를 당하는 사람입니다. 재판관은 부당하게 침해를 당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 기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과부가 재판관에게 그녀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은 무엇이 문제가 되어 있는지를 이미 잘 드러냅니다. 이 과부는 그녀의 마음에 맺힌 한(恨)을 치유 받기 위하여 심리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의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재판관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과부는 자기의 권리를 침해한 상대자를 ‘안티디코스’(antidikos)라 일컬었다(3절). 개역성서가 여기서 이 낱말을 ‘원수’로 번역한 것은 원어의 뜻을 왜곡시킵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 나오는 ‘안티디코스’는 개역성서에서도 ‘송사하는 사람’으로 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안티디코스’는 소송 행위의 적대자를 가리킵니다.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호소한 말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세요”입니다(3절). 이 말의 내용이 5절, 7절, 8절에서도 되풀이해서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에 이것은 이 비유 이야기가 문제 삼고 있는 핵심 내용과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뭘까요?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개역>).
“내 (송사) 적수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200주년>).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표준새번역>).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공동번역>).

이것은 ‘누군가에게 빼앗긴 ‘나의 권리’를 찾아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그게 그로서는 그에게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그를 벌 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권리를 원상회복 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는 명예 회복입니다. 공정한 재판관이 해야 하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해 주는 일입니다. 공정한 재판관은 소송 사건의 정당한 당사자에게는 그의 권리 또는 그의 정당성을 회복해 줄 것이며(눅 18:3) 불의한 당사자에게는 공의로운 벌을 내릴 것입니다(고후 10:6).

재판관은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죠. 그러나 약자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판관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한테 미약한 과부가 억울한 사정이 공정하게 처리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이 과부는 그러한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 과부는 불리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재판관에게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장 아무런 응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졸라댔습니다. 재판관은 처음에는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결국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요? 이것은 누구를 겨냥하여 이야기한 것인가요?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적대자들에게 던지는 공격·질책의 비유와,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격려의 비유로 나눈다면 이 ‘과부와 재판관에 관한 비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임이 분명하겠죠? 그렇다면 이 비유가 가르치려고 한 것은 무엇이며 또는 격려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 물음의 답은 과부와 재판관 중에서 어느 쪽이 이 비유 이야기의 주주인공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과부가 주주인공이라면 과부의 행동은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즉 이 과부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역사의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반대로 재판관을 주주인공으로 보는 경우에는 하나님은 끝내는 자기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겠죠.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재판관이라도 이렇게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더욱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는 도입문 하나와 적용문 두 개가 붙어 있습니다. 도입문은 예수께서 무슨 취지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편집자가 논평을 했습니다. 적용문은 비유의 의미를 현실에 응용하는 말입니다.

첫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상실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두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여기서 목표하는 바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 있을까요? 즉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정보 제공이 그 목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하나의 대전제로 제시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첫 번째적용문 속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숨겨진 의미는 두 번째 적용문을 통하여 재확인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뜻하겠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기의 백성을 오래 모른 체하지 아니하시고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은 곧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까?
도입문은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즉 이 비유의 취지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도록 제자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늘 기도하는 것’과 ‘낙심하지 않는 것’이라는 별개의 두 사항을 단순히 병렬한 것이냐 두 개를 내용적으로 하나의 초점에 모으는 것인가요?

“장래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 또는 “이걸 먹고 힘내어라”한다고 합시다. 여기서 장래를 생각하는 것은 게으름 피우지 않기 위한 하나의 지침이며, 이걸 먹는 것은 힘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데 역점이 놓여 있겠죠. ‘늘 기도한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 자세의 한 구체적 표현이며 낙심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입니다. ‘열심’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장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서들이 “늘 기도해서 낙심하지 않게 하라”라는 표현을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여라”라는 뜻으로 뒤바꾸어 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일 늘 기도하는 데 역점이 놓였다면 과부의 행위는 늘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적용문이 이것에 대한 확실한 반증입니다. 두 번째 적용문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볼(또는: 기도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첫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백성이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교회 다니는 교인,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적 신분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무력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억울한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가망성은 이 세상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 둡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습니다. 이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믿을 만 한 게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바로 세우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종말적 희망은 역사의 점진적 발전에 근거한 순진한 낙관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좌절을 거부하는 철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개개인을 그의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시킨 채 ‘죄 투시경’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하늘나라로 보내거나 지옥으로 보내는 처사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며 역사를 새롭게 세우는 일입니다.

과부와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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