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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고난의 연대보증’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36 추천 수 0 2013.04.10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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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5:16-3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3.3.17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구원과 ‘고난의 연대보증’
막 15:16-32


이스라엘 사람들의 법은 야훼 평등법입니다. 안식일에서부터 십일조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대인들의 법과 규례는 ‘야훼 평등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고엘법’이라는 게 있는데, 민수기 35:19-21언저리에 등장합니다. 이 법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빚을 졌다가 갚지 못하거나, 남에게 맞고 오거나 하면 반드시 다른 가족이 배상을 해줘야 하고, 두들겨 패 주어야 합니다. 물론 목숨을 잃으면 대신 죽여도 됩니다. 만약 가족 중에 그럴 사람이 없으면 씨족 중에 누군가가 해 줘야 하며, 씨족 중에도 되갚아 줄 사람이 없다면 부족 중에서 해야 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일화가 그 중 하나입니다.  

‘연대보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빚보증을 섰다가 망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로 그 ‘보증’말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보증’이란, ‘사람의 신용이나 사물의 품질 등에 대하여, 틀림 없이 믿을 만함을 책임지고 증명 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국어 사전적 의미입니다. 이 ‘보증’이 법률로서 작용을 하게 되면, ‘보증인이 채무자와 공동으로 채무를 이행할 것을 하는 약속’이 됩니다. 즉, 내가 돈을 빌린 게 아닌데도 내가 빌린 것으로 간주하여  주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거나 안하면 내가  대신 빚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스라엘의 고엘법은 일종의 ‘고난의 연대 보증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를 갖는 이유는 사는 동안 발생하는 가족이나 친지의 불행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네가 불행하면 내가 불행하고, 네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다’는 문장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해야 평등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슬람들이 다른 나라의 분쟁이나 이슬람형제들의 고난에 세계적으로 개입하는 이유는 그들은 모두 한 형제이며, 구약의 고엘법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빚도 갚아줄 뿐만 아니라 원수도 갚아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엘 법’또는 ‘고난의 연대 보증인 제도’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이슬람 민족만이 지닌 무도한 법일까요? 아니, 이 법이 사회와 인간 개인을 헤치는 악법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게 될 때 결코 비켜 갈 수 없는 법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결국 이 구약의 ‘고엘 법’의 연장선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한 형제자매로 ‘고난에 대하여 연대된 보증인’으로 살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쁨도 함께 나눠야 하지만, 고난도 서로가 책임져야 하는 사항이라는 뜻입니다. 이래야 천국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사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조롱을 받고 치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는 참혹한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요. 어디에도 영웅적이고 찬란한 승리의 메시아상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군인들은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조롱하고,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갈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는 것은, 예수가 대들보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끝내 기진하여 더 이상 질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형은 실제로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박는 것이므로 그 고통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조롱하여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고난 현장에서는 아무런 신적, 초월적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믿음은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가 당한 무능하게 보이는 고난을 각자의 내면에서 해석하고 믿었기에 예수를 따른 것이지, 예수님이 뭔가 놀라운 신기술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러한 수난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3; 갈 1:4).

“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다”는 것이 유대 사회의 통념이었습니다(갈 3:13). 사람들이 구경꾼의 입장에서 십자가 수난 현장을 보았을 때, 예수는 어리석은 자요 패배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요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고전 1:23).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내 아픔으로 따라 느꼈을 때, 그것은 무력하거나 불운한 죽음도, 패배자의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죽음’ ‘내가 죽는 고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죽음의 연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졌고, 자기를 내 주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1:24). 타자의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바로 ‘내 고통, 내 죽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열려진 구원이 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빼앗아서라도 내가 고통당하지 않으면 그것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의 고난에 함께 아파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보증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가 갚지 못하면 내가 갚겠다고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의 아픔을 내가 떠맡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종교요 진리라고 예수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언명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비유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고난에 연대보증인으로 살 때에 전혀 다른 내가 전혀 다른 존재인 너와 연대감을 갖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행복은 이기주의적인 행복과는 질이 다릅니다. 마치, 동생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형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뿌듯하고 촉촉한 기운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므로 ‘내가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전제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이 고급화되고 깨끗하고 건강하고 잘난 것만 추구하게 되면서 더더욱 그런 추세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빠지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친형제와 자매 사이도 점점 관계의 노쇠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노숙자, 장애우... 뭔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것 같은 사람들은 일단 피하려고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 간 사람들과 그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바쁜 사람들이고 후자는 한가한 사람이었을까요? 전자는 인간성이 나쁘고 후자는 좋았나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성경 본문에서 단서를 찾아보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되어 있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차이가 있다면 ‘피해서 지나간’ 사람과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간’ 사람의 차이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은 측은한 마음에서, 가까이 가는 데서,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지 않고,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에 처한 그 누구하고든 연대보증인이 아닌 것처럼 처신합니다. 곤란한 상황에 있으면 부모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야 말해 뭐 하겠습니까? 오로지 나의 행복을 침탈하는 귀찮고 필요성 제로의 존재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치료받은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암시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마땅히 강도만났다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목숨을 구한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일 테지만 성서는 그를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서가 직시하는 인물은 ‘목숨을 구한 그 사람’ 이 아니라 ‘고난을 당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사마리아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신앙적 핵심은 ‘내 목숨을 구하는 데’있지 않습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내 일인 양 하여 그의 보증인’으로 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제3자와 무관한 나만의 기쁨입니까? 아니면 ‘내 수고와 경제적인 원조를 받은 타인의 행복’에서 일어나는 기쁨입니까? 내 수고와 손실로 한 사람이 죽어가다가 살아났다는 데서 잔잔히 번지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목숨을 구한 게 되지만 내게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고, 함께 아파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이며 죽음이며, 그것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 삶으로 이행할 때 이것이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연대보증인’으로 우리가 살지 않는 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쁨을 수시로 맛보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모르는 것이고, 이런 예수를 모르는 한, 새로운 생명과 구원은 허상의 이름으로 피어나는 봄  날의 아지랑이 일 뿐입니다. 증대되는 에너지에 곧 소멸 되는 아지랑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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